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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을 쓴지가 어언 십년이 넘은 지라 그간 한국 경제도 몰라보게 성장하여 잘 사는 나라로 변모를 거듭하여
이제 산의 나물을 뿌리째 뽑는 그런 다급함은 없어지고 최근에는 비만과의 전쟁으로 온나라기 들썩입니다.
그래도 산야채에 대한 기호는 변함이 없는것 같습니다.
역시 사람사는곳이라 카나다도 그런 여러가지 규제가 시행되는 군요.
전주에 대한 남다른 추억과 연고가 많으시네요. 지내 볼수록 전주가 음식솜씨도 뛰어나고 양반스런 도시입니다.
여긴 그간 세상 인심도 몰라보게 변해서 미풍양속도 서서히 무너 지고 이제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졌지요.
이렇게 써 놓은 글이 시대상을 가록해 놓은 생활기처럼 느껴집니다.
가족과 함께 늘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만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
메누리가 뱅쿠바 섬에 있는 빅토리아 대학에 tenured 교수로 있는데 북경대학의 초청을 받고 중국엘 다녀 왔답니다 북경대학교 부교수로 되어 지금 중국에서 장기계획으로 실시하는 수자원 보호와 개발에 일할 대학원생들을 훈련 시키는 일을 위탁 받았다네요. 인터넷을 통해 공부들을 시키면서 가끔 왔다 갔다 하기도 할 모양이랍니다. 메누리는 전공이 물에대한 연구로 토목공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전문 분야에서는 세계에서도 좀 알려진 존재랍니다. 그런데 메누리가 공부 못하는 아이들을 죽어라하고 싫어 한답니다,ㅎ,ㅎ. 말이 통하는 메누리라 저나 마노라 둘이 같이 참 좋아 합니다. 이탤리 사림인데 그 족보를 캐어 보니 중세기에 그리로 와 정착한 사라센의 후예더군요....
훌륭한 며느리를 두셔서 행복해 보이십니다.
동양계도 아닌 서양계 며느리를 보셨어도 서로의 풍습이나 가치관에서 오는 차이점은 못 느끼시는가 봅니다.
여기는 종종 동남아계 여성을 데려와서 가족간 갈등을 격으며 사는 가정 이야기가 이따금식 T.V에 뜹니다.
가족이 화합해서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게 인생길의 제일 가는 성공의 첩경인것 같습니다
후배님은 여러모로 성공을 하셨습니다. ㅎㅎㅎ
이탤리인들이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게 많은데 가족애와 특히 어머니들의 자식에 대한 정성은 대단하지요. 손주가 외할머니는 토론토에 있고 친할머니가 더 가까운데 있어서 자주 보니까 너무나 친할머니를 따릅니다. 사위의 아버지는 스컷티쉬에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레바나스인데 기계공학 엔지니어로 진작 자영업을 시작해 정밀기계 공작소를 운영하는데요. (CAD/CAM. moulding) 힘들어서 남들이 못하는 일을 맡아 하는게 전문이라 이곳뿐만 아니라 미국쪽에도 거래가 많은가 봐요. 이번에 또 새 공장건물을 하나 더 사서 사업을 느린다네요. 둘이다 산 등반하는걸 좋아해 시간만 나면 산에 갑니다. 우리음식 더구나 매운것들을 아주 잘 먹어요. 우리집에 좀 힘든 일이 있을때는 공장에서 사람들을 보내 도와 주기도 합니다. 일하는 이들을 아주 잘 다루며 임금도 후하게 주고 명절때는 보너스도 푹푹 주어서 인기가 대단해요. 그리고 친구들이 어찌나 많은지 놀랠정도 입니다. 아주 대인관계 기술이 좋은가봐요. 자식들이 속 썩이지 않는것만 해도 선배님이나 저나 복이 아닌가 합니다.
이번주에는 100년째 Stampede fair가 있는데 다행이 비가 그치고 아직은 너무 더웁지도 않은 날씨로 되어 잘됐습니다.
고사리는 공교롭게도 국립공원안에서 정말로 무성하게들 자라 나는데 국립공원 안에서는 돌맹이 하나 작은 나뭇가지 하나
건드리는것도 금지하고 있지요. 특히 근래에 이민온 이들이 마구 따다가 벌금 톡톡히 내고 불평하는것을 듣곤 합니다.
손주가 사는 Vancouver 섬에서는 굴이나 조개를 마구 따다 말성을 부리기도 하고. 나라 망신 시키는 짓들은 좀 삼가
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낙시는 저희는 바로 집앞 언덕 아래가 Bow강이라 거기 내려가서 할수 있네요.
전주 시내나 주변에는 처가 인척들이 많이 퍼져 살고 있답니다. 이조 말기에 귀양에서 풀려난 마노라 증조부가 낙향해서
임실군에 자리를 잡고 자손들은 전주 남송, 북송동에 살게 하고 정계를 멀리 하고 사셨다는데 아들인 저의 장인께서 과거
한번 못보고 나라가 망하는 통에 생각하시길 신학문을 배워야겠다고 임실읍에 있는 소학교엘 가면 헌다 하는 집 자손이라
그냥 교실에 을어와 앉게 해 주었는데 증주부께서는 일꾼들을 시켜 학교에서 끌어 내오곤 했답니다. 그때는 기차를 타려면
일본말을 할줄알고 천황폐하를 기려야 기차표도 살수 있어서 두분은 모두 늘 전주에 볼일이 있으면 걸어서 다녔답니다.
장인께서는 한번 밤길에 집으로 오다 호랑이를 만난적도 있고. 근데 호랑이가 앞장을 서서 길을 바래다 주더랍니다. 일제
시대가 된후로 그래서 아들은 일본 유학읈 시켰고 딸들은 다 전주고녀로 보냈고. 전주에 전기가 들어 오자 자비로 임실까지
전기를 드려 오는데 필요한 전봇대와 전선값을 치루고 동네에서 전기의 혜택을 받게 해 주셨답니다. 장인 장모께서는 이곳에
오셔서 몇년 사시며 새 안경이랑 보청기도 정부에서 무료로 공급 받았는데 5년쯤 되니까 돌아 가시길 원하셔서 임실에 있던 집에
평생 가꾸어 놓은 정원에 있는 모든 귀한 나무랑, 꽃들을 성북동 큰딸네로 옮겼는데 정원을 다시 만드느리 옆집을 사서 헐고 그
터에다 모두 옮겨 심었답니다. 10년쯤 더 사시다 두분 모두 거의 100세가 다 되어 타계 했습니다.
임실에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때 한번 갔었는데 그렇게들 반겨 주더라구요. 카나다에 사는 아무개네 두째딸네 가족이 왔다고.
장인께서 친구들과 함께 돈을 모아 지었다는 영벽정이라는 곳엘 갔었는데 이제는 도에 기증이 되어 공원처럼 되었는데 들어가는
입장권을 사게 돼 있더라구요. 같이 갔던 동네 교회 장로님이 이게 누구네 자손인데 저기 저 현판을 쓰신 이공근씨네 두째딸이
리고 소개를 하니까 얼른 나와서 깍듯이 인사를 하며 물론 그냥 들어가 보시라고 하더군요. 그때만해도 시골은 옛정들이 남아 있더라구요.
지금은 전주가 우리나라에서 살가좋은 도시로 손꼽히는 곳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