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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떠나는 여행길은 친구 가족과 함께하는 그것과 사뭇 다르다.
여러가지 장점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좋은 것은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정리해야 할 때는 집안에 앉아있는 것보다는
혼자 여행을 떠나 걷는 게 좋다. 드라이브가 아니라 걷기다.
강화산성은 서울과 수도권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떠오르게 하는 생각의 길이다.



↑강화산성은 1232년 축성되어 39년간 몽골의 침략에 대항한 강화의 도성이다.
당초에 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쌓았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돌로 쌓은 내성뿐이다.

상처받은 뒤 더 단단해진 사람, 성곽, 그리고 자연


강화에 유적이 많은 것은
첫째, 그곳이 고려·조선 때 툭하면 피난지 궁궐로 이용되면서
그에 필요한 시설들이 건축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중국을 강제 개방시킨 외세가 다음 목적지로 조선을 겨냥했고,
그 일차 거점지로 강화를 선택, 수시로 집적대다 보니
알게 모르게 외래 문물이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외부로부터 들어온 문화가 그 문화를 막기 위한 전투 시설이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그래서 강화도를 여행할 때는 마음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흥선 대원군 하면 저절로 떠오르는 말이 '쇄국정책'인데,
그 정책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개방하지 않고 꽁꽁 틀어막아놓는 바람에 근대화도 늦어졌고
결국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버렸다는 등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원군이 나라를 활짝 개방했다면
조선 백성들의 살림살이는 나아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단지 비슷한 역사를 경험한 중국, 아시아, 남미의 여러 국가들의
당시 상황을 비추어 볼 때 결코 행복한 삶이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정복당하고 빼앗기고 피폐해진 경우가 더 많다.

그런 면에서 대원군의 외세에 대한 배척 태도는
많은 민초들의 삶을 보호해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강화산성을 걸으며 하게 된다.
내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오는 게 좋을 리는 없다.
게다가 그 낯선 사람이 우리 가족에게 피해라도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당연히 대문 밖을 서성이는 그 녀석들을 쫓아버려야 하는 게 옳지 않겠나.



강화산성은 대원군이 실질적 집권을 했던 조선 후기보다 훨씬 이전인 고려 시대 때 축조된 성이다.
고려는 무신정권 수립 이후 부패와 백성에 대한 억압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었다.
권력을 손에 쥔 자들은 세상이 모두 자기들 것인 양 행동했고
정치와 외교 경험이 없다보니 나라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채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며 살았다.

당시 세계는 몽고제국이 판을 치고 있었고 그들의 전쟁 수행 능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그런 그들이 고려에 '감당하기 어려운 조공'을 요구했을 때
무신 정권은 거부 의사를 밝혔고 이에 열 받은 몽골에서 사신을 보냈는데,
그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몽골이 가만 있을리 있었겠나. 당장 군대를 보내 고려를 요절내려 했다.
그러자 군부정권은 부랴부랴 화해를 요청, 당장의 전쟁은 피할 수 있었다.
몽골에게 납작 업드린 고려 정권이 그 다음에 한 짓이 왕궁을 강화로 옮기는 일이었다.
말이 천도지 그것은 탈출과 다를바 없었다.
게다가 강화는 한강 뱃길을 이용하면 내륙 어디든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었다.
세금 걷어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말이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천년 전 악몽


↑ 고려궁지

고려 정권이 강화도로 달아나자 열 받은 몽골은
진짜 전쟁을 일으켜 한반도 고려 영토를 도륙을 내버렸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몽골로 끌려가 노비로 전락하는 등
백성의 삶은 말이 아니었다.

어느 해인가는 고려 인구의 10분의 1인 20만명(추정)이 끌려가기도 했다.
이런 역사를 근거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은 단일민족이 아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물론 각 성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몽골군을 격퇴하거나 적장을 죽이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전쟁은 지역 군대와 농부에서 의병으로 신분을 바꾼
백성들에 의해 이뤄진 일들이었다.
강화도로 도망간 지배세력과 그들을 호위하는 무사들은
전쟁터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몽골의 2차 침략을 대비해서 성을 축조한 곳이
북방이 아닌 자신들이 숨어있던 강화도 초입이었다.

강화산성은 그런, 백성을 위한 성이 아닌,
오직 권력자와 귀족 세력들만을 위한 방어벽이었던 것이다.
백성은 전쟁터에서 죽어가는데 도망간 권력자들은 성 안에서
여전히 풍악을 울리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고려가 1392년에 망한 것도 너무 늦었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이다.


↑용흥궁

전쟁이 길어지자 군부 정권은 어쩔 수 없이 원래 도시인 개경으로 환도한다.
항복한 것이다. 몽골은 환도한 그들에게 강화산성과 강화도에 있는
모든 궁궐을 파괴할 것을 요구했고, 군부는 즉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1232년부터 1250년 무렵에 건설되었던 강화산성은 1270년 철거된다.
축조 때 동원된 백성들이 철거 때 또 다시 끌려가
노동을 착취를 당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조선이 개국 직후 강화산성의 복구를 시도한 이유가 무엇인지 미루어 짐작은 간다.
결국 조선 또한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경복궁과 백성을 버리고 강화도로 달아나지 않았던가.
인조가 숨어 있다 결국 제 발로 삼전도까지 가
머리를 박아가며 항복을 선언했던 병자호란의 피난궁궐이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이 된 이유도 청나라 군대가 이미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첩보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파괴된 강화산성은 1677년 강화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주도,
고려 시대 내성 규모의 돌성으로 완공했다.
강화산성은 그 뒤에 지속적인 보수 과정을 거쳐
1711년에는 강화유수 민진원에 의해 첨화루가,
1783년 성 개축과 함께 북문 진송루가 복원되었다.
현대에 들어와 1973년에는 남문인 안파루가, 동문인 망한루는 2004년에 복원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강화산성과 네 곳의 문, 비밀 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가 남아 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되뇌이며 이 길을 걷노라면 개방적으로 산다는 것이,
진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적어도 나와 내 가족의 삶에는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가족으로서 서로를 더욱 아끼고 챙겨야 한다는 결의도 다지게 된다.
물론 아무 생각없이 빈티지 감성 듬뿍 담긴 강화의 풍경에 흠뻑 취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것은 없다.

산성길을 걸으며 만날 수 있는 유물로는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즉위하기 전
열 네 살의 나이로 강화도에 유배되어 거처했었던 '용흥궁'이 있다.
죄인에서 왕이 된 철종은 즉위 4년(1853)에 초가집이던 자신의 과거 거처를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 붙였다.
천주교 강화성당도 산성 길에서 만날 수 있는 강화도의 유물이다.


↑(왼쪽)강화석수문, (오른쪽)고려궁지

1960년에 건축된 이곳은 종탑과 본당이 분리된 독특한 형태를 지닌 성당이다.
입구 상부의 장식적 개구부가 인상적이다. 그 뒤에 '고려궁지'가 있다.
1232년 고려가 도읍을 송도에서 강화로 옮길 때 터를 잡은 곳으로
1270년 환도할 때까지 39년간 사용했다.
고려궁은 1866년 병인양요 때는 프랑스군의 침략으로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건물만이 남아 있다.

산성 서문 건너에 있는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 조약이 최종 조인된 역사적 장소다.
이곳에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후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했다.
석수문은 강화읍을 통해 흐르는 동락천을 가로지르는 수문으로
조선 숙종 37년(1711)에 축조되었다.
3개의 월단 수문으로 되어 있는데,
각 수문은 화강암을 다듬은 선단석을 4∼5단으로 쌓아 교각으로 삼고,
그 위에 매끄럽게 다듬은 월단석을 반원형으로 잇대어 아치를 이루도록했다.

강화로 가기 위해선 올림픽대로나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타고 가다
개화IC로 빠져 48번 국도로 갈아타고 김포-강화로 진입하거나
개화IC로 빠져 한강제방도로로 나가 78번 도로를 이용해도 된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경우 신촌과 영등포에 강화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있으며
그곳에서 군내 버스를 이용하면 강화 구 석구석을 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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