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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4 00:00

군산의 낭만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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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한 주말이면 근교로 지방으로 훌쩍 떠나길 좋아하는 친구가 


요새 군산이 뜨고 있다고 했다. 


여행보다는 외출처럼 느껴질 정도로 서울에서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궁둥이가 뻐근해질 만큼 멀지도 않고,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옛날 건물이 곳곳에 남아 있어 이색적인 볼거리가 있는 데다 


항구도시라 바다 구경하며 싱싱한 회 한 접시도 먹을 수 있다니 


언뜻 들어도 이것저것 여행 다녀오기 괜찮은 동네인 것만은 확실했다. 


인터넷으로 좀 더 검색해보니 다녀온 사람들이 제법 있다. 


주말이면 두세 시간은 기다려야 겨우 사먹을 수 있다는 이성당의 단팥빵과 


군산 시내 몇몇 유명 중국집의 짬뽕은 맛있는 건 구만리에 떨어져 있어도 


귀신처럼 냄새를 맡는 식탐 본능을 단번에 자극했다. 


결국 목요일 이른 아침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반 만에 달려 내려왔다. 


휴게소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간식 통감자구이를 흡입한 이후라


 ‘먹방’은 잠시 미루고 일단 군산의 분위기나 살펴볼 겸 


시내에 있는 국내 유일한 일본식 사찰이라는 동국사에 갔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일본인 포목상의 저택이었던 히로쓰 가옥도 들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여기 그렇게 만만한 동네가 아니구나.




군산은 흰색을 1, 검은색을 10으로 두고 


색의 명도로 표현하자면 거의 8~9쯤 되는 곳이다. 


볼품없이 삭막하다는 게 아니다. 


군산은 밝고 명랑한 도시가 아니다. 


인터넷이며 SNS에서 볼 수 있는 사진 속 이색적인 일본식 건축물을 


실제로 눈앞에서 마주했을 때 내뱉게 되는 숨은, 탄성보다는 탄식에 가깝다.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나는 좋은 건 다 거둬들여 가던 식민지 시절, 


호남 지방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 나르는 군산항의 배들은 매일이 만선이었다. 


비옥한 호남평야가 길러낸 윤기 흐르는 쌀이 삼투압처럼 빠져나가던 시절 


세워진 온갖 종류의 건물들이, 이제는 구 시가지가 되어 


어쩐지 쇠락한 기운이 도는 군산항 근처에서 관광객을 맞이한다. 


어느 시점엔가 울컥하는 기분에 사로잡히는 걸 피할 수 없었다. 


군산이 배경인 작가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서 비롯해 


‘탁류길’이라 이름 붙은 한적한 구도심은 


여행객에게 쓰린 과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탁류>. 근대 문학사를 공부하던 학창 시절 수험서에서 접한 이후 


정말 오랜만에 기억 속에서 꺼낸 소설이다


(지금 생각하니 열여섯 살 여고생이 읽기에는 강간, 살인, 간통 등


 소위 ‘멘붕’을 불러올 만한 막장 요소가 다분한 소설이었다).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금강)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째 얼러 좌르르 쏟아져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앉는다. 


이것이 군산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거기서 그려진 미칠 듯이 혼란한 그 시절의 군산을 


모른 체하고 그저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겠다고 


속도 없이 룰루랄라 한 것 같아 죄스러운 기분도 잠깐 든다. 





그렇게 도착하자마자 보기 좋게 한 방 맞은 기분이었지만 


군산은 확실히 끌리는 구석이 있는 곳이다. 


빨주노초 알록달록한 집 앞에 늘어선 주인이 애지중지 키우는 듯한 새싹 화분이나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생업에 매진 중인 세탁소 어르신의 뒷모습, 


가느다란 철길을 사뿐사뿐 걸어가는 길고양이가 눈에 띌 때는 


그 소박한 매력에 어쩐지 히죽 미소가 지어진다. 




처음엔 휑해 보였던 군산내항도 이튿날 아침 해가 막 수평선 위로 오를 즈음 들르니 


빽빽이 정박한 크고 작은 어선들이 역광을 받아 그려내는 경관이 퍽 낭만적이다. 


그리고 우리는 군산여객터미널에서 배로 한 시간 거리에 떨어진 선유도로 향했다. 


장자도, 무녀도와 맞닿아 고군산군도를 이루는 이 작은 섬은 


육지에서 벌어지는 번잡한 일들은 전혀 모른다는 듯 


한없이 말간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한다. 




해운대처럼 완만한 곡선 형태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파도가 거의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고, 


봉긋 솟은 산봉우리가 배경으로 자리하니 


신선이 놀다 간 자리처럼도 느껴진다. 




군산은 혼자 가기 괜찮은 여행지다. 


잽싸게 스윽 둘러보기보단 조금 가까이 들여다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야 


비로소 그 멋이 마음속에 잔잔히 스며든다. 


뭐 하나 볼 때마다 재잘재잘 몇 마디라도 붙여야 하고, 


해 지기 전 한 곳이라도 더 가보자며 길을 재촉하는 


성미 급한 친구와 동행하는 건 말리고 싶다. 




군산에서 마주친 젊은이들은 혼자 온 여행객에게는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옛 모습 가득한 도시에서 이들이 공동체에 주는 활력은 남다르다. 


대도시 생활에 지쳐 내려온 서울 총각이든, 


마침내 손수 일군 나만의 가게를 열게 된 군산 토박이든 


이들 청년들은 수십 년 같은 곳에서 뿌리내리고 삶의 터전을 지켜온 


윗사람들과 어우러져 새로운 군산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한때는 비통한 역사 그 자체였을 구조물과 


건물들은 세월에 풍화되어 낡고 닳은 한편 음식점으로, 카페로,


 게스트하우스로 여전히 군산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그게 애석하고 짠한 마음이 들면서도, 문득


 ‘그럴지언정 인생은 계속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묘하게 안도감과 위안을 느끼는 건 


이곳의 풍경을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받아들인 걸까? 


확실한 건, 나는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떠날 때 군산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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