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이 원래는 강북이었다고?…그 큰 땅을 어떻게 강남으로 옮겼나?...

by 이기승 posted Nov 2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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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 한강의 변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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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한강대교(제1한강교) 북단 모습. 한강대교 너머로 한강철교가 보인다.

갈수기여서 인지 강바닥이 다 드러나 있다. 1979년 2월 2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서울 잠실동 롯데월드 뒷편의 석촌호수는 수도 서울의 유일한 호수공원이다.

이 석촌호수가 애초 한강의 본류였고 그 물줄기를 끊어

호수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서울시민이 얼마나 될까.

과거 홍수 영향으로 한강은 지형이 수시로 바뀌었고 그중에서도 잠실은 특히 변동이 심했다.

사실 잠실은 조선 전기만 해도 왕실목장이 있던 살곶이벌(성동구 자양동 뚝섬)에 있었다.

강남권이 아니라 강북에 속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 15년(1520) 대홍수로 뚝섬을 가로질러 샛강이 생기면서 잠실 일대는 섬으로 분리됐다.

원래 한강 본류는 잠실섬 남쪽을 지나던 ‘송파강’(松坡江)이었다.

대홍수로 만들어진 북쪽의 샛강은 새로운 강이라고 해서 ‘신천’(新川)이라 불렸다.

 

잠실, 홍수로 뚝섬서 분리…70년대 한강개발때 육지화

잠실은 상류의 많은 흙이 쓸려 내려와 땅이 비옥했다.

거름 없이도 뽕나무가 잘 자라 잠실(蠶室)로 지칭됐던 것이다.

잠실섬 서쪽에는 ‘부리도’(浮里島)라는 섬이 별도로 존재했고 뽕나무는 이 부리도가 제일 많았다.

부리도는 홍수때 잠실벌이 대부분 물에 잠기고 부리도 쪽만 드러나

‘물 위에 떠 있는 섬마을 같다’는 의미로 붙여진 지명이다.

1971년 ‘한강개발 3개년계획’의 일환으로 부리도·잠실섬을 삼전·석촌·송파와 연결해 육지화하고

일대 1124만㎡(약 340만평)에 잠실아파트 단지와 잠실종합운동장을 짓는 사업이 추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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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잠실 일대 지도. 오른쪽 섬이 잠실이다. 아래쪽이 한강(송파강)이고 위쪽은 신천이다.

1971년 1차 한강개발때 송파강은 매립해 육지화하는 대신 신천 쪽의 강폭을 넓혔다.

왼쪽에는 저자도도 보인다. 마찬가지로 1차 한강개발때

이곳 모래를 파내 압구정을 메우면서 사라졌다. - 지도 국토정보플랫폼.

 

그러면서 남쪽 송파강은 매립해 석촌호수를 조성하고 북쪽의 신천은 너비를 넓혀 현재의 한강이 됐다.

한강의 샛강이 원래의 강줄기를 대체한 것이다.

뽕나무 재배와 누에치기가 생업이던 원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부리도 출신자들은 옛마을 이름을 전승하기 위해 1993년 9월 30일 마을터(아시아공원)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 10월초 기념비 앞에서 상신제(桑神祭) 고사를 지내고 있다.

 

조선시대 한강에 한해 배 1만척 몰려

한강은 서울을 대표하는 명소이다. 시민들은 한강이 서울에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서울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주저없이 한강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심 하천의 하나로 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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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개발 전의 한강모습. 오늘날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든 한강의 전경이다.

1967년 3월 25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그런데 우리는 한강의 옛모습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조선의 한강은 전국의 모든 물화가 집하됐다가 다시 전국으로 분산되는 해운의 중심지였다.

19세기초 전국에서 곡식이나 생선을 싣고 한강에 모여드는 상선의 수는 한해 1만 척 이상이었다.

강에는 포구들이 빽빽했다. 한강진(한남동)은 경기 광주로 가는 길목의 나루터로

한양의 물화가 삼남(충청, 전라, 경상)으로 나가는 중요한 통로였다.

 

노량진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배다리가 놓였던 곳이다.

노량진의 드넓은 백사장에서는 1만명 이상의 대규모 부대가 모여 군사훈련과 사열을 했다.

용산은 경상도,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지방의 세곡선이 모이는 물류 중심지였다.

한강 포구에서 고개를 넘지 않고 도성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였다.

용산에는 세곡을 보관하는 창고가 여러 곳 있었으며

배로 운송된 하역물품을 창고까지 운송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포는 서해의 어물이 많이 몰려와 생선, 건어물, 젓갈, 소금 등의 해산물이 집하됐다.

밀물 때가 되면 서해에서 한강을 따라 올라온 바닷물이 마포 부근까지 들어차면서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가 다른 포구보다 유리했다.

서강은 용산과 더불어 조세 수송선의 집결지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의 세곡선이 모였다.

서강포구에는 공세청(세금징수 관청), 점검청(공미검사 관청), 광흥창(관료녹봉 보관창고) 등이 있었다.

 

밤섬에는 대형선박 건조하는 조선소 존재

밤섬은 조선시대 대형선박을 건조하는 조선소가 있어

부유한 조선업자들이 거주했고 약초나 채소 등 상업적 농업이 번성했다.

밤섬은 1960년대까지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뚝섬은 한강 상류에서 내려오는 목재의 집산지로 한양 최대 목재시장이었다.

500여호에 달하는 뚝섬 주민 대다수는 목재와 땔나무 상인이었으며

짐꾼, 마부, 국수장수, 주막주인 등이 이들을 상대로 먹고 살았다.

이들은 연대의식이 강해 집단행동을 하기도 했다.

1851년(철종 2) 뚝섬 거주민 수백 명과 포교가 충돌한 사례가 있다.

 

송파진의 장시였던 송파장은 18세기 후반 시전상업 체제를 위협하는 유통거점으로 부상했다.

송파장은 광주부 소속으로, 한성부의

금난전권(상업독점권)이 미치지 않아 일반 상인들도 자유롭게 영업했다.

삼밭나루인 삼전도(송파구 삼전동)에서는 게가 많이 잡혀 해마다 5000마리를 진상했다.

 

얼음창고인 빙고도 한강에 위치했다.

조선시대 관청에 소속된 빙고는 서빙고, 동빙고, 궁궐 안의 내빙고 두 곳 등 총 4곳이었다.

동빙고는 두모포(동호대교 북단의 포구), 서빙고는 용산구 둔지산 자락에 설치됐다.

서빙고는 왕실과 문무백관 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 의금부·전옥서 죄수들에게까지

나눠줄 얼음을 보관해 동빙고에 비해 규모가 12배나 컸다.

한강에는 명승도 허다했다. 강을 따라 권세가들의 별장이 줄지어 들어섰다.

조선후기 문신 엄경수(1672~1718)의 <연강정사기>는

한강의 누각과 정자를 종합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그는 1716년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오르며

강안에 자리한 누정을 순서대로 설명하면서 감상을 적었다.

여기에 등장하는 누정은 총 29개다. 그중 하나가 한명회의 별장 압구정이다.

 

굽이굽이 권세가 별장 즐비···18세기 총 29개 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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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 필 경교명승첩 中 송파진. 그림 속 강은 원래의 한강 줄기인 송파강이다.

한강에는 명승이 많아 권세가들의 별장이 줄지어 세워졌다. - 그림 간송미술관.

 

압구정 맞은 편에는 저자도(楮子島)가 있었다. 압구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풍광은 무척 빼어났다.

압구정과 저자도 일대 한강은 특별히 동호(東湖)로 호칭했다.

조선중기 문신 심수경(1516 ~ 1599)은 <견한잡록>에서

“동호의 승경은 모두가 알고 있는데(東湖勝槪衆人知),

저자도 앞은 더욱 절경이라네(楮島前頭更絶奇)···”라고 읊기도 했다.

 

반면, 예전의 한강은 지금보다 수심이 낮았고 모래톱이 강변에 어지럽게 형성돼 있어 불편도 컸다.

한강으로 무수한 배가 드나들었지만 서해 밀물이 들어와야 원할한 교통이 가능했다.

강바닥이 높아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기 일쑤였다.

조선 22대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는 준설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한강이 예전에 비해 점차 얕아지고 있다.

조운선이 여울을 만나면 반드시 밀물을 기다렸다가 올라가니 만약 한번 쳐낸다면

어찌 백세토록 이익이 되지 않겠는가.”<일성록(규장각 학자들이 정조의 언행을 수록한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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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잠실지구 공사 장면. 잠실대교, 잠실철교, 천호대교가 차례로 보인다.

잠실대교 하단에는 잠실 수중보가 건설되고 있다. 1986년 1월 24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강은 현대에 와서 서울의 빠른 발전 속도와 함께 상전벽해의 변화를 겪었다.

사계절 풍부한 수량, 강변의 제방과 그위로 뻗은 강변도로 등

우리가 아는 한강의 모습은 산업화시대의 산물이다.

1968~1971년 ‘한강개발 3개년계획’, 1982~1986년 ‘한강종합개발계획’ 등

두 차례의 대규모 정비사업으로 지금의 한강이 탄생했던 것이다.

 

개발 과정서 잠실섬·저자도 등 한강섬 사라져

한강 정비과정에서 잠실섬처럼 한강의 주요 섬들도 없어졌다.

저자도는 중랑천에서 흘러나온 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모래섬이었다.

닥나무(楮)가 많이 자라는 섬이라는 의미로 ‘닥섬’으로 호칭되기도 했다.

1922년 발간 경성지도에는 저자도의 면적이 36만㎡(약 10만평)이라고 나와있다.

흰모래와 대숲의 경치가 뛰어나 별장터로 인기가 높았으며

태종과 세종이 이곳을 찾았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1970년대 1차 한강정비 때 압구정 땅을 메우면서

저자도 모래를 갖다 썼고 섬은 수면 아래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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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여의도 일대 지도. 여의도와 밤섬(북쪽)은 하나의 섬이었다.

1968년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제방을 쌓기 위해 폭파·해체했다.

왼쪽에 난지도가 보인다. - 지도 국토정보플랫폼.

 

여의도와 밤섬도 완전히 달라졌다.

밤섬과 여의도는 하나의 섬이었고 강물은 밤섬과 마포 사이로 흘렀다.

1차 한강개발 때 여의도를 개발하면서 한강의 흐름을 원할히 하고

여의도제방을 쌓는데 필요한 잡석을 채취할 목적으로 1968년 폭파·해체했다.

이후 폭파된 곳에 자연적인 퇴적작용으로 토사가 쌓이고 그 위에 나무가 자라면서 숲이 생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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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 전의 밤섬. 1968년 2월 10일 촬영. -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난지도는 땅콩, 야채를 심었다. 1960년대 이후 서울인구의 폭증과 함께

늘어나는 쓰레기 처리를 위해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됐다.

난지도는 1978년부터 1993년까지 15년간 서울시에서 발생하는 모든 종류의 쓰레기를 매립했다.

 

환경단체 원상복구 주장···그러나 한강매력 산업화시대 정비결과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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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잠수교 준공. 서초구 반포동과 용산구 서빙고동을 잇는 잠수교가 1976년 7월 13일 준공됐다.

인근 고속버스터미널의 교통분산 이유와 함께, 교량 높이를 낮춤으로써

유사시 기갑부대가 신속히 도강할 수 있게 하는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됐다.

이어 8월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잠수교는 개통 한달여 만에 침수됐다.

1982년 잠수교 상부에 반포대교가 시공된다.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한강의 넓은 강폭에는 공공연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한강 물밑에는 댐이 두개 있다. 실수중보와 신곡수중보이다.

잠실수중보(873m)는 수위조절, 홍수예방 등을 위해 1986년 잠실대교 아래에 설치됐다.

신곡수중보(1007m)는 한강수위 유지와 바닷물 유입 방지 등을 위해 1988년 김포대교 아래에 건설했다.

환경단체는 수질개선과 자연성 회복을 위해 신곡수중보 개방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한강이 가진 매력은 아이러니하게도 산업화시대의 정비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과거의 완전한 회복으로 인한 부작용을 알지 못한다.

                                                           [배한철의 서울지리지]

Who's 이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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