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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어디에나 있는 것이 남산이다"


우연히 성곽길을 지나다 마주친 사람이 흘리고 간 말에 절로 수긍이 간다.


남산은 남(南)산이기도 하지만 '앞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방위에서는 남쪽이 앞이고 기준이다.


때문에 남산은 산림청에 등록된 산 이름이 31개에 이를 만큼 흔한 산이다.


↑ 0001(데이트코스, 가족의 나들이 장소. 기억 속에 있는 남산은 '산'이라기보다 '유원지'에 가깝다. 남산타워와 조선시대 국사당터였던 팔각정이 남산 꼭대기에서 마주보고 서있다.)



한양 사람들이 아꼈던 산

그래도 남산은 각별하다.


백두대간에서 서남쪽으로 갈라진 산줄기가


북한산과 도봉산으로 이어지다 남쪽 지맥이 내려와 북악산을 들어올린다.


한양을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주산이다.


이에 인왕산이 백호같은 등허리를 웅크려 서쪽에 앉아있고, 낙산이 몸을 낮춰 동쪽으로 흐른다.


한양의 안산(案山), 즉 풍수에서 집터나 도읍 맞은편에 있어 주산을 우러른다고 여겨졌던 산은 남산이었다.


이를 우리 선조들은 내사산(內四山)이라고 불렀다.


도성 안에 살던 사람들에게 남산은 가장 친근한 산이었으며,


그들은 '수여남산(壽餘南山)', 즉 '남한같이 장수한다'는 글귀를 사랑했다.




남산에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조선 성종때 편찬된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남산을 '상서로운 일을 끌어들이는 산'이라 하여 인경산(引慶山)이라 불렀다고 기록한다.


상서로운 일이란 개성에서 한양으로 조선의 도읍이 옮겨졌던 것을 의미한다.
잠두봉(蠶頭峰, 또는 잠두산)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남산의 산세가 누에의 머리 형상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남산의 정기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 한강 너머의 사평리 일대에 뽕나무를 심었다.


사평리는 현재의 잠실과 잠원동으로, 동네 이름에 누에 잠(蠶)을 붙인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목멱산(木覓山)이라는 이름도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만도의 <향산집> 중, 기청제(비가 그치도록 기원하는 제사) 목멱산 부분을 보면


남산이 조선의 지리 인식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자손으로 되레 다시 안산 삼으매/ 태를 거처하는 곳이 빛이 나누나/


 매 밤마다 봉수대의 졸개들 졸매/ 팔역백성 편안하게 농사를 짓네"
이렇듯 옛 이름들 중 대다수는 조선왕조와 떼려야 뗄 수 없지만, 민중들이 부르던 이름도 있었다.


한강의 나루터에 닿던 뱃사람들은 남산을 '마뫼'라고 불렀다.


남풍을 뜻하는 '마파람'에서 유래한 남산의 순우리말이다.


사람들은 달밤에 이곳에 올라 등불놀이를 하거나 단풍을 즐겼다.


↑ 0002(서울의 남쪽에서 북서방향으로 큰 봉우리 서봉과 작은 봉우리 동봉이 솟아오른 남산. 서봉의 남산타워 아래쪽에 송신탑이 보이고,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와 영동대교가 보인다. 뱃사람들은 남산을 '마뫼'라고 불렀다.)



조선 후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좋아했던 산도 남산이다.


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 살며 남산을 바라보았던 겸재 정선은


느지막이 양천(현재 가양동)현령으로 부임하며 남산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놀라워한다.


그가 가까이 두고 보았던 북악산, 인왕산과 달리 남산은


온화한 육산일뿐더러, 정상에 이어진 작은 봉우리(동봉)가 보는 각도에 따라 보이다 말다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양천 현령으로 오기 전까지 겸재 정선의 눈에 비친 남산은 큰 봉우리 하나(서봉)뿐이었을 것이다.


<압구정>, <유연견남산도(悠然見南山圖)>, 그리고 <목멱조돈(木覓朝暾)> 등에서는


 두 개의 봉우리가 나긋한 버선발처럼 내려앉는 남산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한양이 경성이 되고 경성이 서울로 바뀌는 동안 남산은 원래의 모습을 잃어갔다.


사내산에 둘러싸인 분지였던 서울의 권역이 확대되는 바람에


'남산'은 서울의 '중앙산'이 되었고 그나마 있는 산기슭이 남아나지 않았다.


오늘날의 소월길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가파르게 치닫는다.
산은 처음부터 경사가 급하지 않다.


산 아래는 사람의 몸으로 따지면 완만한 발등과 같다.


지금의 남산은 사람으로 따지면 '발등이 없어 서있기 어려운 사람'의 형상이다.


남산의 변화는 서울의 인구 증가, 그에 따른 개발과 비례하게 일어났다.


남산은 시 외곽의 그린벨트를 제외하면 변변한 녹지가 없는 서울 땅의 오염을 모두 감당해야하는 처지가 된 참이다.


애초에 서울의 면적은 내사산, 즉 분지 바깥으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성에 힘입어, 서울의 생태축을 복원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2000년에 북악산~종묘~남산을 이어 남북생태축을 조성하고자 서울시 도심부관리기본계획이 수립되었다.


 '남산 르네상스', '남산 그린웨이' 등의 계획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무작정 발등에 얹힌 것을 없애고 나무를 심기에, 남산은 사연이 많은 산이다.


몸살 앓는 남산 위의 저 소나무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는 애국가 가사 때문인지 남산하면 떠오르는 나무는 소나무다.


그러나 남산 위의 진짜 터줏대감은 신갈나무다.


구색을 맞추기 위해 전국 팔도의 나무를 가져다 심어보았으나


소나무는 남산의 온순한 비탈과 보드라운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남산에 소나무가 무성했던 이유는 조선시대에 '봉산(封山)'으로 관리 받았기 때문이다.


소나무를 집중적으로 심으면서 다른 나무가 자라면 계속 솎아냈다.


활엽수인 신갈나무와 침엽수인 소나무가 맞붙으면 소나무는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남산은 도심에 위치해있어 인간의 간섭을 많이 받았다.


나름대로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신갈나무의 평균 수령이 50여년 될 정도로 숲이 젊다.


여기에 억지로 소나무를 심으려다 보면 오히려 생태계가 교란될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렇잖아도 소나무 조림을 위해 갈아엎은 땅에 외래식물이 침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신갈나무 숲이 파괴된 틈으로 팔배나무, 때죽나무 같은 외래종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남산 위의 소나무' 조림에 회의적인 생태학자들이 적지 않다.


 "소나무는 고지대의 척박한 절벽에서 잘 자라는 나무여서 남산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나무가 아닙니다.


 생태학적으로 생각하면 '남산위의 저 소나무'는 '남쪽 사면의 저 소나무'가 맞겠지요.


 나무는 볕이 잘 드는 남쪽 사면에서 잘 자라니까요."


↑ 0003('남산 위의 저 소나무'는 조선시대 봉산으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아 잘 가꾸어질 수 있었다. 그밖에 일인들이 심어놓은 벚나무가 남산으로 가는 산책길을 따라 자라있다.)



한국생태학회장 이창석 교수는 국가장기생태연구를 진행하면서 남산의 생태와 역할을 오랫동안 주목해왔다.


남산이 도시화와 바람직하지 않은 산림 정책 탓에 망가져가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산의 역할을 들여다보기에 적합한 측면도 있다.


남산은 2004년부터 3단계로 진행되었던 국가장기생태연구지 8개소 가운데 하나로, 서울 지역을 담당한다.
이 연구는 오염된 공기가 그린벨트까지 흐르다 대류하여 도심의 대기 상층부에 고이는 기온역전층 현상과,


도심 중앙부에 수직으로 고이는 '열섬현상'의 심각성을 밝혔다.
"남산은 참 불쌍한 산입니다. 남산지소의 연구 결과,


 남산이 도심의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공기를 정화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구가 집중되어있고 건물이 많은 것이 이유이지요.


 녹지가 조성되고 복개하천이 생기지 않는 한 기온역전층 현상과 열섬현상은 해소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은 고군분투하며 할 일을 다 하려고 노력하는 산이겠지요."

사실 소나무보다 더 눈에 띄는 나무는 벚나무다.


남산도서관쪽의 소월길, 국립극장쪽의 북측 순환로, 그리고 남산타워로 올라가는 도보길 등은,


 남산자락에서 꽃비가 내리는 대표적인 코스다.


이 벚나무들은 180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들이 심기 시작한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왜병들이 남산에 주둔했음을 기념해, 일본인들은 현재 숭의여자대학교 자리에


 서울 최초의 공원인 왜성대공원을 만들어 벚나무 600그루를 심었다.


고종이 항일 조선인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장충단도 어린이 공원으로 바꾸어놓고 벚나무를 심었다.

남산타워와 송출탑은 옛 모습 기억할까
전망대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


요란한 영상이 엘리베이터 천정을 밝혀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태양계와 멀리 떨어져있던 일인칭 시점의 앵글이 가파른 속도로 행성 사이를 비행한다.


유일하게 빛나는 지구로, 유라시아 대륙 끄트머리에 점처럼 자리하고 있는 반도로 낙하한다.


낙하 속도만큼의 추진력으로 남산타워가 솟구쳐 오르며 25초의 영상은 끝난다.


남산 정상에서 자물쇠를 잠그며 사랑을 맹세하던 로맨스의 끝은,


 비운의 역사를 가졌던 어느 변방국가의 인정욕구인지도 모르겠다.


↑ 0004(남산타워는 최근 '요우커'라 부르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갓 스무살이 된 두 중국인 학생은, 쇼핑 관광을 목적으로 한국에 왔다가 남산에 들렀다.)



한 시대의 쇠락과 등장을 알리는 것이 남산타워와 같은 대형 건축물, 소위 '랜드마크'다.


지나치게 거대하고 인위적인 건물은 사람을 위축시킨다.


남산에 높은 철탑을 세운다는 계획은 신기함과 동시에 어떤 불쾌감을 가져오기도 했던 것 같다.


1967년 8월 8일, 동아일보에는 '균형감각'이라는 사설이 실린다.

'비키니스타일이라는 것도 어느 모로 보면 노출증과 수치심의 균형이 깨뜨려진 것…


서울특별시는 지금 비키니스타일의 건설에 여념이 없다.


그 중 압권은 남산에다 세운다는 세계일(世界一)의 뉴서울타워라는 것이 될 것 같다.


세계일을 마다할 국민은 없지만 우리 국민소득은


 세계에서 몇 번째가 되고 서울특별시의 하수도 시설은 몇 번째쯤 될까.'

시대는 변한다. 에펠탑도 당대에는 예술가들의 욕을 들어가며 세웠던 건축물 아니었겠는가.


소설가 모파상의 동상이 '꼴 보기 싫은' 에펠탑을 등지고 서있건 말건, 에펠탑은 유명무실한 프랑스의 랜드마크다.


한국의 에펠탑, 도쿄타워라는 수식어를 달며 등장한 남산타워 또한 마찬가지다.


서울 시내 주요관광지에서 접근하기 편리한 덕분에, 최근들어 남산타워는 막강한 구매력을 가진 요우커들로 북적인다.


↑ 0005(남산은 높이가 낮은 산이지만, 3호터널 부근에 있는 남산 케이블카 승강장은 평일에도 매번 줄이 늘어선다.)


↑ 0015(남산타워의 전망대는 2000년대에 들어서야 일반에 개방되었다. 360도로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곳으로, 가족이나 연인,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아이가 명동, 충무로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남산타워의 정식 명칭은 'N서울타워'이지만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남산타워는 군소리를 들어가며 1969년 기공을 시작해


 아날로그TV와 FM라디오를 송신하고 1975년에는 전망대까지 완성했다.


일반에게 개방된 것은 1980년이었는데, 보안문제로 전망대는 개방하지 않았다.


그러다 찾는 사람 없이 파리만 날리자 1999년 YTN에 매각되었다.


 6년 뒤 'N서울타워'로 이름을 바꾸고 단장을 해, 재개장을 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휘황찬란한 조명에 발밑이 어두워 놓치고 들어가기 쉽지만,


 그 옆에 있는 팔각정 자리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진 국사당(國師堂) 터, 그 옆이 봉수대이다.


앞서 말했듯 조선이 한양에 도읍을 정하면서 목멱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남산에 목멱대왕이 기거한다고 여겼으므로 이곳에 세워진 신당도 목멱신사라고 불렸다.


도읍지를 정해주는 등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무학대사가 입적한 후에 무학대사를 모셔 국사당이라고 불렀다.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제사를 이곳에서 지냈다.


봉수대는 그나마 흔적을 찾을 수 있었던 1개소를 복원해 놓은 것이다.


남산의 다른 이름이 '종남산(終南山)',


 함경도와 평안도, 전라도, 충청도와 경상도의 국경지대나 해안에서 피어올리는 연기나 횃불은


 산봉우리 위를 점점이 번져나가 남산에 모였다.

그 옆의 동봉에 있는 철탑은 AFN(American Forces Network) 송출탑이다.


1967년 개국한 주한미군방송(AFKN, 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으로,


 미군기지근처의 지역에서는 민간인들도 이 방송을 접할 수 있었다.


386세대, 혹은 X세대로 통칭되던 60~70년대생들에게 주한미군방송은 서양의 문화적 세례를 받을 수 있는 통로였다.


'외국의 저질문화에 물든다'는 어른들의 꾸중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은 밤늦도록 팝송을 들었다.


2012년 들어 민간인 송출은 중단되고 라디오로 팝송을 듣던 청소년들은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동봉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어있다.


↑ 0006(전국의 봉화는 남산에 이르러 멈추었다. 봉화의 종점, 그래서 남산의 다른이름은 '종남산'이다.)



딸깍발이 선비 살던 남촌, '경성의 긴자' 되다
남산 꼭대기에서 북쪽으로 뻗어나가는 지맥은 충무로를 따라 이어지다가 청계천에 이르러 멈춘다.


청계천 이남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는 조선시대 남촌으로 분류되었다.


북촌에는 궁궐과 중요한 관청, 당대 권력을 쥐락펴락하는 세도가들이 살았던 곳인데 반해


 남촌에는 일반관청과 군영, 그리고 권력에서 벗어나 청렴하게 살던 관원과 선비들이 주로 살았다.


이곳에서 선비정신의 대명사인 '남산골 샌님', '남산골 딸깍발이'라는 말이 생긴 이유다.

딸깍발이는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는


 남촌의 가난한 생원에게 붙인 이름이었다.


충무로에 있는 전 중국대사관 뒤에서 세종호텔 뒷길로 이어지는 길에 있던 고개에는


 비가 내리면 남산의 흙이 쓸려와 땅이 진흙탕이 되곤 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로서는 나막신이 필수품이었던 셈인데,


 암만 가난해도 상민들이나 신는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을 수 없었던 선비들은 맑은 날에도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숙종대의 민담을 보면 가난한 선비들이 모여 하숙하는 주막도 많았던, 오늘날의 '고시촌'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0007(남산에서 바라본 경성. 사진제공=서울역사박물관)


↑ 0008('딸깍발이 선비'들이 살았던 남촌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의 역사로 얼룩졌다. 1990년대 '남산제모습찾기'사업으로 그 흔적은 상당부분 사라졌다. 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충무로의 남산골 한옥마을.)



고종30년인 1893년에 외국인들이 도성 안에 거주하는 것이 허락되자,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1885년 진고개 일대를 일본인 거류지로 지정했다.


1900년대 들어서는 북악산, 낙산, 인왕산, 남산 능선을 잇던 성곽 17km를 헐어내기 시작했다.


이는 일제가 한국의 문화유산을 훼손한 사례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인 변화가 원인이었다.


이미 도시가 커지고 전차가 도성 안팎을 연결해 성곽은 쓸모없어졌다.


반상 구분도 점차 무의미해져 가던 식민지 경성은, 이른바 근대적 도시의 특징을 갖게 된다.


수도방위사령부 자리이자 현재 남산골한옥마을이 있는 자리에는 헌병대 사령부가 세워졌다.




"다방도 극장도 있으며 그밖에 각종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조선인 거류지와는 대조적으로 점포와 주택이 들어선 가로가 깨끗하고 깔끔하다…


 군인들과 헌병, 그리고 칼을 찬 경찰 등이 시간을 맞추어 거류지 내의 호위병을 교대시키고 있다."
19세기말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을 펴낸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보기에도


 남촌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면서 눈에 띄게 번성하고 있었다.


한일합방 무렵 일본인의 비율은 서울인구의 14퍼센트에 달했으며, 대부분이 남촌에 거주했다.

일본인은 진고개에서만 장사할 수 있었지만 일본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명동까지 진출했다.


충무로 1~3가에 해당하는 진고개는 '혼마치'가 되었다.


우리말로 '거주지 중에서 으뜸'이는 의미의 '본정(本町)'이다.


경성의 본정은 일본의 긴자와 비견할 만큼의 중심가로 성장했다.


그런 이유로 조명래 단국대학교 교수는 남촌을 이른바


 '식민지 시기 지배층을 위한 특권적인 공간'이라고 요약한다.
본정에는 경성 제일의 건물이 들어섰다.


남대문로와 충무로 일대에 조선은행(현 한국은행), 식산은행, 경성주식현물취급시장(현 증권거래소),


 조선식산은행(현 롯데호텔), 경성우체국(현 중앙우체국), 건너편의 미쓰코시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과


 미나카이, 히라타 백화점 같은 고급 상점과 금융기관이 집중됐다.


본정에 전시되는 신식문물은 식민지 조선인들을 유혹하기에 충분했다.


남촌과 북촌의 지위가 이렇게 역전이 되었으니,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은 북촌에서 건너와 혼마치의 불빛 사이를 유랑하곤 했다.

남산 공원, 표백되거나 입혀지는 역사들
남산은 우리에게 어떤 공간인가.


남산에서는 백일장이 열리는 곳이기도 했고, 신혼여행의 드라이브코스이기도,


 지역민들의 서울관광 코스이기도 했다.


그리고 창경원 버금가는 남산식물원은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곳이었다.


오늘날의 남산은 연인들이 자물쇠를 잠그러 오는 곳일테다.


공통의 기억은 남산을 '산'이라기보다 화목하거나 설레는 기억을 담는 '공원'으로 인식하고 있다.
사회학자 앙리 르페브르의 말에 따르면,


 공간을 인식하는 것은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인식하고,


 그것이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지를 인식해 공간의 모순이 밝혀내는 것"이다.


20세기의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어지는 군사독재의 역사로 요약할 수 있다.


그때마다 남산은 의미변화를 거듭하며 도심의 공원이 되었다.


↑ 0009(남산공원에 들어서는 초입에 만나는 김유신 동상. 1960년대 들어 동상건립을 주도한 '조상건립위원회'는 무인출신이거나 민족통일에 이바지한 인물을 중심으로 위인을 선정했다.)


↑ 0010(현재 남산공원 자리에는 조선신궁이 있어 조선인들의 참배를 강요했다. 이곳에는 해방 후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는 어린이 회관과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들어섰다. 안중근 의사의 '인심결합론' 기념비 뒤로 보이는 서울시 교육과학교육원 건물이 옛 어린이 회관이다. 오른쪽 멀리 남산타워가 보인다.)



남산자락에 일본인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산 일대는 식민지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1898년 현재 리라초등학교 위치에 있었던 남산대신궁은 27년 뒤 경성신사로 개칭되었다.


오늘날 백범광장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남산공원에는 1920년 조선신궁이 건립되었다.


조선신궁보다 높게 자리 잡고 있던 국사당이 그네들의 눈에 거슬렸던 탓에,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지는 수모를 겪는다.


회유된 명망가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일년에 두차례씩 조선신궁에서 참배를 해야 했다.
해방이후, 일본인들은 자진해서 조선신궁을 철거해갔다.


그 자리에 새롭게 세워진 것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동상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새 질서를 정립하고자 하는 권력자는 장소에 새 이름을 붙이거나 무엇을 짓고 세운다.


이승만 동상은 그의 나이 81세에 맞춰 81척 높이로 세워졌다.


그 자리에 국회의사당을 건립하려는 계획도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동상은 4‧19혁명을 맞아 성난 시민들에 의해 철거됐다.


국회의사당을 지으려했던 계획도 그의 망명과 동시에 무산되었다.

비어있는 조선신궁 자리를 메운 것은 어린이회관(현 서울시 교육과학교육원)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박정희 대통령은 남산을 공원화하는 데에 힘썼다.


어린이회관은 육영수 여사의 작품으로, 이곳부터 백범광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위인들의 동상이 건립되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초입에 있는 김유신장군 동상이다.
'애국선열 조상건립위원회'는 1960년대 중반부터 우리나라 곳곳의 동상 건립을 맡아서 했다.


학교나 대로, 공원에 있는 위인들의 동상은 이때부터가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선정했던 10명의 위인은 김유신을 비롯해 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강감찬, 광개토대왕 등이다.


위인들의 면면에서 드러나듯이, 새 정권은 무인이나 민족통일에 힘썼던 위인들을 통해서


 민족중흥과 반공애국주의, 그리고 부국강병의 의지를 나타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만들어진 공원은 은연중에 '조국근대화'라는 시대적 사명을 담은 공간이 되었다.


남산 변두리에 함께 살고 있었던 도시하층민과 윤락가의 여성은,


 '아름답고 행복한' 남산 공원에 가려 보이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려났다.


현재 힐튼호텔이 있는 곳은 한때 '양동'이라 불리던 사창가가 형성되어있었던 자리였다.


↑ 0011(남산의 중정&#8231;안기부 건물은 현재 10곳이 남은 상태. 서울유스호스텔은 옛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 건물로 쓰였다.)



남산골 선비들이 살던 곳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이하 중정)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가 들어섰다.


 '남산에서 왔습니다'라는 말은 액면 그대로의 뜻이 아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61년 남산에 중정을 설치했고,


 1972년 행정을 담당하는 중정 남산 본관을 만들었다.


지금은 서울유스호스텔로 사용되어 내부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상태다.

이곳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유산은 그대로 다음정권에 계승되었다.


그 옆에 있는 서울종합방재센터는 중정, 그리고 훗날 안기부의 '지하벙커'였다.


지상 1층, 지하 3층으로 이루어져 내부에는 취조실이 늘어서 있었다.


서울시청 남산 별관은 간첩 혐의를 조사하는 대공수사국이 있었다.


납치된 민주화인사들이 남산 1호 터널을 지나 이곳으로 끌려왔다.


이곳의 악명높은 고문은 양심 있는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 학생들을 조작간첩으로 만들었다.


 민주화운동사를 연구해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이 곳의 고문에 비하면 본관에서 받던 고문은 마사지 정도"라고 이야기한다.
당시의 모습은 1990년대 '남산제모습찾기' 사업을 거치며 4분의 1가량이 사라졌다.


최고층 아파트로 남산을 가로막았던 외인아파트도 이 시기에 함께 철거되었다.


흔적을 지우기 위한 사업은 2009년 서울시의 '남산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서울시의 계획은 시민사회단체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민주주의 운동이 한국에 있었지만 그것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습니다.


 폴란드에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보존되어 있는 것과 대조적이지요.


 서대문형무소도 일부만 보존되어있는 상태이고, 남영동 대공분실은 제대로 운영되고 있지 못합니다.


 남산의 중정과 안기부 터도 이제 10곳만이 남아있습니다."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민단체 '인권중심 사람' 박래군 소장에게 남산은 국가범죄와 국가폭력의 장소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장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 된다.


2012년부터 그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들은


 "이 역사적인 장소를 민주주의와 인권을 교육하는 장소로 활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남산 안기부터를 인권‧평화의 숲으로'캠페인을 이어오고 있다.

도시화의 그늘, 남산터널과 '해방촌'
1960, 70년부터 서울의 도시화는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1965년 불과 총연장이 1440km에 불과했던 도로만 보아도 5년 만에 5292km, 즉 3.7배 길어졌다.


이렇듯 서울의 개발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은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1966년 취임해 '도시는 선이다'라는 슬로건으로 세종로, 태평로 등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를 확장했다.
남산터널은 다른 목적을 띠고 지어졌다.


김신조의 청와대 침투 사건, 영화 <실미도>로 잘 알려져 있는


 1968년 1.21사태가 당시 박정희 정부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사건을 계기로 도시계획은 '북한에 의한 남침을 대비하는' 병영국가 체제로 나아간다.



↑ 0012(유사시 서울시민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수용시설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남산 1, 2호 터널)



이에 대응해 김현옥 시장은 남산요새화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시설이 바로 남산 1, 2호 터널이었다.


'남산의 배에서 등까지 구멍을 뚫었다'는 비난을 받으며 70년부터 착공에 들어간 남산터널은,


 유사시 서울시민 30~40만명이 대피할 수 있는 지하 수용시설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남산이 몸살을 앓는 동안 한국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피란민들도 모여들었다.


용산 1, 2가에 해당하는 해방촌이다.


피란민들의 정착지가 한두 군데가 아닐 테지만 '해방촌'이 아직 남아있는 이유는,


 일본인들이 떠나고 난 뒤 이곳이 무주공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피란민들은 108계단을 올라 신사가 있던 자리에 마을을 이루었다.


이문이 밝은 사람들은 계단 아래의 적산 가옥을 차지했지만,


 부랴부랴 서울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은 계단 위에 천막을 치고 뿌리를 내렸다.



↑ 0013(해방촌 성당에 있는 성모상. 기독교는 해방과 전쟁, 가난을 겪어 사회로부터 찢어져있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했다.)



해방촌은 평안북도 출신이 많아 선천군민회, 서북청년회와 같은 우익단체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특히 평안북도 선천군에 온 사람들은 공동 막사생활을 했다.


1950년 미 공군은 현재 미군기지 안의 철도 공착장에 있던 인민군을 겨냥해 폭격을 했는데,


 해방촌의 막사도 인민군의 것으로 착각해 폭격을 한 일도 있었다.


이 일로 선천군민회라는 이름의 천막집단은 사라지게 된다.
어느 도시에서나 종교는 이촌향도로 사라진 공동체를 묶어주면서 사회의 빈틈을 메웠다.


1947년 천막으로 시작한 해방예배당, 1954년 신자의 주택에서 시작한 해방촌 성당은 그런 시대의 증거이다.

해방촌은 개발의 사정거리에서 비껴간 흔적이 아직 남아있다.


신흥시장은 제법 주민이 많아 불과 15년 전까지만 해도 번화했던 시장이었다.


점차 근거리에 쇼핑몰, 대형마트가 많이 생겨, 지금은 어둑하고 적막한 채로 옛 모습을 지키고 있다.


 "교통수단 없이도 남대문시장을 오가며 날품팔이하고 살기 좋아 정착을 하게 된 거였지요."


72년도에 해방촌으로 와 40여 년째 살고 있는 한 양장점 주인은


 "이제 신흥시장은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끝났다"고 이야기했다.


2년 전까지 금방 개발될 것처럼 마을이 술렁였는데 이제 어떻게 될지, 주민들로서는 미지수이다.


미군기지가 철수하면 공원이 된다는 말도 있고 공청회도 열린다.


그는 이 마을을 곧 떠날 것이라고 하면서도


 "자꾸 개발되어봐야 없는 사람 거지로 만들 뿐이니 주민들의 절반은 개발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한편 이태원에서 영업을 하다가 높아진 권리금과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소상공인들도 점점 해방촌으로 넘어오고 있다. 그 중간지대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고 있다.


국군재정관리단에서 남산하얏트호텔로 이르는 회나무로 일대로,


 국군재정관리단의 옛 이름이 육군중앙경리단이었기 때문에 경리단길로 불린다.


한적하지만 이태원처럼 특색 있는 음식점이 많아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고,


 더 조용한 곳을 찾는 소상공인들은 조금씩 더 먼 해방촌으로 들어오는 중이다.
가파른 지대에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마다 예술인들이 그려놓은 벽화가 아기자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종점수다방, 해방촌 빈카페, 연구공동체 수유너머 등, 이 마을에는


 대안공동체를 꾸리거나 다른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사람들이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는


 <식민지배의 흔적과 해방, 분단의 산물 해방촌>(2005)이라는 답사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해방촌에는 아직도 전후복구기의 의지를 담았던 신흥(新興)이라는 말이 곳곳에 남아있다.


새롭게 흥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신흥상회, 신흥여관등은 70년대를 살아온 이들에게 매우 익숙한 단어이다.


그러한 이름의 흔적이 신흥길로 남아있어 해방촌에 둥지를 틀었던 이들이 미구에 꿈꾸었던 흥한 사회의 여망을 증거하고 있다"


↑ 0014(해방촌의 신흥시장은 꽤 번성하던 시장이었으나 현재는 찾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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