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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호 기자가 만난 북녘땅-10] 아무리 못 살아도 자존심 강해··· 평양공항엔 “헌 옷은 안 받아” 벽보

  • 송광호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북한은 어떻게 바뀌어왔으며, 또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가? 1989년 이래 북한을 8차례나 방문해 취재한 송광호 토론토 주재 언론인이 방북 때마다 보고 느낀 점들을 시리즈로 정리했다. ‘바뀌어온 북한’에 초점을 맞춘 이 글은 현재와 같은 남북경색국면에서 긴 눈으로 북한의 새로운 변화를 조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편집자주>
 

오늘의 원산(원산 시내 아파트)

평양에서 원산 가는 길은 많은 굴들을 거쳐야 한다. 마식령산맥을 뚫고 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때는 평양-원산 간 가장 긴 굴인 무지개동굴(4.1km) 보수작업으로 통과시간이 제한돼 있었다. 낮에는 작업 일을 하고,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오전 7시까지만 차량을 통행시켰다. 한밤중에 도착한 원산은 마치 전쟁터처럼 어수선했다. 시 도로엔 가로등 하나 없고, 뿌연 불빛 아래 형체를 드러낸 우뚝 선 건물들이 스산해 보였다. 불빛 없는 어둠의 도시에 주민들은 거리에 옹기종기 떼로 모여들 있었다. 흡사 피난민 대열같이 보였다. 6.25 직후 전쟁터의 아련한 기억을 떠올렸다. 어둠 속을 뚫고 원산을 그대로 통과해 금강산으로 달렸다. 종전보다 검문소가 6개소로 늘어나 있었다. “웬 검문소가 이렇게 많이 생겼어요?” “전련(일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엄중한 시기라 그만큼 주변 경계에 신경 쓰는 듯했다.

 

금강산호텔 역시 극심한 전력난을 겪고 있었다. 수시로 전기가 들락거렸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기도 조심스러웠다. 순간적 정전으로 갇힐 우려가 있지 않겠나. 호텔 식당에는 나 외에 저만치 한 백인 여성이 홀로 앉아있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엘라라는 독일 여성(UN 근무)은 “북한 고아원 식량 파악을 위해 왔다”고 한다. 식당 여성 접대원들은 나와 엘라와의 대화를 무척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둘이 대화(영어)를 계속하자 우두머리로 보이는 접대원이 왔다. 우리 대화를 끊더니 “이 여자 언제부터 아는 사이입네까”하고 물었다.

 

“여기서 만났어요.” “선생 자리는 저기 따로 있는데 왜 여기 와서 오랫동안 얘기합네까?” “서로 혼자 앉아있으니 대화할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마침 전기가 나간 상태였다. “지금 전깃불도 없는 상태라 방에도 못 가고 잠깐 얘기를 나누는데 무엇이 그리 잘못됐나요?” 여성 접대원과 옥신각신하는 사이 불이 들어왔다. 눈치를 챈 엘라는 “무슨 일입니까?” “우리 대화를 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고 전했다. 독일 여성은 머리를 흔들더니 접대원을 힐끗 쳐다보고는 호텔 숙소로 가버렸다.

새 트롤리 버스(궤도버스)

금강산의 밤하늘은 총총한 별들로 덮여 있었다. 그 맑고 아름다운 별빛. 어린 시절 보던 아주 잊혀 있던 별들이 흐르고 있었다. 밤하늘을 반짝이며 수놓은 은하수 흐름은 새삼 가슴을 설레게 했다.

 

금강산온천은 라듐 성분이 많아 한번 온천욕을 하면 며칠간이나 피부 감촉이 매끄러웠다. 온천엔 사람 한 명 없었다. 다음 해 1998년 가을에 역사적인 한국의 금강산 첫 관광이 동해항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10년 뒤인 2008년 7월 한 여성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으로 관광이 전격 중단됐다. 이때까지 근 2백만명 가까운 남한 인구가 금강산을 다녀왔다. 답답한 점은 금강산 보기 좋은 자리마다 바위에 새겨놓은 김 부자 찬양 글이다. 이는 김일성 사후(94년 사망)에도 계속 돌 새김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어리석음이여. 산천경개 절경을 망쳐놓는 이런 환경파괴는 언제쯤이나 중단될까. 1980년 북한에 첫 태권도를 전파한 고 최홍희 태권도창시자(국제태권도연맹 총재) 역시 이러한 행위(자연훼손)를 한탄했다. 나는 그의 원고를 정리하며 그 부분을 자의적으로 빼 버렸다. 북 최고위층을 상대하며 회고록에 이를 게재함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또 최 총재는 태권도 창설 초기(이승만 정부) 여러 어려움을 겪은 탓인지 예전 일에 대해 섭섭함을 회고록에 기록해 두고 있었다. 일부 등장인물 등의 지나친 부정적 문구들도 삭제했다.

교통안전원과 차량

“총재님! 가능한 남 비난하는 글은 빼는 게 좋겠습니다. 이거 인쇄돼 나오는 책인데 한번 발간되면 절대 다시 고치지 못합니다.” “이봐요. 차라리 자네가 내 자서전을 맘대로 쓰지 그래? 회고록은 내 개인 역사야. 나는 사실 그대로 밝히자는 것뿐이야.” 총재는 원고수정 행위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내 주장대로 웬만한 비난성 글은 제외시켰다. 그래도 미흡한 부분이 남아 있어 회고록 발간 후 항의성 뒷말을 들었다. 최 총재와 원수지간처럼 된 제자도 생겨난 것으로 알고 있다.

 

얘기가 또 빗나갔지만, 최 총재 경우 세상 떠난 후 북에 분노를 느낄 만했다. 아마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실지 모른다. 그는 북에 사상 처음 태권도를 보급해 태권도창시자로서 인정받았다. 이에 북 당국은 함북 나진 선봉 지역에 태권도성지 부지를 마련해 줘 청사진(첨부) 계획을 끝낸 지 오래됐다. 진작 평양에서 헬리콥터로 최 총재와 측근 1명, 북한 고 김용순 비서와 조선태권도 위원장 등이 탑승해 현지답사를 한 적도 있다. 그런 마당에 지난2002년 최 총재가 갑작스레 말기 암으로 타계하자, 그동안의 모든 태권도성지 건설계획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기 때문이다.

태권도(북한) 성지계획(함북)

한 줄 더 덧붙인다. 최 총재는 죽기 전 부모 묘소가 있는 한국방문을 간절히 원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마지막 희망으로 방한 기대를 걸었다. 옛 대한민국 창군 멤버였던 한국 일부 노장군들과 미주 태권도 지도자들이 앞장섰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끝내 그의 한국입국을 거부했다. 이후 최 총재는 북한에서 위암 재수술을 받았고, 결국 평양에서 장웅 IOC 위원에게 총재직을 넘겨주고 타계한 것이다. 북에서는 총재 묘소를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했다. 하지만 묘비에는 평소 원했던 태권도창시자라는 문구는 없었다.

 

국제태권도연맹총재로만 기재됐다. 나중 들리는 소문은 창시자란 명칭은 북에서는 김일성 부자 이외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한다. 이해가 안 되는 말이나 어쩌랴. 그리고 10년 후. 평양 청춘거리에 태권도성지중심이라는 대규모 태권도성지관이 건립(2012년)됐다. 태권도 력(역)사관도 만들어 태권도는 예로부터 평양을 중심으로 한 민족무술로서 발전해 나갔다고 선포했다. 태권도 뿌리는 평양무도 택견으로, 위대한 김일성 주석 등 최고영도자들이 민족무도(태권도)를 고수, 발전시켜 나갔다고 주장했다.

1996년 고난의 행군 시기 큰물피해 지원증서 미화2백달러 기부금

한평생을 태권도 기술연구로 살아온 최 장군으로선 정녕 억울해할 내용 아닌가. 국내외 온갖 모략과 압력을 견뎌내고 캐나다로 망명해 사상 처음 북한에 첫 정통태권도를 보급한 무도 인이며 군 장군이다. 이 북한 관련 때문에 한때 아끼던 유명 수제자 고 이준구(워싱턴 DC) 사범을 한순간에 잃지 않았던가. 적성국 북한에 태권도를 전파했다는 이유에서다.

 

최 총재 별세 이후 그의 의도와는 달리 태권도역사가 왜곡된 모양새로 돼 버렸으니. 나는 40년 이상 최 총재와 같은 토론토에 거주했거니와, 국제연맹 태권도대회나 세미나 때 자주 동행해 태권도 관련 역사를 잘 파악하고 있다. 이승만 정부 시절 첫 대한태권도협회 초대회장으로, 1958년에는 첫 국제기구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서울 조선호텔에서 창설했다. 초창기 시범단 해외 순방 때는 태권도 이름 자체가 생소해 현지에선 중국음식점 이름으로 착각하기도 했던 시절이다. 최 총재가 불치의 말기 암 판정을 받기 한 달 전에도 나는 함께 자메이카 수도 킹스턴 태권도세미나에 있었다.

97년 북한우표(고난의 행군시기)

다시 원산, 금강산 얘기로 돌아간다. 함경도 지방이 아닌 강원도에선 주민들 기아 상태를 크게 인식하지 못했다. 한편 통천군을 지나 원산에 닿았을 때 강원도청 G책임지도원이 정주영 회장 애인 주기철씨 가족 얘기를 전했다. 고향 통천군뿐 아니라 북한 여러 곳에서 정 회장 애인(북에선 처라고 호칭) 주씨와 유복자인 딸 조명옥(39년생/지난번 43년생은 오기)씨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평양 류미영 청우당 위원장도 월북한 오익제 씨 얘기를 하면서 “오 선생도 원래 이북에 처가 있고, 정주영씨도 이북에 처가 있다”고 언급했다.

 

당시 통천의 정주영 회장 에피소드를 덧붙인다. 북강원도청 안내에 의하면 애인 주기철 씨는 정 회장과 지난 89년 첫 만남 후 두 번째 상봉을 고대하던 중 1990년 12월 통천군 토산리에서 심장병(북한 병명: 심장신경증)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딸 조명옥은 어머니 주씨가 미혼모로서 주민 조영석씨와 결혼해 조씨 성을 붙였다고 것이다. 그러나 주씨는 남편 사이 자식이 없고 남자가 일찍 죽자, 재혼하지 않고 딸과 함께 살았다고 한다. 당시 정 회장은 집안에서 소 판 돈 60원인가를 훔쳐 노름으로 다 날리고 서울로 내뺐는데, 그때 작은 숙모(삼촌 엄마라고 함)가 몰래 차비와 쓸 돈을 마련해 줬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정 회장은 금강산개발 건으로 방북하자마자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이 애인(처) 주기철과 작은 숙모(삼촌 엄마) 강순금씨였다고 밝혔다. 통천군에서만 50년 이상 살고 있다는 도청안내원은 “당시 애인 주씨는 정 회장 소식을 듣자마자 중병에 걸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벌떡 일어나 40리 길을 달려와 감격의 상봉을 했다”고 전했다. 당시 정 회장 친척들 이름과 주소, 직업 등을 상세히 알려줬다.

평양대학생들

한편 운전기사 M씨는 지난번 북한에 억류됐던 한국 우성호 선원들과 6개월 자신이 담당했었다며 그들과 사귀었던 정을 얘기하며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면서 “그들 남조선 사람은 술을 먹으면 왜 서로들 다투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북에선 자존심과 빈곤의 두 얼굴 아래 크게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중 알게 됐지만 극심한 전력난으로 북 전역에 공휴일이 달라지는 경우도 생겼다. 일요일이 기본적으로 공휴일이지만 지방(도)에 따라 노는 공휴일이 달라졌다. 예를 들어 함북은 수요일에 놀고, 함남은 목요일, (북)강원도는 금요일에 노는 식이다. 같은 시간대에 전기공급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취해진 조치라고 한다. 대부분 어렵게 살고 있으나 극히 일부는 아주 잘 살아 빈부 차이가 컸다. 평양의 이산가족 지도원 중 일부는 미화 1백 달러가 넘는 몽블랑 펜과 오메가 시계 등 고급 소유물을 지니고 있었다. 아마 해외이산가족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교 교육도 달라졌다. 예전엔 러시아어 위주로 배우던 외국어가 반대로 영어 위주로 바뀌었다. 보통 5개 반이면 4개 반이 영어, 나머지 1개 반이 러시아어를 배운다한다. 그즈음 탈북을 한 북한 주민은 특히 한국, 미국, 일본 등 3개국으로 가는 경우 타 국가 행 탈북자보다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귀띔했다. 만약 체포되면 조부부터 손자까지 전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케 된다는 했다.

 

당시 한 탈북자는 고난의 행군 시기 겪은 북한 실상을 알려줬다. “함경도에서 고등중학교(고교)를 나와 10년 군대 복무(의무복무 10년)를 마치고 고향에 오니, 마을 50채 가구들 중 거의 반수 이상 빈집들이었어요. 알아보니 그간 주민들이 굶어 죽었거나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도 대부분 죽을 먹었지요. (김일성)정권이 생긴 이래 군대가 죽을 먹는 경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들었어요. 고향에 와서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탈북했습니다. 중국에서 잡혀 감옥에 6개월 구류된 적도 있었지요. 하지만 감옥에서 나오면 기를 쓰고 다시 중국으로 갔습니다. 누구든 중국으로 한번 나오면 다시 되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아요. 중국은 모든 물자가 풍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들끼리는 이제는 머리 나쁜 바보 사람과 너무 똑똑한 (순진함을 표현) 사람은 다 죽고 없어. ‘여우와 승냥이’만 남았다고 얘길 합니다.

대동강의 저녁

탈북 여성들 경우 무척 비참했다. 기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사일생 국경(강)을 건너면 기다리는 것은 인신매매 족이다. 그들은 18-19세기 경 미 남북 노예제도 때처럼 탈북자들을 중국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조직체로 전문 브로커까지 생겼다. 보통 중국 돈 5천여 위안에서 2만여 위안까지 (한화 1백여만 원에서 약 4백여만 원)다. 나이, 신체, 용모에 따라 등급을 매기고 팔아넘긴다고 한다.

 

기가 막힐 일이다. 고객인 중국인들은 생전 결혼 꿈을 못 꾸는 불구자들이나 농촌 지역 일손이 부족한 곳 등 여러 이유로 탈북자들을 데려간다. 전국에서 은밀한 소문으로 이러한 조직이 연결돼 있다고 한다. 어느 탈북모녀 등 식구들은 따로따로 팔려가 중국에서 생이별을 한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나마 선량한 조선족이나 한인 선교사라도 만나면 행운이다. 그 뒤 기회를 노려 무난히 중국인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전혀 신원보증이 안 돼 있으니 불심검문 공안에 잡혀 재북송되고, 또 탈북을 되풀이한다.

 

통일부 하나원 (탈북자 교육기관)에서 봉사하는 은퇴한 한 정신과 의사는 “탈북 여성 80% 이상이 정신병 환자로 큰 문제가 있다”고 밝혔다. 과거 안 좋은 경험 때문인지 일반적으로 탈북자들은 조선족을 신뢰하지 않는 듯싶다. 조선족 말이 나오면 “그런 양아치들 얘기 꺼내지도 말아요”하고 일소에 부친다.

북한은 아무리 못 살아도 무척 자존심이 강하다. 한때 평양공항 출입국 문 벽에 “헌 옷은 안 받습니다”라고 대문짝만하게 벽보를 써 붙여 놀란 적이 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북한 주민들의 어려운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생긴 일이다. 평소에도 해외이산가족들은 헌 옷들을 뭉텅이로 가져오곤 했다. 그러나 가방 속 한국제품은 무조건 압수다. 한글 상표가 들어간 옷 등 선물은 무엇이든 금지 품목에 속한다. 또 공항에서 가끔 낯익은 안내원과 부딪칠 경우가 있다. 일주일 이상 체류하다 보면 가까운 사이가 된다. 어느 출국 땐가 예전 친했던 한 안내원이 달려와 허리를 툭 치며 “한 막대기, 한 막대기” 한다. 막대기란 담배 한 카튼(한 보루)을 뜻하는 북한 말이다. 마침 호주머니에 20달러 지폐가 있었다. 서로 시간이 없었고 그는 슬쩍 쥐고 어디론가 달려 갔다.(계속)

 

필자소개
강원도민일보 북미특파원, 재외동포신문방송편집인협회 고문
대한민국 인권상 수상, 관훈클럽 국제보도상 수상, 한국신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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