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의 도전과 위기(3) : 이건희 2대 회장의 新경영의 교훈

by 정인준 posted Mar 22, 2021 Views 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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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25일 이건희 회장 별세에 이어 2021년 1월18일 이재용 부회장의 재 구속으로 2017년 2월부터 1년 간 이재용 부회장 구속 기간 중 삼성그룹의 대형투자 ‘올 스톱’ 경우와 같이 향후 1년 6개월간 오너 부재에 따라 대형 인수합병이나 신기술에 대한 투자 기회 상실로 삼성이 소니와 같은 추락의 길을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삼성전자 설립 51주년인 2020년 인터브랜드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삼성전자의 브랜드 가치는 623억 달러로 세계 5위로 인텔, IBM, 코카콜라, 도요타를 뛰어 넘었으며, 미국 경제잡지 포브스는 지난 100년 동안 아시아를 대표하는 최고의 혁신 기업으로 삼성전자를 선정했다.

 

이건희 2대 회장은 “흑백 TV를 만들던 아시아의 작은 기업 삼성을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산업을 선도하는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며”(한국경영자총연합회), “작은 피라미를 거대한 글로벌 고래로 변형시킨 탁월한 경영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다(이코노미스트).

 

이건희 회장의 1974년 한국 반도체 지분 인수, 1983년 64K D램 개발을 초석으로 일본에 앞서 1994년 256 M D램 칩을 개발하면서 삼성전자가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이건희 회장의 혁신의 리더쉽과 불굴의 도전정신과 미·일 반도체 분쟁에서 도약의 기회가 찾아온 1988년의 기적이 있다.

 

1987년 12월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 이건희 회장은 ‘新경영’을 통해 ‘인재경영’ 과 ‘창조경영’을 강조하고 ‘세계 1등’ 정신을 내세우며 27년간 삼성의 혁신경영을 이끌어 흑백TV를 생산하던 삼성전자를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 시켰다. 후지오 캐논회장은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흐름을 아는 선견지명이 있었고, 대규모 선행투자를 한 결단력을 높이 평가했다.

 

이건희 회장이 “ 몇 년 뒤 회사가 망할지 모르니 항상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 는 말씀이 다시 현실로 다가왔다. 이회장이 2007년 지적했던 ’샌드위치‘ 위기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데, 일본은 축적한 소재, 부품, 장비기술은 따라잡지 못했고, 중국은 한국을 턱 밑까지 쫓아왔다.

 

삼성의 핵심사업인 반도체는 중국이 명운을 걸고 추격해 오고 있고, 반도체 이후 신사업이 확실치 않아, 2013년 新경영 20주년을 맞아 이회장이 강조했던 ‘1등의 위기’가 현실화 되고 있다. 더욱이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 등 국내 기업 경영 여건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재 구속에 따른 경영 공백은 삼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도전과 혁신, 창조경영이라는 기업가 정신도 필요하지만, 이병철 창업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선포한 이후 1983년 기흥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동시에 미국에 Tri Star Semi-conductor를 설립하여 현지 기술개발과 판매를 담당토록 한 것과 같은 전략적 포석이 필요하다.

 

즉 미·중 무역 및 기술 패권 경쟁 구도에서 탈피하여, 삼성전자가 주도적으로 미국 내 삼성전자 기업을 통합하여 별도 현지법인 지주회사로 만들어 뉴욕증시에 상장하고, 미국 첨단 기술과 합작하여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신기술 개발에 선행투자를 하는 등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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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 대구 중구에서 출생, 1953년 초등학교 5학년 때 도쿄에 유학, 한 해 전 일본 대학에 입학한 맹희와 창희 두 형과 함께 하숙하면서 중학교 1학년 까지 일본학교에서 공부한 이건희는 1956년 초 서울사대 부중 2학년에 편입학했다. 일본 초등학교 시절 역도산에 매료되었던 이건희는 사대부고 진학 후 레슬링 반에 들어가 웰터급 선수로 전국대회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사대부고 시절 친구들에게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게 애국하는 길” 또는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아야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찾게 된다.”고 말하던 이건희는 1961.4월 입학한 와세다 대학 상학부(경제+경영) 졸업 후 1965년 조지 워싱턴 대학 MBA과정 수료 후 귀국한다.

 

1966년 10월 삼성그룹의 동양방송 이사로 입사한 이건희 이사는 1974년 12월6일 도산하게 된 한국 최초의 반도체회사인 부천의 한국반도체공업(통신장비수입업체 KEMCO 강기동박사가 설립)의 KEMCO 지분 50%를 50만 달러에 私財로 인수(처음에는 이병철 회장이 만류)하여 삼성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도약하는 초석을 다지면서 1979년 부회장으로 취임, 삼성그룹의 2세 경영체제를 마련한다.

 

1977년 봄, 삼성전자(1969.1.13.설립)가 TV, 세탁기, 선풍기, 전기밥솥 등 가전제품을 생산하던 시기 이건희 이사는 차세대 먹거리로 ‘전자레인지’를 선택하는데. 1983년 레인지 사업부는 ‘전자레인지’를 100만대 생산을 했고, 1999년 세계 시장 1위, 2004년 최단 기간 판매 누적 1억만대를 달성하면서 삼성전자는 세계 전자레인지 시장의 최강자로 발돋움하였다.

 

모토롤라가 국내 휴대폰 시장을 독점하던 1985년 삼성전자는 일본 부품을 조립한 카폰 판매를 시작으로, 1988년 1월에는 ‘벽돌 폰’으로 불리는 SH-100 핸드폰을 개발하였다. 1994년에는 애니콜 SH-700을 출시해 모토롤라의 시장 독점에 도전장을 냈으며, 이건희 회장이 1995년 3월9일 ‘애니콜’ 화형식에 이어 “품질을 위해서라면 생산라인도 멈춘다.”는 ‘라인 스톱제’ 실시 이후 4개월 만에 애니콜은 국내시장 점유율 50% 이상을 달성하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新경영 선언’

 

1992년 2월 임원진과 LA출장 시 베스트바이 매장 한 구속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삼성TV를 보고 충격을 받은 이건희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며 프랑크푸르트 ‘新경영 선언’(1993.6.7, 프랑크푸르트 켐펜스키 호텔)을 통해 ‘양적 성장’보다는 ‘質 경영’을 천명하였다.

“ 우리 민족성을 보면 뭐니 머니 해도 전자업종이 제일 잘 맞는 거야. 섬섬 옥수의 손재주와 섬세성에서 우리 민족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이건희 회장은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 과장급 이상 300명이 바뀌어야 그룹이 바뀐다며 앞으로 5년 간 개혁드라이브를 걸고 나가겠다.”고 말했으며, 1990년 대 재계에 부채주도 성장과 주먹구구식 기업 운영이 만연한 시기에 ‘新경영’과 ‘1등 정신’을 내세우며 혁신적 경영을 하였다.

 

1995년 3월 구미사업장에서 임직원 2천명이 참석한 ‘애니콜’ 화형식에서 ‘품질은 나의 인격이요 자존심’이라는 현수막을 걸고 불량 휴대전화와 팩시밀리 15만대를 불태우면서 삼성제품의 세계 1등을 추구한 이건희 회장의 경영철학은 <반도체 신화>라는 제2의 창업을 일궈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반도체, 스마트폰 이전에 글로벌 시장에 한국을 알린 것은 TV로, 삼성과 LG는 2000년 초반 세계 TV시장이 브라운관에서 평면TV로 빠르게 옮겨가면서 기회를 포착했다. 이때만 해도 PDP(플라즈마 디스플레이 패널) TV 시장은 소니, 파나소닉 등 일본 기업들이 주도했다.

 

두께가 획기적으로 얇고 화질이 선명한 LED(발광다이오드)TV가 글로벌 소비자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을 때, 삼성은 “TV를 가구처럼” 이라는 콘셉트와 우아한 와인 잔 분위기를 반영해 디자인 한 LCD(액정표시 디스플레이) TV ‘보르도’ 출시로 2006년부터 소니를 제치고 세계 TV시장 1위에 올라선다.

 

호암 이병철 회장이 73세인 1983.3.15. 반도체사업 진출을 선포 후 1983년 4월 기흥에 10만평 부지확보, 7월 부지조성, 9월에 삼성석유화학 성건평 소장을 기흥반도체 초대공장장으로 임명, 영하 15도의 추위 속에서 24시간 공사를 강행 연인원 26만명이 참여해 공장건설을 본격화하여 건설공사 6개월만인 1984년 3월 말 반도체 양산 기흥 1라인 공장건설을 완공하였다.(미국, 일본의 반도체 공장 건설은 18개월 소요)

 

1982년 2월 도시바가 ‘W 작전’을 발표, 대규모 투자로 1Mega램 개발을 공표했으나, 당시 반도체 주력제품은 64K D램이었다. 삼성은 당시 일본 NEC, 산요와 손잡고 TV를 생산하고 있었으나, NEC가 반도체 기술이전을 거부함에 따라, 1983년 5월 64K D램 개발팀을 구성하고, 설계기술 이전에 합의한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6명의 연구원을 파견했으나, 핵심기술영역에 접근을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64K D램 개발

 

다행히 삼성은 자금난에 시달리던 마이크론테크놀로지에 125만$를 주고 64K D램 설계도와 마스크를 입수했고, 무려 309개에 달하는 공정기술 개발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제품 개발 6개월만인 1983년 11월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 개발 성공을 발표하였다.(일본은 기술개발 6년 만에 64K D램 개발)

 

삼성의 64K D램 개발은 미국과 일본이 20년 걸린 개발과정(4K, 16K, 32K)을 3단계 뛰어넘는 도약으로, 미·일과의 반도체 격차가 10년에서 2-3년으로 좁혀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도체 장비 발주와 함께 직원 170명을 장비 제조업체에 파견, 설비제작과정을 보고 온 직원들이 훌륭한 엔지니어가 되어 1983년 11월 VLSI(초고밀도직접회로) 64K D램 양산에 성공함으로써, 삼성신화가 시작된다.

 

한국반도체의 미국 측 파트너 지분 50%를 마저 인수해 1978.3.2. 출범한 삼성반도체가 1982.10.1. 한국전자통신의 반도체사업부를 인수하여 새 출발한 삼성반도체통신은 기술도입선인 일본 NTT의 전자교환기용 반도체 부품이나 디지털시계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생산하는 수준이었다.

 

1983년 VLSI 개발 초기 단계에 삼성전자의 총 매출은 200억원으로 VLSI 소규모 생산라인에 약 470억원을 투자했으나, 채산성이나 인력, 기술 등 모든 면에서 미래가 막막한 수준이었다. 호암 이병철은 1983.4.18. 기흥 10만평 부지에 반도체 D램을 대량 생산할 공장건설을 지시함과 동시에 1983.7.11. 미국 현지에서 반도체 기술개발 및 판매를 할 현지법인 Tri Star Semi-conductor설립을 지시하여 후일 반도체 신 제품개발에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된다.

 

삼성이 반도체 개발에 그룹의 인적, 물적 자원을 총 동원하여 64K D램 반도체를 개발한 시기는 1983년 9월1일 소련 전투기가 사할린 섬 부근 해역에서 대한항공 007을 격추했고, 1983년 10월9일 북한이 버마를 국빈 방문 중이던 전두환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한 아웅산 테러를 자행하여 장관, 청와대 수석이 다수 사망함에 따라 남·북간, 미·소간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다.

 

1983년 한국의 안보위기 속에 삼성의 반도체 사업에 도약의 기회가 온 것은 1985년 9월22일 일본 엔화의 대폭 절상을 결정한 ‘플라자 합의’(달러 환율은 1달러에 235엔에서 1년 후 120엔 대에 거래)와 1985년 7월31일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 체결로 D램 미국시장의 75%를 점유(1984년)하던 일본이 반도체 대미 수출 규모를 감축하게 되는 반도체 시장의 변화이다.

 

미·일 반도체 무역협정 체결

 

작은 반도체 칩 하나에 저항기, 축전기 및 트랜지스터를 올리고 간단하게 회로를 연결하는 반도체 기술은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잭 킬비(Jack Kilby)와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의 로버트 노이스(Robert Noyce)의 특허신청(1959년)에서 출발하였다. 노이스는 1968년 고든 무어와 인텔을 창업, 1976년 16K D램을 개발하였다.

 

일본 정부는 1976년 반도체공업을 국책산업으로 지정, 초기 VLSI(초고밀도직접회로)연구 지원을 결정하고, 1977년 이후 4년 간 NEC, 도시바, 미쓰비시, 히타치 등 에 개발비 737억엔 중 446억엔을 지원했다. 일본의 民官 반도체 개발은 1977년 16K D램 개발로 이어지고, 가격경쟁력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한다.

 

1970년 대 후반 불경기를 맞은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설비투자를 줄이고 일본 전자업체에 D램 등 메모리 칩 제조를 맡기게 된다. 1978년 10월 후지쯔가 64K D램을 개발했고, 1980년 2월 NEC가 인텔과 거의 동시에 256K D램을 개발하자 인텔은 기술을 도둑맞았다며 억울함을 정부에 호소한다.

 

1980년대 초 NEC, 도시바, 히타치, 미쓰비시의 년 평균 반도체 매출액은 80억$인 반면 Texas Instrument와 모토롤라 매출은 각기 41억$, 31억$에 불과했고, 다른 미국 반도체 업체들의 년 매출은 10억$ 미만이었다. 일본이 대미 반도체 무역에서 천문학적인 흑자를 내고, 반도체 적자가 미국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의 최대원인으로 지목되면서 일본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악화하였다

 

일본의 대규모 설비투자와 양산을 통한 低價 전략으로 미국 반도체 시장을 공략해 가자 미국에서는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비난 여론이 일어나면서 미·일의 반도체 무역 분쟁이 일어난다. 1982년 미국 IBM, GE의 반도체 라인을 시찰한 호암과 이건희 부회장이 반도체에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고, 호암은 1983.2.8. 도쿄에서 삼성의 VLSI 진출을 결정하였다는 도쿄선언을 하게 된다.

 

삼성은 반도체 선진국을 따라 잡을 수 있는 경계선에 있는 64K D램과 256K D램의 개발을 동시 추진하는 “병렬 개발 시스템” 으로 선진국을 따라 잡겠다는 의지가 강했는데, 이 전략은 삼성의 강점인 ‘속도전’의 출발이 되었다. 256K D램의 본격 개발은 64K D램 개발 성공 후 3개월 만에 시작했는데 7개월 후인 1984년 9월 개발에 성공하였고, 256K D램은 삼성이 글로벌 반도체 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64K D램의 기술적 백그라운드 없이는 256K D램, 1M D램이 나올 수 없어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64K D램부터 시작된 개발 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삼성의 1992년 D램 반도체 시장 점유율 13.5%로 12.8%에 그친 도시바를 제치고 D 램 생산 세계 1위에 올랐는바, 반도체 사업 진출 선언과 64K D램 개발 10년 만에 이룩한 쾌거였다.

 

1983년 겨울 기흥 2라인(1984년 8월 착공)을 기흥 1라인의 5인치 웨이퍼보다 생산성이 높은 6인치 웨이퍼(1장에 100개 칩 생산, 생산원가 25% 절감)를 걸도록 한 것도 ‘신의 한 수’로 평가된다.

 

1993년 6월3일 16M D램을 양산할 기흥 5라인에 일본 NEC, 히타치, 마쓰시다 보다 앞서 선행 투자로 웨이퍼 8인치 라인을 준공하면서, 그해 메모리 반도체 전체 매출 세계 1위로 올라섰다.

 

삼성은 1994년 7월 5,6,7라인을 풀가동하여 16M D램을 일일 100만개 생산하면서 제조원가를 낮추면서 가격경쟁에서 유리한 지위에 올라섰고, 1994년 한국 수출 역사상 처음으로 반도체 칩 만으로 100억$ 수출을 달성하게 된다.

 

1988년의 기적

 

1984년 말 세계 PC수요가 감소하고, 1983-1984년 호황기에 시설을 늘린 반도체 선발업체들이 반도체 가격을 인하함에 따라 후발 주자로 호암의 지시에 따라 1984년 8월 기흥 2라인을 착공한 삼성의 D램 반도체사업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더욱이 선발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의 킬비(Kilby) 특허 침해 소송으로 결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64K, 256K D램 로열티 8,500만$에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하는 등 삼성의 반도체사업은 대규모 투자비용이 발생하면서 큰 위기를 맞이하였다.

 

1986.7.31. 미·일 반도체협정 체결로 미국이 덤핑제소를 철회하고, 일본은 반도체 생산을 감산하게 되고, 1987년 후반 미국 전자, PC시장이 살아나면서 반도체 경기도 회복됨에 따라 64K 및 256K D램이 공급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1987년 후반 PC업체들은 256K D 램을 주 메모리로 사용했는데, 미·일의 선두 반도체 기업들은 이미 1M D램 생산에 주력하고 있어 삼성전자가 뒤늦게 양산을 시작한 256K D 램이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공급부족으로 가격도 1달러 50센트에서 4-6달러로 급등하였다. 64K D램도 개당 30센트에서 2달러 30센트로 수직상승하였다.

 

삼성전자는 1988년에 64K D 램 5천만개, 256K D램 8천만개를 생산 판매해 1988년 한 해만 3,200억원의 순익을 내었으며, 삼성의 SSI가 IBM 테스트를 통과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생산업체 리스트에 오르게 되면서 준비된 삼성에 기적이 찾아왔다. 1988년은 삼성반도체통신과 삼성전자가 합병하고,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해로, 삼성전자가 256K D램의 생산성과 수익성을 탄탄히 하면서 양산의 길을 나아가게 해 주었다.

 

기흥 반도체 사업장 1라인(64K D램 생산)을 성공적으로 가동했지만, 삼성반도체통신(현 삼성전자)의 누적적자가 1,300억원이 넘는 상황에서 임직원 모두 기흥 3라인 건설에 다시 2,800억원이 들어가는 신규투자에 망설일 때 1987.8월6일 이건희 부회장 결단으로 호암의 마지막 참석한 공식행사가 된 기흥 3라인 건설에 착공(1M D램 양산, 3억4천만$ 소요), 1988년 10월에 완공하였는데, 이 무렵 PC붐과 함께 256K D램 품귀로 삼성반도체는 적자를 메꾸고도 막대한 이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현재 기흥 2-15 라인,S라인 등 총 15개 라인이 가동 중인데, 2016년 준공 목표로 추진한 평택 고덕 신도시 내 396만m² 산업용지에 반도체 라인을 조성했는바, 기흥 사업장(142만m²)의 두 배가 넘는 면적이며, 공장부지 조성에만 2조 4,000억원이 투입되었다.

 

세계 최초 256M D램 개발

 

1988년 늦은 가을 미국 Samsung Semi-conductor Inc(SSI, 1985년 Tri-Star Semi-conductor에서 명칭 변경)의 구석진 방에서 진대제 박사(IBM근무)와 권오현 박사(스탠포드대)가 4M D 선행 개발을 시작했으며, 중요한 순간 과감한 판단을 내린 이건희 회장의 승부사 기질은 1989년 4M D램 개발 방식의 선택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미국 SSI에서는 ‘트랜치(Trench) 방식’(파 내려가는 형태)을, 기흥공장에서는 ‘스택 (Stack) 방식’(위로 쌓는 형태)을 연구 개발을 하면서 어느 것을 채택할지 고민할 때 IBM, TI, NEC, 히타치, 도시바 등 거의 대부분의 경쟁사들이 트랜치 방식을 택했지만, 이건희 회장은 백업 장치로 눈으로 확인이 가능한 ‘스택 방식’이 유리하다는 기술진의 의견을 과감히 수용, 삼성이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를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일본 NTT가 1987년2월 16M D램 선행 개발에 나서고, 1989.2 NEC,미쓰비시가 16M D램 개발과 양산에 나서자 삼성도 1990년 4월 진대제, 권오현 박사 중심으로 64M D램 개발팀 구성, 1992.8월 1억4,000만개 소자를 집적한 64M D램 완전 칩을 얻어 IBM에 최초로 제출하고, 1993년 5월부터 64M D 램을 출시하면서 삼성이 일본 반도체 기술을 실질적으로 추월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본 노무라연구소도 “D램 생산에서 정상에선 한국의 반도체공업”으로 평가했다.

 

1992년 3월 황창규 박사 등 70여명이 256M D램 개발 팀 구성, 1994.8.11.첫 테스트 웨이퍼에서 256M D램의 2억6,700만개 셀이 모두 작동하면서 삼성은 1994년 8월 29일 256M D램 개발을 공식발표했다. 1994년 12월 13일 삼성이 256M D램 칩을 HP의 로렌스부회장에게 샘플을 건냈으며, 일본 NEC가 1995년 세계에서 두 번째로 256 M D램을 개발해 반도체 기술에서 한일 역전이 일어났다.

 

일본 보다 6개월 앞서 256M D램을 개발의 주역인 황창규 前삼성전자 반도체총괄사장은 1994년 8월29일 이후 삼성은 반도체 기술 자립을 이룩했으며, “반도체 신화를 이어가기 위해 시스템 반도체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견지명과 결단력

 

1983년 강진구 당시 삼성반도체통신 사장은 6개월 만에 64K D램 생산, 조립 및 검사까지 모든 공정을 완전히 개발하고, 고비 때 마다 시장의 흐름을 내다 본 이건희 회장의 결정이 주효했다며, 대표적인 것으로 D램 생산 방식 중 트랜치 방식과 스택방식이 대립하고 있을 때 삼성은 스택방식을 택한 사례를 들었다. 트랜치 방식을 택한 도시바 등은 이후 경쟁력 약화로 밀려나게 된다.

 

1990년대 초 업계 최초로 200mm 웨이퍼 양산을 결정한 것도 효율적인 투자로 평가되는데, 선두 업체가 차세대 웨이퍼 투자를 주저하고 있을 때 삼성은 과감한 선행 투자를 진행했던 것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92년 삼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로 올라섰고, 지금 까지 1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배경은 신기술이다. 2014년 삼성은 20나노 D램(64 K D램의 12만5천배 용량)을 세계 최초로 양산에 성공했는데, 20나노 D램은 새로운 장비 없이 더 이상 미세화가 불가능 하다는 통념을 깬 사례이다.

 

진대제 前정보통신부 장관은 이건희 회장은 2000년이 되기 몇 년 전부터 “앞으로 1 기가 D램을 많이 사용하는 시점에는 무선통신 같은 새로운 Giga기술이 상용화될 것이다.”고 말씀하셨다며 스마트 폰 등장과 4차 산업혁명 관련 변화를 예견한 것으로 회고했다. 이건희 회장은 “ 다른 글로벌 기업들이 머뭇거릴 때 과감하게 투자해 기회를 선점해야 성장 기회가 오고, 국가경제에 보탬이 된다. 실패해도 되니 신기술 투자에 돈을 아끼지 말라.”며 ‘기회선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낸드 플래시는 스마트폰, PC,빅 데이터, 인공지능 등 4차 산업 시대에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핵심은 낸드 플래시 원천 기술을 보유한 것으로, 2020년 4/4분기 낸드 플래시 매출은 46억4,400만$로 세계 시장 점유율 32.9%로 15년 째 세계 1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낸드 플래시 메모리 칩의 원조격인 16K EEEP는 삼성의 자체 양성 해외박사인 임형규 수석이 1984.7월 개발했다.

 

2001년 당시 세계 최대 낸드 플래시 업체인 도시바의 합작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를 놓고 이건희 회장, 이윤수반도체 총괄사장, 황창규 메모리사업부장 등이 도쿄 지쿠로 식당에서 모여 논의한 ‘자쿠로 회동’ 결과 합작 보다는 “눈앞의 기름진 음식만 즐긴 뚱뚱한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한다.”며 독자적인 개발을 선택한 당시의 이건희 회장 결정으로 1년 만에 도시바를 추월하고, 2006년에는 세계 낸드 플래시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게 된다.

 

삼성이 2001년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키울 당시 인텔과 AMD가 주도한 노어 타입이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었고, 낸드 타입은 10%에 불과했는데, 삼성이 노키아를 설득, 노키아가 원하는 대로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만들어 주면서 이후 시장은 낸드 플래시 점유율이 90%로 점하게 된다.

 

2005년 낸드 플래시 시장이 공급과잉에 빠지자, 삼성은 MP플레이어를 제조하던 애플(Apple)을 찾아 “얇고 가벼운 제품을 만들려면 하드 디스크대신, 플래시메모리를 써야 한다.”고 설득, 결과적으로 애플의 히트작 ‘아이팟 나노’를 탄생시키기도 했다.

 

2010년 경 승지원에서 액정, 플라즈마 등 디스플레이 시장에 관한 토론에 참가했던 미타라이 후지오 캐논회장은 이건희 회장이 1990년대 ‘선택과 집중’을 통해 초기 액정TV, 이후 반도체 분야 육성 지금은 스마트 폰으로 삼성을 세계적 기업으로 만들었다며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술의 흐름을 아는 선견지명이 있었으며,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정은 스스로 하는 큰 결단력으로 삼성의 변화와 혁신을 이룬 리더쉽을 갖춘 사람으로 회고했다.

 

디자인 혁신

 

이건희 회장은 취임 후인 1988년 “앞으로 디자인이 중요하니 수백만 달러를 주더라도 이탈리아의 유명 디자이너를 데려와 디자인 혁신을 해라. 디자인이 떨어지면 상품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론에 따라 삼성그룹은 1991년 ‘삼성디자인 센터를 설립하는데, 이회장의 말은 7-10년 후 현실이 되면서 탁월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1990년 대 초 삼성전자 고문이었던 후쿠다 타미오 명예교수(일본 교토공예섬유대학)가 ‘삼성 경영진과 디자인 부서 간 정보를 공유하지 않아 업무가 비효율적이고 경영진이 디자인에 대해 무지하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건희 회장이 ‘경청(傾聽)’ 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 디자인이 위력을 발휘한 ‘보르도 TV’ 개발이다.

 

1978년 TV시장에 진출한 후 34년간 후발주자에 머물었던 삼성전자는 2005년 “일본 소니를 제치고 세계 1위를 할 수 있는 TV를 내어 놓으라”는 이건희 회장의 지시를 받고, 블루오션 전략을 채택한다.

 

당시 삼성전자의 TV시장 점유율은 4.6%로 아날로그 기술이 중심인 브라운관 TV가 10대 중 9대로 기존 기술로는 일본을 제치기 어려워, 디지털 기술에 강점을 갖고 잇던 삼성전자는 LCD TV에 승부를 걸고, 디자인은 붉은색 와인을 바닥에 머금은 와인 잔을 연상시키는 보르도 TV를 탄생시켰다. 2006년 출시와 함께 보르도 TV는 이듬해 나온 차기작까지 1000만대가 팔리면서 소니를 제치고 삼성전자를 단숨에 세계1위로 끌어 올렸다.

 

이건희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新경영 선언’(1993년)을 통해 ‘인재경영’ 과 ‘창조경영’을 내세우는 한편, 시장과 기업 생태계의 트랜드를 파악하고 디자인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경쟁력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디자인과 경영이 별개가 아니라는 ‘디자인 경영론’을 제시하는 등 삼성의 혁신과 변화를 주도했다.

 

인재중심 경영

 

애니콜 신화의 이기태 삼성전자 사장, 허태학 에버랜드 사장 같은 지방대 출신들이 삼성그룹의 최고경영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호암이 뿌리내린 실력 위주의 인사원칙 때문이다. 이건희 회장이 능력을 중시하는 삼성의 조직문화에 지역 전문가 제도를 시행함으로써 ‘한국의 삼성’이 ‘세계의 삼성’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1991년 “앞으로 남미, 아프리카 후진국에도 마케팅 할 날이 올 것이다”며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 덕에 선진국 뿐 아니라 제3세계에도 마케팅과 브랜드 영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지역전문가 양성을 위해 80여 개국에 5천여명의 직원들을 원하는 국가에서 1-2년 머물며 현지어와 문화를 익히도록 연봉 외에 1인 당 1억원의 체재비를 지원한 것이다.

 

해외 파견된 직원들은 일본은 엔지니어링, 미국은 마케팅 및 매니지먼트, 싱가포르, 홍콩에서는 금융경험을 쌓고 귀국해 지역전문가가 되어 매출의 85%가 해외에서 발생(2018)하는 삼성의 글로벌화에 크게 기여했다. 1990년대 태국 경영대학원을 다닌 삼성 직원은 2000년대 삼성이 태국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힘을 보태기도 했다.

 

이건희 회장은 “몇 년 뒤 회사가 망할지 모르니 정신 차리고 제대로 하고, 잘 모르면 그것을 할 수 있는 인재라도 키우고, 항상 위기에 대비해야 한다.”는 “위기경영‘을 강조한 바 있다. 하드웨어 경쟁에 치중하던 1990년 대 초반, 1991년 러시아를 방문 중인 이건희 회장이 ”창의성 있는 소프트 인재를 뽑아오세요“라는 지시에 삼성그룹은 ’전국컴퓨터서클연합‘이란 모임을 찾아 1년 간 활동공간을 마련하고, 대학 학점에 관계없이 순수 컴퓨터 실력으로 인재를 채용하기도 했다.

 

2011년 이건희 회장은 신년사에서 “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 글로벌 인재를 키우고 유망기술을 찾아야 한다.” 고 말하면서 “창조와 혁신, 동반성장으로 새로운 10년을 맞이하자. 지금부터 10년은 100년으로 나아가는 도전의 시기가 될 것이다.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 사업 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 제품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 삼성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일이라면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다. 모자라는 부분은 기꺼이 협력하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 고 말했다.

 

1등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

 

“반도체는 미래 산업의 쌀이다”라는 전문가 자문에 따라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려던 이건희 동양방송 이사는 이병철 회장이 만류하자 “내 돈으로 인수하겠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 삼성전자의 시발점이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삼성그룹을 ‘암 2기’라고 진단했던 이건희 회장은 ‘인재경영’과 “창조경영‘을 내세우며 삼성의 혁신과 변화를 이끌어 왔다. 이회장이 2007년 지적했던 ’샌드위치‘ 위기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데, 일본은 축적한 소재, 부품, 장비기술은 따라잡지 못했고, 중국은 한국을 턱 밑까지 쫓아왔다.

 

삼성의 핵심사업인 반도체는 중국이 명운을 걸고 추격해 오고 있고, 반도체 이후 신사업이 확실치 않아, 2013년 新경영 20주년을 맞아 이회장이 강조했던 ‘1등의 위기’가 현실화 되고 있다. 더욱이 상법, 공정거래법 개정 등 국내 기업 경영 여건이 나빠지는 상황에서 이재용 부회장의 재 구속에 따른 경영 공백은 삼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의 도전과 혁신, 창조경영이라는 기업가 정신도 필요하지만, 이병철 창업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선포한 이후 1983년 기흥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건설하고, 미국에 Tri Star Semi-conductor를 설립하여 현지 기술개발과 판매를 담당토록 한 것과 같은 전략적 포석이 필요하다.

 

즉 미·중 무역 및 기술 패권 경쟁 구도에서 탈피하여, 삼성전자가 주도적으로 미국 내 삼성전자 기업을 통합하여 별도 현지법인 지주회사로 만들어 뉴욕증시에 상장하고, 미국 첨단 기술과 합작하여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신기술 개발에 선행투자를 하는 등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백승구, “삼성전자 40년 성공비화”, 월간조선 2011년 3월호

삼성그룹, 『호암자전』, 나남, 2014.4

“2009년 창립40주년을 맞아 삼성전자 40주년 社史 발간”, 중앙일보, 2010.12.31.

심재우,“신년기획, 대한민국 경제국보 제3호 삼성전자 64K램”, 중앙일보 2011.1.5.

“중앙일보 창간 50주년-100년 갈 성장 엔진을 키우자”, 중앙일보, 2015.8.20.

진대제, “이건희 회장 추도사”, 중앙일보, 2020.10.28.

“프랑크푸르트 신경영과 1등의 위기”, 중앙일보 사설, 2020.10.26

미타라니 후지오, “ 이건희 회장 추모기고”, 중앙일보 2020.10.27.

 

  • 사무처 2021.03.22 16:40
    와 우~ 귀한 글, 꼭 알아야할 내용을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