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회 이강선 - '시골뜨기 서울입성'

by 사무처 posted Jan 07,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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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뜨기 서울입성


1950년 6월25일. 갑작스럽게 6.25 사변이 터지고 같은 해 9월28일 맥아더 장군을 선두로 하는 유엔군의(16개국) 도움으로 서울을 탈환(서울수복)한 뒤1951년1월4일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이 북한 김일성에 합세한 중공군(중국군26만명)의 기세에 눌려 서울을 다시 빼앗기고 수원까지 밀렸다가(1.4후퇴) 다시 올라가고 업치락 뒷치락 하다가 1953년7월27일 위도38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를 반토막으로 자르는 휴전(우리나라가 빠진  북한 중국 유엔의 미국대표들의 회의에서) 협정을 맺어 오늘까지 종전이 안된 상태다.

휴전된 그 해에 나는 부여 능산리(부여 고분군)에서 증조 할아버지,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들, 일꾼들 북적거리는 틈에서 부여읍에 있는 부여국민학교 1학년에 입학해서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19살에 대전사범을 졸업하자 마자 서울로 발령을 받으셨고 엄만 혼자 서울서 자취하고 있을 25살 총각같은 아버지가 불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서 날 사촌언니에게 단단히 부탁하고 3살된 남동생을 들쳐업고 보따리 하날 들고 황망히 서울로 떠났다.
엄마가 서울로 떠나고 열명도 넘는 식구들은 아무도 날 눈치주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날 어려워하였다.
그리고 난 말 수가 적어졌고 공상이 많은 외로운 아이가 되어갔다. 우리집에서 서쪽으로 난 쪽문을 열면 올라갈 수 있는 백제 왕릉 꼭대기 고운 잔디위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앉아 서울 간 엄마를 그리워하기도 하다가 곱게 물든 서쪽 하늘 석양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즐기기도  하였다.
왕릉에서 우리집을 내려다 보면 볏집으로이엉을 엮어 얹은 초가 지붕이 어린 내 눈엔 학교운동장 만큼 커보였다. 지붕을 새로 엊을 땐 바깥 마당에 동네 장정들이 다 모여 며칠동안 이엉을 엮느라 볕짚을 산더미 처럼 쌓아 놓고 시끌벅적 난리도 아니었다.
돌계단을 다섯쯤 올라와 웅장한 대문앞에 서면 신작로가 환히 보여 하루에 2번 다니는 버스가 흙먼지를 폴폴 내며 달리는데  읍내 장에 다녀오던 흰 옷입은 아낙들이 입을 소매로 가리며 뒤돌아 선 모습이 보인다.
우리집 대문은 아침 일찍 일어난 일꾼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활짝 열어 놓으면 해질녘에 할아버지께서 닫으신다.
할아버지께서 구성지게 시조를 읇으시는 누마루에 올라가면 활짝 열린 대문으로 우물가에서 물동이 이고 다니는 동네 아낙들 모습과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는 소리도 어렴풋이 들린다.
내가 커서 들은 얘기론 눈에 보이는 땅이 모두 할아버지 땅이었는데 해방후 실시된 토지개혁 때 많이 빼앗겼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 땅에 오랫동안 집을 짓고 살던 마을 사람들이 얼마 전에 등기를 내겠다고 해서 등기를 내도록 해 주었다.
백제 유물이 출토 되었다고 부여 문화재 관리국에서 보상비 주고 수용한다고 해서 그들이 보상을 받고 이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가끔 고모 손잡고 읍내에 가면 " 아이구, ○○ 네 손녀네. 참 똘똘하게 생겼네." 이제나 그제나 예쁘지 않던 내게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할머니, 고모들은 밭에 나가 일하느라 바쁘고 할아버지와 일꾼들은 산에서 나무도 해야 하고 논 일도 하느라 바쁘고 커다란 집에서 나만 혼자 한가롭다.
여덟 칸이나 되는 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 바로 부엌위에 있는 다락이다. 부엌에서 아궁이에 나무 땔 때 나는 나무 냄새, 가마솥에서 밥 익는 냄새, 구수한 된장국 냄새, 그리고 윤이 반질반질하게 난 마루 바닥, 특히 다락 서쪽에는 긴 창이 있어 배를 깔고 엎드려 양손으로  턱을 고이면 둥그런 왕릉이 보이고 왕릉 뒤로 곱고 고운 해무리, 석양이 나를 황홀하게 한다. 엄마 없는 난 그렇게 혼자 잘 놀았다.

보자기에 책과 공책 필통을 돌돌말아 허리에 묶고 철필통 속에서 연필이 부딪혀 달랑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능산리에서 읍내까지 학교 다니는 먼 길이 익숙해 질 무렵. 여름방학에 엄마가 동생을 데리고 서울서 내려와 나를 보자마자 눈속에 가득 고였던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야! 인자 서울 가자"
이틀을 더 자고 이제 곧잘 걷는 동생을 가운데 두고 손을 잡으며 "할아버지, 저 서울가요. 안녕히계세요. "  "그래, 잘가거라. 공부 잘하고..."

부여국민학교 입구에 양쪽으로 길게 심어진 샛노란 개나리꽃이 참 예뻤는데...
학교 입구에 사과 상자위에서 끓던 달고나 냄새가 참 달콤했는데...
'나도 서울가는구나'
가슴이 뛰기도 했지만 달고나 냄새가 코끝을 간지렸다.

1953년 여름. 갓 시골서 올라온 시골뜨기 어린아이 눈에도 서울은 너무 더럽고 지저분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쟁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사람들은 의식주에 쪼들려 악에 바쳐 사소한 일에도 악을 쓰고 싸웠다.
동회(주민센터)에선 미국으로 부터 원조 받은 밀가루로 배급을 주었고 학교에선 원조 받은 동물 사료인 전지분유를 한 국자씩 아이들에게 퍼주었다.
가끔 교실에 구호물자(헌 옷)를 한 보따리펼쳐 놓고 자기에게 맞는 옷을 골라가게 하기도 하였던 시절이니 청결에 신경 쓴다는게 사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엄마랑 떨어져 부여에 있는 동안 하숙집에 있던 아버지는 부엌, 방, 마루, 방, 화장실이 기역자로 되어있는 한옥 비슷한15평 남짓되는 집을 마련하고 엄마랑 동생이랑 살고 계셨다.
부여의 바깥 사랑채 보다 나을 것도 없는 서울집. 부엌이 마당보다 낮아  비가 좀 많이 오면 장작을 때는 아궁이에 물이 고여 바가지로 퍼내야 했고 여름이면 푸세식 화장실에선 냄새가 많이 났고 파리가 엄청 많았다.
그게 서울서 처음 마련한 우리집이었다.
대문을 나서면 삼선국민학교 철조망 울타리가 보이고 학교 왼쪽으론 내가 부중 입학하고 아이들이 ' 한성 똥통 한성 똥통" 하며 놀리던 한성 여중이 있었다. 그자리에 지금 한성대학교가 있다.
동도 극장 앞에서 넓은 찻길( 그 땐 신호등이 없어 눈치껏  건너야 함)을 건너 산 쪽( 지금은 기라성 같은 아파트가 세워져있다.)으로 올라가면 잎이 넓은 아름드리 플라타나스가 축대 가장자리에  늘어서 있어 아버지가 사주신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빨간색 뚜껑에 커다란 무궁화 꽃이 그려진 란도셀 가방이 무거워  나무 그늘 밑에서 쉬어가기도 하던  돈암 국민학교. 1학년 3반. 시골뜨기가 드디어 서울로 전학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