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전경련 홍보실 과장으로 일한지 얼마 되지 않아 회원사였던 삼성의 홍보실 임원을 만나러 갔다. 예나 지금이나 삼성 홍보실은 규모도 예산도 제일 컸고 이슈도 많은 곳, 그래서 일을 잘 한다는 평가가 외부의 대세였다.

그런데 그 임원의 책상 유리 밑에 신문기사 하나가 깔려 있었다. 자리에 앉는 사람은 누구나 보일 수 있게 커다랗게 확대 복사 돼 있었다. 그 자리는 대부분 기자들이 앉는 자리기 때문에 읽으라고 깔아 놓은 것이었다. 

“미국 언론사, 오보로 도산” 이런 제목이었다. 내용은 누구나 짐작이 갈 것이다. 신문의 보도로 어려움을 겪은 기업이 고소를 했는데 오보임을 인정한 법원이 감당할 수 없는 정도의 벌금을 때려 언론사가 부도났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적용된 것이다. 실제 삼성은 그 후 몇 개의 매체를 상대로 소극적 의미의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실행했다. 광고를 끊은 것이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 여건에서는 너무 앞서 간 탓이다.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 기업과 언론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언론을 대하는 태도에 크게 배움이 된 경험이 있다. 당시 전경련의 회장은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유창순(劉彰順) 롯데제과 회장이었다. 경륜과 실력 못지 않게 인품도 아주 훌륭하였다. 88서울 올림픽 때 정주영 회장과 같이 유치활동을 주도했을 정도로 재계 인사들과의 교유도 깊었다. 출입기자단과도 분기에 한 번 정도는 간담회를 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았다. 당시는 5공 청산의 바람이 드셌다. 당연히 재계에도 수난이 왔다.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는데 재벌들의 사재기가 원인이라는 보도가 잇달았다. 3저의 호황으로 유동성이 팽창하고 규제로 공급이 부족해 생긴 현상을 엉뚱하게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에 비(非)업무용의 딱지를 붙여 화풀이를 해댔다. 급기야 45대 그룹의 총 5741만평이나 되는 토지가 정부에 의해 매각대상으로 분류됐다. 이른바 5.8 대기업 비업무용 부동산 매각 조치(1990년)가 그것이다.

졸지에 부동산 투기의 원흉으로 몰린 기업들은 억울하다고 했다. 그러나 대 놓고 정부에 대들 수는 없었다. 전경련이 방패막이 돼 달라고 했다. 그러나 노련한 유창순 회장은 그대로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광풍이 지나가면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고 정부와의 교감(?)도 있었을 것 같다. 정부의 정책에 노골적인 비판을 자제하는 전경련에 대해 출입기자들은 비판적 기사를 쏟아냈다. 심지어는 바로 엊그제 같이 웃으며 식사를 했던 유창순 회장에 대해 “무기력한 비 오너 회장”같은 모욕적 제목까지 뽑아냈다. 

유창순 회장 시절 전경련의 상근부회장은 최창락 전(前) 동력자원부 장관이었다. 출입기자 일부가 최 부회장의 면담을 요청해 그의 사무실로 갔다. 필자도 배석했다. 기자들이 핏대를 내며 전경련이 회원사의 고충을 외면한다고 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나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최 부회장은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러더니 끝날 즈음에 “기사는 잘 보고 있고 오늘 말씀이 크게 참고가 됐다.”고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누가 봐도 웃거나 악수할 상황은 아니었는데 험악했던 미팅은 그렇게 미적지근하게 끝났다. 

기자들이 돌아간 후 최 부회장은 회의를 소집해 대기업이 보유한 부동산에 대해 전경련이 자료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 임원은 기업들이 자료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신문에 보도된 것이 전부였다. 자료도 없이 기업을 옹호할 수 있냐고 담당 임원을 나무랐다.

결국 부동산 문제는 분당, 일산 등 4개 신도시를 조성 해 200만호의 주택을 공급함으로써 잡을 수 있었다. 넘쳐나는 유동성을 관리하고 규제로 점철 된 공급부족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유창순 회장의 지론대로 된 것이다. 일부 억울한 사례는 있을 지라도 이는 차후에 구제토록 하고 우선 급한 불을 꺼 성난 민심을 달래는 것이 기업에도 이득이 된다는 것이 기자를 만나는 최창락 부회장의 당시 심정이었을 것이다.

자료를 분석하고 시간을 가지고 바른 방향으로 여론과 정책을 축척해가는 그의 노력은 “큰 참고가 됐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귀결이 됐고 그 후 내 홍보실 인생에 두고두고 큰 배움이 됐다. 

더불어 민주당이 강행처리를 주장하는 언론중재법 개정안에 개인적으로는 반대한다. 이 법안은 기본적으로 언론에 대한 존중이 결여돼 있다. 나쁜 놈은 법으로 응징하겠다는 무자비한 취지만 보인다. “참고가 됐습니다.”라는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가짜뉴스의 진원지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과 같이 추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얘기하면서 끝내 당신만 챙기는 권력과 정치권의 행태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 같이 추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보로 겪은 어려움은 기업도 권력이나 정치 못지 않다. 그러나 기업은 오보도 참고하면서 스스로를 진화시켜 왔다. 우리 정치권도 이 참에 스스로 나서주기를 바란다. 이것은 “언론 탓”을 하며 미룰 일도 아니며 하지 못 할 일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