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서로의 지지자였던 이어령(왼쪽)과 이우환. /장련성 기자
 
평생 서로의 지지자였던 이어령(왼쪽)과 이우환. /장련성 기자

“이어령 선생은 우리 문화의 본질과 성격이 무엇인가를 누구보다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이 국제적인 언어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한 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화가 이우환(86)씨는 대한민국 지성계를 풍미했던 이어령(1933~2022) 선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이씨는 27일 본지 통화에서 “오늘 아침 일본 뉴스를 통해 별세 소식을 전해들었다”며 “너무나 많이 배우고 도움 받고 존경했던 분”이라고 말했다.

이씨는 선생과의 첫 만남을 회고했다. 1968년쯤이었고, 이어령 선생이 먼저 만남을 제안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러러 봤지만 만날 기회는 없었다. 일본에서 민화(民畵) 관련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걸 어떻게 찾아보셨는지 ‘번역해서 잡지에 싣고 싶다’는 선생의 연락을 받았다. 서울 내자호텔 커피숍에서 만나자고 하셨다.” 훗날 이어령 선생이 ‘이우환 충격’이라고 표현한 이날 만남에서 이씨는 “한글에 띄어쓰기가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대뜸 물었다.

“우리 고전(古典)에는 띄어쓰기가 없다. 일본도 구두점만 찍을 뿐이지, 서구적 의미에서의 띄어쓰기는 없다. 옛 한글학자들이 한글을 한문에서 독립시킨다면서 문법은 서양 것을 갖다 붙이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서양 문법처럼 그렇게 단어가 독립돼있는 것이 아니고, 결국 술어적으로 붙어있는 것이 기본 발상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띄어쓰기에 대해 조금 의문이 있는 입장이라고 질문했다.” 이어령 선생은 “그거 너무 엄청난 문제”라면서 “우리 발상의 언저리는 역시 술어적인 것이고, 그것이 지금의 한글로 얼마나 정리가돼있는지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답변했다. 이날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지지자가 된다.

이우환은 “1970년대 군정에 잡혀가 고문 당하고 감옥에 갇힌 사람들 앞장 서 변호하고 빼낸 게 이어령 선생”이라며 “선생은 문학·음악·미술 등 각계를 꿰뚫어 우리 문화가 나아갈 길을 정리하고 미지(未知)와의 연결고리를 평생 찾아오셨다”고 말했다. “일본이 축소지향이라면 우리의 반도 문화는 좀 더 열리고 중성적인 여러 가변성을 지녔다는 점을 파헤치고 다듬었다. 애국심이 워낙 강하신 분이었다. 글 마다 마지막에서는 ‘한국 사람’ ‘우리 역사’로 귀결됐다. 언젠가 프랑스로 보내주신 책을 읽고 이에 대해 투정했더니, 그 말을 책 광고에 넣으셨더라.”

이씨는 “선생은 전인적(全人的)인 학자였고, 프랑스의 앙드레 말로처럼 생각된다”면서 “마음 아프고 정말 애석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가는 것이니…”라며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