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유창순 롯데제과 회장이 1989년 2월 전경련 회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전경련 출입을 갓 시작했던 어느 기자가 문의를 해 왔다. 전경련 회장은 집무실이 몇 평이나 되며 승용차는 무얼 타느냐고 했다. 그래서 집무실은 없고 접견실이 있을 뿐이며 승용차는 롯데 것을 그대로 탄다고 했더니 의아해 했다.

'재계의 총리'라고 불리니 돈이 많은 전경련 회원들이 으리으리한 사무실을 제공하고 최고급 승용차로 모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소박한 접견실을 직접 보여주며 비상근, 무보수가 전경련 회장이 '재계의 총리'로 불리우는 명예의 원천이라고 했더니 그제야 납득하는 표정이었다. 

재계라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총리라는 가시적 지위를 합쳐 불리우다 보니 전경련 회장이라는 자리는 여론의 관심을 때로는 과도하게 받기도 하고 때로는 억울한 설화도 뒤집어 쓴다.     

더구나 언론이라는 세계와 담을 쌓고 기업 활동에만 전념해 온 기업의 오너 회장이 전경련 회장이 되면 기대도 크고 말도 많았다. 특히 평소 오너회장에 대한 취재기회가 거의 없던 일선 기자들의 욕심이 컸다.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초도 있었지만 전경련 회장이 아니면 할 수 없는 탁월한 업적을 언론과의 소통을 기반으로 해내기도 했다.

1981년에 신군부의 밀어내기를 뚝심으로 막아내며 전경련 회장 연임에 성공한 정주영 회장은 기자실을 자주 찾았다. 매주 수요일 오전에 사무실 업무보고를 받고 점심은 전경련 지하의 전경회관(불고기)이나 청엽(일식)에서 출입기자들과 가졌다. 기자들을 너무 자주 찾는 것 아니냐는 어느 간부의 지적에 정 회장은 "기업인들이야 잘못되면 돈을 잃으면 그만이지만 그 사람들이 잘못되면 나라를 잃어"라고 말했다. 그 얘기를 들은 전경련의 간부는 정 회장이 기자들을 통해 신군부와 메시지를 교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보수적 성향을 공유한 재계와 군부였지만 마땅한 대화 통로가 없으니 장외에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공감대를 형성한 곳이 정주영 회장이 매주 찾은 전경련 기자실이었다. 그것이 88올림픽을 유치하고 단군이래 최대 호황이었다는 3저 시대(1986~88) 경제 도약의 씨앗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정주영 회장이 전경련 기자실에서 언론과 함께 뿌렸다고 생각한다. 정 회장이 격의없었기에 기자들은 솔직했으며 이 진솔한 소통은 정부와 재계 사이에 신뢰의 바탕이 되어 경제 성장이라는 선물을 나라에 가져다 줬다. 

정주영 회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계는 정권 교대기에 항상 신정부와의 교감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어떤 식으로든 과거와의 단절을 꾀하는 새 정권의 시각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재계의 모습은 괘씸하기도 하고 두렵기까지 했을 것이다. 사실 정치에 휘둘리지 않고 일관된 모습으로 꾸준히 목표를 실행하는 것은 기업뿐 아니라 나라 운영에도 도움이 되는 원칙이다. 그래서 5년만의 적폐 청산이 예외가 되야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이것이 원칙이 돼 버렸다. 그러다 보니 갈등은 확산되고 경제에도 주름살이 생겼다. 갈등과 분열에 재계도 피해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정주영 회장의 뒤를 이어 재계의 총리로 구자경 LG회장이 1987년 취임했다. 구 회장은 무척 소탈하고 꾸밈이 없어 언론과의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민주화 초창기의 정치⋅사회적 여건은 너무나 예민했다. 평시라면 얼마든지 이해되고 넘어갈 수 있는 상황인데 당시의 상황에 비춰보면 폭탄 발언이었고 늘 설화에 휩싸였다. 기자 간담회에서 과격한 노동운동을 비판하다 노동조합에 공개사과하는 초유의 일도 있었다.

정부에도 쓴 소리를 하는 바람에 LG그룹은 초비상에 처했고 홍보실은 구 회장과 기자들 간의 만남을 차단하려고 까지 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소신 발언은 이어졌고 언론과의 직접 소통도 계속 됐다. 1988년 송년 기자간담회에서 터진 '정주영 회장 방북'발언도 그의 거침없는 화법에서 나왔다. 한번 입 밖에 나온 발언을 취소할 수도 없으니 그로 인해 전경련 홍보실과 LG그룹 홍보실이 대판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사전에 “오프더레코드”를 걸었다지만 전경련 회장과 기자 한 명이 만나면 특종이고 기자가 두명 이상이면 “오프”가 아닌 “오픈더레코드”가 되는 것이 언론의 세계였다. 그래서 장소를 가려 말을 해야하는데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구 회장의 어법에는 그게 없었다. 

2년의 단임으로 끝났지만 구 회장은 재임 중 전경련 주도로 한국 광고주 협회를 발족시켰다. 기업의 활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언론과의 소통을 위해서 였다. 구 회장은 협회 설립 계획을 보고 받으면서 회장 적임자를 고르는데 다소 시간이 걸린다는 사무국의 얘기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리고 보고자였던 조규하 전무를 그 자리에서 초대 회장으로 지명하고 한 달 이내 발족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1988년 9월 30일 지금의 광고주 협회가 출범했다.

재계가 기피 대상이었던 언론계와 국가 발전이라는 주제를 놓고 공개적으로 소통을 시작한 것은 구회장의 큰 업적이었다. 누가 무엇을 감추고 누구를 억압하는 관계가 아니라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 서로가 윈윈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재계의 총리'라는 전경련 회장은 재임 기간 중 언론과의 소통에서 예기치 못한 풍랑을 만나 큰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언론과의 소통은 나라나 재계의 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소신을 갖고 부단히 노력했다.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시장경제의 신뢰할만한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설정해 왔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전경련의 회장들이 겪었던 설화나 숱한 오보는 재계의 단련 과정이었던 것 같고 이 시련의 과정을 거치며 한국 경제나 기업들은 더욱 강해 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무보수, 비상근이었지만 '재계의 총리'라는 명예는 거저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출처 : 글로벌경제신문(http://www.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