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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신화의 주인공 이병철·이건희, 뚝심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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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형  언론인·‘한국의 명가’ 근현대편 저자 2021-11-08 오전 9:54:13

 
 

   호암 이병철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태어남
   1926년 박두을(박팽년의 후손)씨와 결혼
   1929년 중동중학 4년 수료
   1931년 일본 와세다대 정경과 중퇴
   1938년 삼성상회 설립
   1951년 삼성물산 설립
   1961년 한국 전경련 회장 취임
   1969년 삼성전자 설립
   1987년 11월 19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
   

   

   

   이건희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남
   1949년 서울 혜화초등학교 입학
   1961년 서울사대부고 졸업
   1965년 일본 와세다대 상학과 졸업
   1966년 미국 조지워싱턴대 대학원 수료
   1967년 홍라희씨와 결혼
   1966년 중앙일보·동양방송 이사
   1987년 삼성그룹 회장 취임
   2020년 10월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 별세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은 6·25전쟁 후 폐허가 되다시피 한 한국을 첨단 정보기술국가로 도약시켜 ‘한국 재계의 얼굴’로 우뚝 선 기업인이다. 호암의 아들 이건희(李健熙)는 호암이 창업한 한국 제일의 삼성그룹을 이어받아 세계 굴지의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주인공으로 꼽히고 있다.
   
   이들 부자는 재계·언론계·학계 저명인사 200명이 선정한 ‘한국을 빛낸 23명’에 선정되었으며, 특히 호암은 대한민국 발전에 공이 큰 1등 기업인으로 추앙받기도 했다.(월간조선 2003년 설문조사) 호암은 호수처럼 맑은 물을 잔잔하게 가득 채우고, 큰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준엄함을 뜻하는 그의 아호이다.
   
   호암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이찬우(李纘雨)와 권재림 사이의 2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이홍석은 서문에 능해 문산정(文山亭)이라는 서당을 세웠는데 호암은 6세 때부터 5년여 동안 이곳에 다녔다. 남들은 두세 달이면 마치는 ‘천자문’을 호암은 1년여 만에 간신히 끝냈다. 서당 훈장은 학식이 높은 문산 선생의 손자답지 않다며 더 노력하라고 핀잔을 주었다. 훈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당 아이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자존심이 상한 호암은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했고, 5년 만에 ‘자치통감’과 ‘논어’ ‘사서삼경’ 등을 줄줄 외우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논어’는 호암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논어’는 인간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인생지침서였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호암은 한번 싸움이 붙으면 아무리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몸집이 커도 집에까지 쫓아가서 무릎을 꿇리고 말았다.
   
   호암의 조부는 이재에도 소질이 있어 천석의 가산을 모았다. 외아들 이찬우 대에 이르러서는 2000석을 거둬들일 정도로 번성했다. 독립운동 자금도 댔던 이찬우는 일찍이 초대 대통령 이승만과 사귄다. 청년기에 상경해 독립협회 회원들과 행동을 함께하며, 기독교청년회에 출입하면서 동갑내기인 이승만 박사를 알게 된 것이다.
   
   
▲ 1983년 당시 ‘애플’의 28살 사장이었던 스티브 잡스(왼쪽 두 번째)는 최신 메모리 반도체를 얻기 위해 한국을 찾아 당시 이병철 삼성 회장(왼쪽)을 만났다.

   우남 이승만과의 인연
   
   이런 인연으로 호암은 광복 후 우남 이승만과 자주 만날 수 있게 된다. 우남이 대구를 찾았을 때 호암은 자신이 이찬우의 아들임을 밝혔고 반갑게 맞이한 우남은 “서울에 오면 찾아오라”고 했다. 이듬해 호암은 이화장으로 우남을 찾아갔다. 약속된 만남이 아니었음에도 우남은 호암을 맞아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1960년 새해를 맞아 호암은 대통령이던 우남을 경무대로 찾아가 사업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때도 이 대통령은 호암을 친자식처럼 반갑게 맞았다.
   
   당시 호암은 이 대통령에게 5000만달러 규모의 비료공장을 정부 돈은 한 푼도 안 쓰고 유럽에서 차관을 얻어 건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군. 역시 이 사장이야. 훌륭해. 이 사장만 믿을 테니 반드시 성사시키도록 하게. 정부에서도 적극 지원해 주겠네.”(‘이병철, 거대한 신화를 꿈꾸다’·김찬웅)
   
   이 대통령은 흔쾌히 호암이 들고 간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호암은 1922년 3월 진주 지수보통학교에 편입했다가 같은 해 9월 서울수송공립보통학교로 전학한다. 둘째 누나인 이분시가 이발소로 데려가 긴 댕기머리를 싹둑 자르면서 호암은 개화 공부를 시작했다. 1925년 서울중동중학교 속성과에 편입하며 이듬해 본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다니던 이듬해 가을 호암은 부친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너의 혼담이 이루어져, 혼례를 올리게 되었으니 귀가하라’고 적혀 있었다. 18세를 맞던 해 겨울 호암은 경북 달성군 묘동에 사는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결혼한다.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신부에 대해 ‘호암자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처음 마주 본 인상은 건강한 여성이라는 것이었다. 유교를 숭상하는 가문에서 전통적인 부덕을 배우고 성장해서 그런지, 바깥 활동은 되도록 삼가고 집안일에만 전심전력을 다해왔다. 예의범절에도 밝아 대소가(大小家)가 두루 화목하다. 지금까지 몸치장, 얼굴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본 일이 없고 사치와는 거리가 멀다.’
   
   호암의 장자 이맹희는 그의 자서전 ‘묻어둔 이야기’에서 외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친가 쪽도 이미 3000석 지기에 가까울 정도의 부자였지만 외가 쪽의 지체가 높아서 한쪽으로 기우는 혼사였다는 말들이 있었다는 게 집안 어른들의 설명이었다. 어머니는 시집올 때 몸종을 비롯해 하인 몇 명을 데리고 왔다고 한다.’
   
   호암의 학창시절 학업성적은 50명 학급에서 35~40등 수준이었으나 산술만은 늘 상위였다. 이맹희 자서전에 의하면 호암은 3자리(100단위)의 곱셈 정도는 암산으로 했고, 임원들이 숫자를 한 번 보고하면 절대 잊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 1938년 이병철은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설립했다.

   일본인에 받은 굴욕을 사업보국으로
   
   호암은 1929년 10월 부산항에서 시모노세키로 가는 배를 타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배 안에서 같은 고향 출신인 안호상(초대 문교부 장관 역임)을 만났다. 파도가 거세게 일면서 배멀미가 고통스러워 이등선실을 나와 일등선실로 다가서는 순간 입구에 있던 일본인 형사가 그들을 막아서며 “너희 조센징이 무슨 돈이 있어 일등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구나”라고 야단쳤다. 이 순간 호암은 일본 형사에게 받은 굴욕감과 수치심을 반드시 갚겠다고 결심한다. 사업보국으로 반드시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를 이룩하겠다고 굳게 다짐한다.
   
   1930년 4월 호암은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경과에 입학한다. 이 시기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강의를 들으면서, 소설은 물론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 ‘자본론’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다. 강의에 집중하려고 앞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남들보다 일찍 등교하는 날도 많았다. 그런 한편 틈만 나면 일본의 크고 유명한 공업시설을 견학하면서 후일 사업가로서의 안목을 키웠다. 그러나 각기병에 걸려 호암은 눈물을 머금고 학업을 중단하고 이듬해 9월 고향으로 돌아온다.
   
   호암의 학력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 과정 모두 중퇴로 마감하는 바람에 정식 졸업증서가 없다. 훗날 중동중학교에서 명예졸업장을 받았을 뿐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망설임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호암에게 학교 졸업장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유학생활에서 우리의 잘못된 관습도 눈에 들어왔다. 그중의 하나가 노비제도. 그는 집에 얽매어 있던 노비들을 풀어달라고 간청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후 고향에 돌아온 호암은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고 친구들과 놀음판을 벌이면서 실의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날, 어느덧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된 호암은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뜻을 세우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호암은 부친에게 사업을 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300석의 재산을 타내 마산으로 가서 친구 두 명과 함께 1936년 3월 협동정미소를 차린다. 하지만 극심한 불황 때라 우선 곡물을 확보하기 위해 인천 곡물거래소 매매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본다. 호암은 왜 손해가 났는지 곰곰이 따져보고 이전과는 반대로 값이 오를 때는 팔고, 내릴 때는 사들여 크게 이익을 남긴다.
   
   정미소 사업에 성공한 호암은 이해 8월 히노데(日出)자동차를 인수해 트럭 20대로 운수업을 벌이며, 1937년 토지사업을 확장하여 200만평(660만㎡)을 가진 대지주가 된다. 이듬해 자본금 3만원으로 대구시 수송동에 삼성상회를 설립한 후 조선양조를 인수했다. 1945년 10월 광복 후에는 대구민보 경영에도 참여한다.
   
   
▲ 1985년 반도체 생산라인을 둘러보는 호암.

   국내 첫 사원 공채 시험 실시
   
   1948년 11월 서울 종로 2가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하고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 등지와 무역 거래를 했다. 사장인 호암이 75%의 돈을 대고 전무 조홍제(후에 효성그룹 창업), 상무 김생기(후에 영진약품 창업) 등이 나머지 25%를 냈는데 2년이 채 안 된 1950년 초 전국 무역업체 중 랭킹 1위를 차지한다.
   
   1950년 6·25전쟁 중에 호암은 피란을 못 가고 복통으로 몸져누운 상태에서 피신했다가 12월에 대구로 돌아왔다. 이듬해 임시 수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했고, 1953년 제일제당을, 1954년에 제일모직을 잇달아 설립했다. 전시체제하에서 국민 생활에 가장 긴요한 물품생산이 뭔지를 깨닫고, 우선 수입 대체산업부터 일으키기로 한 것이다.
   
   1957년에는 국내 최초로 사원 공개채용 시험을 실시했고 한일은행, 안국화재, 조흥은행 등을 잇달아 인수했다. 또 호남비료, 한국타이어, 삼척시멘트 등의 주식도 사들여 여러 기업의 대주주가 됐다. 이때부터 호암은 ‘한국 최초의 재벌’ ‘한국 제일의 기업주’로 불린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일본에 머물던 호암은 급히 귀국하여 군부 실세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등에게 재계 대표로서 경제개발계획 방안과 재계의 협조책을 제시해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낸다. 이런 노력을 통해 부정축재혐의로 구속된 경제인 11명을 석방시킨 데 이어 한국경제인협회(지금의 전경련) 초대회장에 취임한다.
   
   
▲ 1983년 삼성반도체통신 기흥공장 건설현장을 찾은 호암과 이건희.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호암은 그 후 1964년에 동양방송 TBC를, 이듬해에는 중앙일보를 세우는 등 미디어사업도 벌인다. 그러나 당시 가장 높은 시청률을 보였던 TBC는 19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통폐합되었고, 중앙일보는 1999년에 삼성에서 떨어져 나왔다.
   
   호암은 1966년에는 느닷없이 터진 사카린밀수사건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을 뻔한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그때 호암은 자신의 돈으로 한국비료를 완공해 국가에 헌납하기로 한다.
   
   “하지만 한 번도 나라를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호암은 늘 ‘나라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다. 캄보디아, 베트남을 보라. 나라가 부강해야 기업도 잘될 수 있다. 나는 항상 나라 걱정을 하면서 삼성을 경영해 왔다’며 사업보국을 강조했다.”(‘이병철, 거대한 신화를 꿈꾸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겪으며 호암은 우리나라의 취약한 경제체질을 실감한 데다, 1976년 위암 수술 후 투병생활을 하며 기업과 국가를 위한 마지막 봉사로 반도체 사업에 승부를 걸기로 한다. 호암은 선우휘 조선일보 논설고문과의 대화(월간조선 1984년 신년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톤당 부가가치를 보면 철은 340달러, 석탄 40달러, 알루미늄 3400달러, 텔레비전 2만1300달러, 반도체는 85억달러, 소프트웨어 426억달러, 뮐 해야 할 건지 분명하게 안 나오느냐 이거지.”
   
   그러나 1983년 호암이 도쿄에서 만난 수많은 반도체 전문가와 사업가들 대부분은 반도체 사업에서 지금 손을 떼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반도체는 생산 원가에도 못 미치는 선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재고품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때문에 삼성 임원들도 완강히 반대했다. 임원들이 위험한 선택이라고 반대할 때마다 호암은 강하게 말했다.
   
   “사업에는 항상 위험이 따릅니다. 그 위험을 이겨내야만 삼성의 미래가 열립니다.”
   
   호암은 반도체 사업 육성을 통해 국민기업으로서 틀을 다지고, 세계적 기업의 위상을 확립한다. 호암은 1987년 11월 19일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용인군 호암미술관 인근 선영에 안장됐다. 그가 숨진 내실 벽에는 ‘空手來空手去’(공수래공수거·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란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삼성물산 설립 다음 해인 1952년 호암과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건희.

   호암이 다지고 이건희가 꽃피우고
   
   호암의 지인들은 호암의 판단에 공감하고 반도체·컴퓨터 사업에 열의를 보인 자식은 3남 이건희뿐이었다고 꼽고 있다. 관련자들은 오늘의 삼성전자가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세계 1위 자리에 오른 것은 호암과 아들 이건희 회장의 합작품이라고 설명한다. 호암이 다진 기반 위에 이건희 회장이 꽃을 피웠다는 것이다. 다음은 강진구 삼성전자 전 회장의 설명이다.
   
   “1974년에 이건희 당시 부회장은 부도가 난 한국반도체를 인수하여 반도체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선대 회장에게 건의했습니다. 선대 회장은 회사 규모가 너무 작아 인수를 꺼리자 이건희 회장이 ‘반드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한다’며 중요성을 역설했고, 개인자금을 동원해 이 회사를 인수했습니다. 이건희 회장은 ‘전자회사가 반도체를 안 하면 엔진 없이 자동차 사업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월간조선·2003년)
   
   이건희는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호암과 박두을 사이의 3남5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는 주로 까만 고무신을 신고 다녔는데, 어쩌다 흰 고무신이 생기면 아끼려는 마음으로 한구석에 숨겨 놓았다고 한다.
   
   호암이 1947년 대구에서 상경하여 사업을 확장함에 따라 이건희는 1949년 종로구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한다. 6·25전쟁 후에는 집안을 따라 마산에서 다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대구로 전학했고 이어 부산에서도 두 번 전학을 했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시절, 4~5학년을 함께 다녔던 권근술 전 한겨레신문 사장의 회고다.
   
    “건희가 천장에 매달면 끈을 물고 빙빙 돌아가는 비행기, 레일 위를 달리는 모형기차 등 당시로서는 구경하기도 힘든 장난감을 가져와서 함께 놀던 생각은 나는데, 말이 없고 장난도 잘 치지 않는 아이라 다른 기억은 거의 없다.”(‘이건희’ 홍하상)
   
   어린 이건희에게 장난감들은 갖고 노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뜯어보고 다시 복원하는 과학 탐구의 대상이었다. 이 같은 취미는 그가 반도체 사업을 떠맡아 경영할 때까지도 줄곧 지속되어 그는 카메라를 뜯어보기도 하고 VTR, 심지어는 자동차까지도 뜯었다가 조립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됐다.
   
   이건희는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때 도쿄로 유학을 가 와세다대학에 다니던 둘째형과 생활하며 도쿄의 초등학교에 다녔다. 처음 1년 동안 일본어를 배우느라 고생했는데 객지생활의 외로움을 영화 보기로 달랬다. 유학 시절 무려 1200~1300편에 이르는 영화를 본 꼬마영화광이었다. 수요일이나 토요일 오후, 일요일이나 쉬는 날에는 종일 밤 10시까지 샌드위치를 사먹으면서 영화를 본 날이 많았다.
   
   이건희는 초등학교 2년과 중학 1년을 합쳐 3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계 프로레슬러 역도산에 심취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서울사대부중에 편입했고 사대부고에 진학했다. 사대부고에서는 레슬링부에 들어가 2학년 말까지 웰터급 선수로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기도 한다. 체육인으로서의 그의 꿈은 1996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화려하게 성취된 셈이다.
   
   
   레슬링으로 단련한 체력
   
   그가 이틀씩 밤을 새우고 10시간의 마라톤회의를 할 수 있었던 것이나 골프장에서 무려 1500개의 공을 치면서 연습에 몰두할 수 있었던 것은 레슬링으로 단련된 체력 덕분이다. 그가 즐겨 하는 운동은 골프, 승마, 탁구 등이었다.
   
   1987년 호암의 뒤를 이은 이건희 제2대 삼성그룹 회장은 과감한 투자와 혁신, 1등 품질주의로 삼성전자를 ‘세계 1위 전자회사’로 이끌었다. 세계경제에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던 변방 한국 기업이 글로벌 1위 기업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이를 현실화한 혁신적 기업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2의 창업을 위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삼성전자 임원들을 소집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라는 파격적인 신경영선언을 하기도 했다.
   
   “한 명의 천재가 20만명을 먹여살린다”며 ‘인재 경영’을 강조한 이 회장은 IOC 위원으로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도 큰 몫을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증으로 의식을 잃었고 6년5개월 동안의 투병 끝에 2020년 10월 25일 서울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별세하여 경기도 수원시 선영에 안장됐다. 그는 유산 26조원 중 60%를 사회에 환원하였으며, 감정가 1조원이 넘는 국보·보물 문화재 60건 등 이건희 컬렉션을 내놓아 국민을 감동시켰다.
   

   내가 본 호암 이병철과 이건희
   호암의 합리주의에 이건희 세계화 접목시켜
   

최종태 서울대 경영대 명예교수

호암 이병철은 기업을 통하여 국가와 인류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지사적 기업관을 가진 인물이다. 호암은 사업을 추구함에 있어 사업보국의 자세를 가짐과 동시에, 내적인 경영관리에 있어서는 합리성에 바탕을 둔 제도적 관리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조직의 삼성’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 또 인재를 중시하는 경영관리를 해왔다.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을 육성하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호암이 합리주의적 경영자라면 이건희는 그러한 합리주의에다 기업의 세계화를 체계적으로 접목시킨 경영자라고 하겠다. 별세한 호암의 뒤를 이은 그는 기업의 수성에 그치지 않고 ‘매출액 50조원’ 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실적을 바탕으로 1993년 이후 국내 전 부문에 큰 충격을 던진 ‘이건희 선언’을 주창했다.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보자”면서 신경영을 위한 발상의 대전환을 요구한 것이다. 21세기 세계에서는 세계 초일류, 세계 유일의 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다. 기업인으로서의 이건희는 호암의 보국기업관에 이어, 기업의 이윤만을 추구하지 않고 소비자 대중의 행복과 건강한 사회를 지향해 왔다고 본다.
   

   

   호암 이병철·이건희의 가계
   
   호암은 박두을씨와 사이에 3남5녀를 두었다. 장남 맹희(작고·도쿄농대 졸업, 미시간주립대 공업경영학 박사, 삼성그룹 부사장 역임)씨는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의 장녀 손복남(작고·이화여대, 미시간주립대 아동복지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2남1녀를 두었다. 장녀 미경(63·하버드대 석사, 상하이 푸단대 역사교육학 박사)씨는 CJ그룹 부회장이다. 장남 재현(61·고려대 법대 졸업)씨는 CJ그룹 회장으로 김희재(61·이화여대 장식미술과 졸업, 김만조 전 연세대 교수 딸)씨와 결혼했다. 차남 재환(59·재산커뮤니케이션즈 대표)씨는 민재원(52·민기식 전 국회의원 딸)씨와 결혼했다.
   
   호암의 차남 창희(작고·와세다대 졸업, 새한미디어 회장 역임)씨는 이영자(84)씨와 결혼하여 3남1녀를 두었다. 장남 재관(59)씨는 전 새한그룹 부회장으로 김희정(56·동방그룹 김용대 회장 딸)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재찬(작고)씨는 전 새한미디어 대표이사로 최선희(55·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딸)씨와 결혼하였고, 3남 재원(56)씨는 전 새한정보시스템 대표이사로 김지연(53·김일우 서영주정 회장 딸)씨와 결혼했다. 딸 혜진(54)씨는 래딕스글로비스 대표인 조명희(58·디엠퓨어텍 대표·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 아들)씨와 결혼했다.
   
   호암의 3남 건희(작고·와세다대 졸업)씨는 삼성전자 회장으로, 법무부 장관과 내무부 장관을 지낸 홍진기씨의 장녀 라희(76·서울대 응용미술학과 졸업)씨와 결혼하여 1남3녀를 두었다. 장남 재용(53·서울대 동양사학과 졸업·게이오의숙대학원 경영학 석사)씨는 삼성전자 부회장이며, 장녀 부진(51·연세대 아동학과 졸업)씨는 호텔신라 사장이며, 차녀 서현(48·미 파슨스디자인스쿨 졸업)씨는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으로, 김재열(53·스탠퍼드대 MBA·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의 차남)씨와 결혼했다. 재열씨는 삼성경제연구소 글로벌전략실장 사장직을 맡고 있다.
   
   호암의 장녀 인희(작고·이화여대 가정과 중퇴, 한솔 고문 역임)씨는 조운해(96·경북대 의대 졸업·강북삼성병원 이사장 역임)씨와 결혼하여 3남2녀를 두었다. 장남 조동혁(71)씨는 한솔 명예회장으로, 이정남(68·이창래 서우통상 회장 딸)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남 동만(68)씨는 한솔아이글로브 회장으로, 이미성(65)씨와 결혼하였고, 3남 동길(66)씨는 한솔그룹 회장으로, 안영주(63·안영모 전 동화은행장 딸)씨와 결혼했다. 장녀 옥형(61)씨는 권대규(64) HS창업투자 부사장과 결혼하였으며, 차녀 자형(60)씨는 빈센트 추(62·대만계 미국인)씨와 결혼했다.
   
   호암의 차녀 숙희(86)씨는 구자학(91) 아워홈그룹 회장과 결혼하였으며, 3녀 순희(83)씨는 김규 전 서강대 교수와 결혼했다.
   
   호암의 4녀 명희(78·이화여대 졸업)씨는 신세계그룹 회장으로, 정재은(82·컬럼비아 대학원 졸업·조선호텔 명예회장)씨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었다. 아들 용진(53·미 브라운대 경제학과 졸업)씨는 신세계그룹 부회장으로, 플루티스트 한지희(41·빈국립음대 예비학교 졸업·한상범 전 대한항공 부사장 딸)씨와 결혼하였으며, 딸 유경(49)씨는 ㈜신세계 부사장으로 경기초교 동창 문성욱(49·시카고대 경제학과 졸업·신세계인터내셔널 부사장)씨와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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