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권오용 한국가이드스타 상임이사.

끝내 우리는 백신없이 이 겨울을 지내게 됐다. 백신 개발에 돈을 댄 나라도 아닌 이스라엘은 총리가 1차로 백신을 맞고 싱가포르에도 백신 1차분이 도착했다는 외신을 접하니 새삼 ‘백신디바이드’가 실감난다. 강 건너 남의 집 잔치를 구경만 하는 처지가 된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해 2월 13일 경제계와의 간담회에서 “코로나는 머지않아 종식될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일상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판단에서 한 말”이라고 부연설명 했다.

 

이어 5월 10일 취임 3주년 특별연설에서는 “우리는 방역에서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됐으며 바이러스 확산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했다. 10월 19일엔 “최근 방역 상황이 안정화되고 있다”고 했다. 직전에 이미 정부는 거리두기를 1단계로 내리고 쿠폰 발행을 재개했었다.

또 11월 21일 G20 화상 정상회의에서 “한국은 신속한 진단검사와 역학조사로 확산을 막았다. 한국의 경험이 세계 각국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2월 9일에는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는 말을 세 번이나 되풀이 했다. 

돌이켜 보면 대통령은 K방역에 대해 무모하리만큼 자신감을 표출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대통령은 ‘방역비상상황’이자 ‘절체절명의 순간’이라고 했다. 긴 터널의 끝이 보인다고 하고서 불과 사흘 뒤의 발언이었다. 대통령 발언의 무게를 생각하면 낙관론은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었을 테고 함부로 나오지도 못했을 거다. 그 동안의 정황을 복기해 보면 대통령의 낙관론은 충분히 납득이 된다. 

 

미국이나 유럽에 비해 우리나라의 확진자 수는 다소 굴곡은 있어도 안정적으로 관리됐다. 국민들도 마스크쓰기나 거리두기에 저항감 없이 협조를 했다. 거기에 한국 기업들의 뛰어난 제조 능력이 보태졌다. 배급제로 시작됐던 마스크의 절대 부족 현상은 오히려 남아도는 마스크를 걱정할 정도가 됐고 진단키트는 불티나게 수출됐다.

드라이브스루 같은 창의적 기법은 전 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SK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의 제조를 위탁받았고 셀트리온의 치료제는 1월이면 시판된다는 전망마저 있었다.

주가지수는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GDP성장률은 플러스로 반전했다. 모든 게 예상 이상으로 돌아가면서 결국은 코로나도 초기 같은 혼란은 없이 안정적으로 관리 될 거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낙관적으로 다소 느긋한 입장에서 정부는 외국기업들과 백신 도입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간 중간 전해지는 대통령의 발언은 협상에 임하는 실무진의 입장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줬을 것이다. 신종플루 백신을 구하기 위해 장관이 외국 기업에 사정을 했던 2009년의 모습은 추억으로만 남았다. 일 안한 공무원은 처벌받지 않았고, 반대는 징계받았던 경험만 실무진에 축적돼 있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기업과의 구매협상은 가격, 물량이 핵심조건이고 여기에 시간과 책임소재 등 부대조건이 따라붙는다.

우선 가격에서 화이자, 모더나는 4만원(40달러 내외), 아스트라제네카는 8000원(8달러 내외). 5000만 국민을 모두 맞추면 화이자, 모더나는 2조원이 들고 아스트라제네카는 4000억원이다. 같은 조건이라면 화이자는 폭리를 취하는 셈이고 우리 국민은 바가지를 쓰는 셈이다. 우리 정부의 방식대로 하면 화이자 가격은 공정하지 않고 우리 국민은 선의의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공무원들의 눈에는 착한 가격이 필요했다. 

물량도 변수였다. 우리정부는 충분한 만큼이 아니라 필요한 만큼의 물량을 원했을 것 같다. 신종플루 백신의 경우 2400만 명분 중 700만 명분이 남았다. 충분한 양을 확보했는데 감사원 감사에서 필요 이상으로 구매해 예산을 낭비했다며 실무자는 징계 직전까지 갔다. 당시 전재희 장관이 커버하면서 실무자는 징계를 모면했다. 남아도 모자라도 비싸도 징계대상이었다.

결국 가격과 물량을 놓고 보면 우리는 착한 가격에 필요한 만큼만 요구했을 것 같고 그 새 외국 정부는 정보기관까지 동원해 업체가 제시한 가격으로 물량을 싹쓸이 해 갔다. 정보전에서까지 완패였다. 
 
 가격과 물량에 더해 공무원들의 보신주의를 자극한 것은 면책조항, 외국 제약사들은 계약 과정에서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손해배상을 면책해 달라고 모든 나라의 정부에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작용 면책조항이다. 정부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심각한 불공정 약관이자 계약이다. 지금 당장이야 따지지 않겠지만 언제 적폐로 몰릴지 알 수 없는 것이 최근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정부는 국내에서는 기업에 대해 항상 갑이었다. 기업은 원래 거짓말을 잘하고 엄살이 심하니 착한 정부가 버르장머리를 고쳐줘야 했다. 기업규제 3법이니 노동법에서 기업을 보는 눈은 항상 이러했다. 우리나라 기업은 우리나라에서만 돈을 버는 것 같이 생각했다. 그

런데 외국 기업들은 달랐다.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닌 대등한 파트너로서 공정한 협상을 원했다. 혁신의 대가인 많은 이윤을 원했고 충분한 물량을 원하는 다른 시장을 선택했다. 제대로 된 기업관을 가진 나라의 국민들은 성탄절에 백신을 선물로 받았다. 왜곡된 기업관이 팽배한 우리는 백신 없이 추운 겨울을 지내게 됐다.

 기업의 경영활동을 시장 친화적으로 이해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통제와 규율이 아닌 소통하고 협력하는 정부와 기업의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이 밀어주고 끌어주며 서로가 선물을 주고받는 그 날, 백신이 없던 그 겨울은 즐거운 추억으로 회상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