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망울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14 박연우 님의 글)

by hs4411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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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목련꽃망울은 터지지 않았다.


며칠 전 봄비가 살짝 지나간 후에 마당에 목련 가지 끝마다 꽃눈이 도드라지게 부풀어 오르더니 이틀 전 토요일 저녁에 조금 한가한 마음으로 유심히 드려다 볼 때에는 하얀 꽃망울이 손톱 끝만큼 뾰족이 삐져나와 있었다.


 


어제 일요일 아침, 평소보다 늦으막한 아침잠을 즐기고 밥을 먹은 뒤, 마당 좀 쓸어 달라는 마누라의 주문을 뒤로 미룬 채 배낭을 꾸려 마당으로 나와 살피니 밤사이 벌써 꽃망울이 손가락 한마디만큼 자라 있었다.


해마다 봄은 오고 해마다 꽃은 피건만 매년 이맘때 쯤 돋아 오르는 마당의 목련꽃망울은 그때마다 정답고 아름답다.


 


일요일이면 항상 어울려 산을 오르던 친구들이 어제는 웬일로 제각기 다 일이 있다며 한사람도 같이 갈 사람이 없으니 이 좋은 봄날에 아무리 마누라가 무서운들 아침부터 마당이나 쓸고 있을 수는 없고 혼자라도 산을 올라야겠다.


 


몇 달 전에 아들 녀석이 미국에서 사 온 위스키를 반 병 쯤 물병에 따라 붓고 라면에 부을 물을 뜨겁게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으며 미리 사 둔 치즈 한 덩어리를 배낭에 꾸려서 나서려던 참이다.


동네 슈퍼에 들려 라면을 사렸더니 빨갛게 잘 익은 방울토마토 눈에 들어온다.
안주로 치즈만 먹기에는 좀 느끼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마침 잘 됐다하고 얼른 집어 들고 보니 혼자 먹기에는 좀 많은 양이다.


그러나 뭐 좀 남겼다가 마누라를 갖다 주면 마당 쓸라는 분부를 어긴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다 사버렸다.


그리고 등산회장인 내가 사전 답사를 겸하여 가까운 북한산을 구기터널 쪽에서, 그러나 쉽고 새로운 코스로 잡아 오를 요량으로 길을 잡았다.


 


동창 할아범들과 할멈들은 나부터도 그렇지만, 아직도 쌩쌩한 몇 사람을 빼면, 나이 먹은 탓인지 높고 가파른 산은 좀처럼 안 올라가려 하고 경치보다는 쉽고 덜 힘든 코스만을 좋아한다.


그래서 잡은 길이 구기터널 위의 능선과 탕춘대 능선을 연결하는 등산로를 속으로 어림하고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등산로 입구, 가지만 남은 사시나무 높은 꼭대기에 드문드문 올라앉은 까치집이 봄볕을 받아 더욱 까맣게 보이는데 그런 까치집을 바라볼 때면 왜 그런지 항상 마음이 포근해 진다.


 


등산로는 예상했던 대로 그다지 힘들지 않았고 다른 길에 비하여 사람이 그다지 많지도 않았으며 잘 닦여진 길을 따라 중키의 소나무들이 참나무, 물감나무 등 잡목들과 어울려 그런대로 근사한 풍치를 이루고 있다.


양지바른 등산로 여기저기에 분홍색 진달래가 벌써 망울이 졌고 성질 급한 놈은 일찌감치 활짝 꽃잎을 펴고 웃고 있다.


춥지 않은 겨울을 보낸 꽃들이 봄을 일찍 당겨 맞아 복에 겨운 웃음을 띠우고 있는 것이다.


 


탕춘대 능선과 만나는 길에서 사람이 갑자기 많아지는데 군데군데 허물어진 고졸한 성벽의 빛깔 우중충한 돌길 위를 걷는 젊은 아줌마들의 화려한 등산복 색깔이 더욱 돋보인다.


탕춘대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향로봉으로 올라가는 본격적인 등산이 시작되는데 보나마나 할멈 할아범들이 어려운 등산은 싫다 할 테고 시간을 보니 벌써 한 시간 이상을 걸었다.


쌩쌩한 몇 사람만 가겠다면 향로봉을 올라갔다 내려와서 점심 먹는 자리에 합석하면 될 것이다.


슬그머니 옆으로 빠지는 8부 능선 길로 접어들어 안내 표지를 보니 그게 바로 구기터널 입구 계곡으로 빠지는 길이다.


 


이 길이라면 내가 아주 잘 아는 길이다.
아주 오래 된 얘기지만 아이들 어렸을 적에는 가족들과 함께 쌀과 반찬을 가져와서 약수 물 을 떠서 밥도 해 먹고 그러던 계곡이다.


이제 슬슬 내려가다가 약수터 근처에 그럴듯한 곳에 자리를 잡으면 된다.


 
막상 약수터에 가보니 약수는 말라서 10분은 기다려야 겨우 한바가지나 받을 정도로 찔끔거리고 그나마 근처에는 사람도 많아서 혼자 앉아 술 상 펴기도 좀 계면쩍다.


다시 어슬렁어슬렁 내려가다가 좀 후미지고 사람 눈에 잘 안 뜨이는 장소에 자리를 펴고 가져온 술과 안주를 꺼내어 술 한 잔에 치즈 한 입, 그리고 방울토마토 한 개 씩을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아주 규칙적으로 먹는다.


아무래도 위스키 반병을 혼자 앉은 자리에서 다 먹기는 좀 무리인 듯해서 술과 안주를 조금 남겨 둔 채 라면에 물을 붓는다.


산에서 먹는 왕뚜껑 라면 맛이 또한 일품이다.



주섬주섬 자리를 치우고 일어서니 시간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바로 내려가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에 능선 하나를 더 넘어 다음 계곡으로 하산하는데 흐르는 계곡물이 보일쯤에 양지바른 언덕바지에 핀 진달래꽃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 보인다.


바쁠 것도 없는 날인데 즐길 때까지 즐겨보자는 생각에 진달래 옆에 자리를 잡고 먹다 남은  술과 안주를 다시 꺼내 먹다보니 마누라 주리라고 생각했던 방울토마토까지 모조리 다 먹어 치우게 됐다.


그러면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진달래 그루터기에 붙어 있는 황갈색 참나무 낙엽 위에 반짝 부서지는 봄 햇살이 참 유정하다.


 


다시 일어서서 독박골 동네 입구에 다다르니 불광사(佛光寺) 표지판이 눈에 띈다.
햇볕 좋은 봄날 오후에 한적한 절 뜰을 거닐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발길을 돌렸다.


절 바로 앞에까지 아파트 공사로 시끄럽고 어수선한데도 높직이 자리 잡은 절은 그윽한 분위기와 품위를 잃지 않고 있고 절 앞 참나무에도 까치집이 걸려 있는데 그 아래 공사장에서 솟아오른 타워 크레인 끄트머리가 까치집을 부수지 않을까 아슬아슬하다.


 


이래저래 산에서 내려온 시간이 오후4시가 좀 넘었고 저녁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목욕탕에서 목욕까지 끝냈더니 5시, 아무래도 라면하나로 때운 점심이 좀 부실했던지 슬슬 시장기가 당긴다.


잘하는 해장국 집에 들려 뼈다귀 한 덩어리를 추가해서 소주 한 병을 또 시켰다.



어지간히 취해서 집에 들어와서도 기나긴 봄날이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다.


마누라 눈치 볼 것 없이 배낭을 벗어 놓는 즉시. 빗자루를 거머쥐고 솨악솨악 마당을 쓸기 시작했다.
마누라 잔소리 할 틈을 주지 않고 마당을 쓰는 데야 제가 어쩌랴.


슬그머니 쓰레기봉투를 가져와서 주둥이를 벌려서 쓸어 모은 낙엽을 부삽으로 떠 담는 것을 도우며 낮 동안 걸려왔던 아들의 전화 얘기며 외손자가 순해서 벌써부터 제 여동생에게 진다는 둥 얘기가 제법 다정하다.


얕은 담장 너머로 앞집 과부 아주머니가 부러운 듯 힐끔거리며 마당을 스쳐 지나간다.


 


하루 종일 산엘 오르고 술 두병을 마시고 절구경과 목욕까지 마치고 그리고 마당을 쓸었다.


그리고도 기나 긴 봄날의 해는 남아 목련나무가지를 보니 꽃망울이 조금 커지기는 했어도 뾰족한 망울이 아직 터질 기미는 없다.


사실 목련꽃은 순백의 꽃망울이 볼록할 때가 제일 아름답지 일단 활짝 피고 나면 바로 칙칙한 색깔로 물들어 가며 떨어지는 모습이 아마도 꽃 중에서 지는 모습이 가장 흉한 모양이 아닐까 한다.
그 목련꽃망울이 아직 터지지 않고 있으니 그것이 터지기 전까지 나의 봄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마음은 항상 봄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07. 3.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