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에서 지상으로
오 세 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요한복음 12장 24절
태평양을 건너 전해진 김 동문의 부음은 참으로 뜻밖인, 커다란 충격이었다. 공관에 근무하는 아들내외도 볼 겸 떠난 미국여행에서, 갑작스러운 뇌출혈을 일으켜 수술을 받은 그녀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많은 이의 기도도 헛되이 동문은 20일 만에 이승을 하직했다. 운명한지 10일후 그녀는 안타까운 주검으로 말없이 고국으로 운구되어왔다.
그녀의 부음을 접하는 순간, 나는 지난 7월 사진반을 따라 방태산 출사에 나섰다 개울에 빠지는 바람에 운동화와 양말을 삼각대에 끼워 메고 맨발로 산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장난스럽게 웃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얼핏 떠올렸다. 곱슬진 앞머리가 귀엽던 고교앨범사진이 겹쳐 떠올랐다. 재치와 유머와 웃음, 그 셋은 남들이 감히 흉내 못내는 그녀만의 것이었다.
8월 28일에 있을 잠실성당 영결미사에 앞서 고교동창회에서는 26일, 삼성의료원 영안실에서 그녀의 영결모임을 가졌다. 웃고 있는 그녀의 영정 앞에 남녀동창 60여명이 슬픔 가슴으로 모였다. 그녀의 대학 학과동창들도 30여명이 합석했다. 모임을 인도하는 동문(이삼열 동기회장)이 그녀의 생전을 이야기했다. 성당에서 구역장으로 레지오 마리에 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장애인과 노인들,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보았다고 했다.
인연이 깊었던 망자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선 누구나 그의 착하고 곱고 아름다웠던 생전을 이야기하기는 한다. E대 영문과를 수석으로 합격하여 수석으로 졸업하고도 학력을 앞세워 잘난 척 자만하지 않은 겸손, 바로 두 달 전의 작은 모임에서 안구와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다면서 사후 잔기기증예약카드를 무슨 상장이나 되는 것처럼 팔랑거리며 내보이던 장난스러움.
남산에 올라가서는 나무 하나마다 그 앞에 멈춰 서서 이 나무는 이래서 예쁘고, 저 나무는 저래서 기품이 있고, 요 나무는 누워서 보는 맛이 일품이라며 지나는 사람들의 눈도 아랑곳 않고 벌렁 누워 나무를 올려다보던 순 박. 고교시절에는 향토연구반에 들어 답사에 열을 올리던 애향인, ‘한국음식 책’을 영문으로 옮겨 미주에 소개한 토속음식 애호가.
하지만 나에게 기억되는 김동문은 대하기 만만치 않은, 아주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동창회 때마다 그녀는 어김없이 접수대에 나와 앉아 출납을 봤다. 남녀임원들을 진두지휘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모시는 스승과 동문들을 빈틈없이 뒷바라지했다. 그녀의 행위에는 친소에 따른 사적인 처우가 없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공정했다.
어쩌다 그녀와 자리를 함께하게 되면 마음을 사려잡고 말을 조심해야했다. 비록 웃고는 있을망정 선이 야무진 입술과 반짝이는 눈은 헛된 말이나 과장된 이야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고는 어떠한 화제도 함부로 내놓을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매사 확실하고 완벽하기를 요구했다. 말로가 아니라 얼굴표정으로, 기세로 자기의 뜻을 나타냈다.
연령회(煉靈會)를 맡은 5년여 동안 150여가 넘는 교우의 시신을 염했다는 이야기에 장내가 모두 숙연해지고 말았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염하는 선친의 시신도 외면했을 정도로 불효했던 나는 차마 얼굴을 들어 그녀의 웃는 영정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칠순을 바라보는 징그러운 나이에 배우고 싶은 건 왜 그리 많고 함께 놀고 싶은 친구는 왜 그리 많으냐며 즐겁게 바쁘던 여자, 그녀의 인생 하반기는 배움과 봉사로 점철되었던 걸 나는 그 자리에서야 알게 됐다. 지난해 가을, 그녀의 친구가 김동문에게 두개의 기도문을 함께 보내왔다며 소개한 글을 잠시 여기에 옮긴다.
-천천히 살게 하소서-
‘주님, 제가 천천히 살게 하소서. 마음을 고요히 하여 뛰는 가슴을 잔잔하게 하시고, 영원한 시간을 바라보며 숨가쁜 발걸음을 한결같게 하소서. 내 혼란스런 일상에 영원한 고향의 평화를 주시고, 옛 기억속에서 흐르는 시냇물의 노래소리로 팽팽해진 신경과 근육을 어루만져주소서. 잠이 가져다주는 요술같은 회복의 능력을 알게 하시고, 꽃을 바라보고, 친구와 수다떨고, 강아지를 쓰다듬고, 잠시 좋은 책을 읽으며, 문득 짤막한 휴가를 취하는 기술을 익히게 하소서. 날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를 기억하여 꼭 빨라야 경주에 이기는 게 아닌 것을, 인생에는 더 빠르게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게 많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높다란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며 나무들은 천천히 자랐기 때문에 저렇게 잘 컷음을 알게 하소서.
주님, 제가 천천히 살게 하소서. 그리하여 제가 인생의 변치 않는 가치에 깊게 뿌리내리게 하소서. 보다 큰 운명의 별을 향해 자라나게 하소서. -Wilfred Peterson-
-빨리 살게 하소서-
‘주님, 저를 빠르게 해주세요. 웅덩이에 고인 물처럼 늘쩡한 제 맥박과 머리를 잘 돌게 해주세요. 제 발이 빨리 움직이게 해주시고 오늘에는 24시간밖에 없으니 뭐라도 해내려면 정신차려야 한다고 일러주세요. 조금 잘못을 저지르고 혼란이 생긴대도 무덤속의 평화와 안식보다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세요. 제 신경이 조화롭게 작동하고 근육이 부드럽게 움직여 언제나 준비태세가 되어있게 해주세요. 끝없이 커피만 죽이고 탁상공론만 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경계시키소서. 읽던 책 그만 내려놓고 강아지 산보도 시키고 밀린 일 시작하게 도와주소서. 주님, 저를 빠르게 해주세요. 이러다가 늙은 느티나무처럼 저도 발밑에 뿌리가 생기지 않을까 모르겠어요. -Joseph McKenna-
두개의 상반된, 하지만 그 모두 옳은 가치를 앞에 놓고 잠시 갈등하던 김동문은 어느 순간 자신만의 기도문을 발견하게 된다. 이를 글로 피력하여 동창회보에 올렸다.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서울사대부고 제 11회 동창회보 제 12권 제 1호 통권 44호, 2006년 1월 15일 발행-
‘숨가쁘게 달리다 어느 순간 문득 눈을 들어보니 공원에는 찬란한 단풍, 그 위로 펼쳐진 하늘은 너무나 투명해 영원한 시간까지도 보이는 듯 하여 저린 가슴으로 가만히 서 있다가 아아, 짤막한 휴가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사이에 누릴 수 있던 피정의 순간, 어느 한 찰나에 영원을 훔쳐볼 수 있는 것, 그리하여 너무나 유한하고 하찮은 나의 삶이 그 깊고 푸른 세계로 연결되어 있음을 새삼 깨달으면서 내 주위를 다시 살펴보고 어지러운 일상을 바로잡게 됐다.
느리게도 빠르게도 좋지만 나는 가볍게 살게도 해 주십사고 기도한다. 가볍게 되고 싶다. 발걸음도 가볍게, 나이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마음도 가볍게, 이제는 인생에서 너무 많고 무거운 것을 기대하지 말고 가볍게 살고 싶다. 가벼운 손끝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가벼운 마음으로 용서하고, 노인이라고 홀대하는 듯한 젊은이에게 노염 타는 일에서도 벗어나고 싶다. 훌륭한 이들은 훌륭한 업적과 성취를 남기고가지만 도무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는 가벼운 나는 뭘 남겨줄 게 없다. 가벼운 웃음은 어떨까? 나를 생각하면 웃음이 떠오르는 그런 사람, 그런 삶을 살다 가고 싶다.
언젠가 청명한 늦가을의 오후, 금빛으로 반짝이던 은행나무 잎새들이 바람 한점 없는데도 일제히 쏟아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 많은 잎들이 자, 이제 그만 떠나자고 약속이나 한 듯이 무더기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우리도 저렇게 미련이 없어야 되겠구나 하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그렇게 떠나고 싶다. 가볍게 살다가 이제 육신의 옷이 무거워지면 미련없이 벗어버리고 가볍게 떠나고 싶다. 한 장의 은행잎처럼, 한줄기 바람처럼-
자기를 가사모(가평의 J를 사랑하는 모임)의 일원이라고 소개하며 K동문이 일어나 또 다른, 잘 알려지지 않은 김 동문의 행적을 소개했다. 지난 1999년, 여자동문 한사람이 반 쯤 치매에 든 상태로 가평 설악면 산기슭에 다 쓰러져가는 움막같은 집에 혼자 살고 있는 걸 알게 된 김동문은 여학생 몇 사람과 가사모를 결성하여 은밀하게 도와왔다고 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세찬 장맛비에 산사태를 우려한 김동문은 이른 아침 길을 차로 달려 움막집을 찾았다고 했다. 치매동문을 방문하여 위로하는 자리에서 미국을 다녀오면 바로 컨테이너라도 비가 새지 않는, 허물어질 염려가 없는 집을 장만해주겠노라 약속했다고 말했다. 그간에 적지 않은 기금이 모아졌다고 했다. 그 약속을 자기들이 지키겠노라 눈물을 떨구며 김동문 영전에 엄숙하게 다짐했다.
가브리엘라 김동문이 떠난 지 어느새 다섯 달이 지났다. 지난 연말, 가사모의 몇 사람과 동창회 총무가 설악면으로 치매동문을 방문하고 왔다. 그중 한사람이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잊혀졌던 가옥의 지상권(地上權)을 찾았다고 했다. 군청에서는 고맙게도 컨테이너를 무상으로 지원하기로 한데 더하여 그를 설치할 군유지(郡有地)마저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주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놀랍게도 멀리 필리핀에서 뜻밖의 소식이 날아왔다.
세계의 최빈국에 병원을 세워나가는 뜻있는 봉사를 하는 <평화의료재단>에서 그 여덟 번째 사업으로 마닐라 북쪽 600km의 오지 Kalinga에 병원을 설립하며 이름을 《Kalinga-Gabriela Mija Kim Medical Center》라고 주 당국에서 명명하였다는 소식이었다. 국유지 3,000평에 한국타이어의 조양래회장과 홍문자부부가 건설소요경비 전액을 기부하여 평화의료재단이 주관하여 준공한 이 위업은,
재단의 ‘가난한 나라 무의촌에 기본 의료혜택 부여’,
홍문자씨의 ‘불우이웃 돕기’,
고(故)김미자의 ‘ 불쌍한 사람 돌보기’
의 세 철학적정신이 삼위일체를 이룬 결과라 할 수 있다. 이 모두 김동문이 심은 한 알의 밀알이 시원이 되었노라고 사람들은 서슴없이 입을 모았다. 지극히 솔직하여 꾸밈을 모르던 동문, 아름답고 진실하게 살고 간 겸손한 인격, 숭고한 정신은 신의 나라에서, 그리고 우리들이 살고 가는 이 지상에서, 영원한 감동으로 오래도록 푸르게 살아있을 것이다. 그녀가 곁을 떠나간 이 겨울이, 조용하고 적막하게, 따뜻하게 저물어가고 있다.
2007년 1월 23일 밤, 湛 如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