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두부
오 세 윤
약속장소인 역삼동 GS타워 3층 LG아트센터 입구 에스컬레이터 앞, 약속시간 6시 30분, 초대권을 건네주기로 한 G라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가르쳐받은 전화번호로 세 번을 걸었다. 신호가 가는데도 주인은 수신을 하지 않는다.
공연시간 7시가 임박해 우리를 초대한 K여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다른 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눈다. 끝나기를 기다려 아는 체 다가가며 인사를 했지만 알아보질 못한다. 벌써 세 번째 보는 얼굴인데, 자존심이 상한다. 그대로 돌아서 아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못 만났어요? 아내가 묻는다. 고개를 주억거려 그렇다고 했다. “표를 끊어 들어갈까?”하는 내 물음에 “남편이 총장까지 지냈다는 분이 어떻게 그리 쉽게 약속을 어기지?”하는 말로 아내는 발딱 일어나 매몰차게 몸을 돌려 앞장서 건물을 나선다.
저녁이나 먹읍시다, 라고 말하며 나도 아내의 뒤를 따라 건물을 나섰다. 하긴 남이 애써 준비한 공연을 공짜로 보겠다고 생각한 내가 잘못인지도 몰랐다. 남이 공들여 쓴 책을 ‘읽어주는 것만도 고마워하라’며 그냥 받기만을 원하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가.
용인으로 이사하자 서울나들이가 갈수록 뜸해졌다.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다 몇 군데 정체구간이 있어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탓이었다. 게다가 산 아래 자리 잡은 집터가 편하고 공기가 맑아 잘 나다니게 되질 않았다. 별달리 문화공간도 없었다.
변두리일망정 서울에 있을 때는 그래도 한해에 너 댓 차례는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하다못해 개봉관이라도 찾았지만 이사한 후로 이태동안은 부부가 함께는 공연장을 한번도 찾지 못했다.
두 번의 기회가 있기는 했다. 인터넷상에서 ‘G&G’라는 홈피를 운영하는 K여사의 초청으로 손국임교수의 피아노독주회와 황병기교수의 가야금 신작발표회에 참석을 했었다. 하지만 두 번 다 나 혼자 참석했다. 한번은 계획된 국내 단체여행으로, 또 한번은 개도 안 걸린다는 여름감기로 아내는 동반을 못했다.
열흘쯤 전, 여사가 전화를 했다. 황병기교수의 70분 가야금대곡에 맞춰 안무된 김명숙늘휘무용단의 공연이 다음 토요일에 있는데 부부동반으로 오셨으면 한다는 초청 전화였다. 꼭 가마하고, 고맙게 초대에 응하겠다는 인사를 정중하게 건넸다. 바로 아내에게 내용을 전했다.
토요일, 아내를 동반하고 보다 일찍 집을 나섰다. 모처럼 정장을 한 아내의 얼굴이 가을볕처럼 맑다. 긴 추석연휴가 시작되는 첫날의 오후 시내로 들어가는 차는 막힘없이 달렸다. 승객도 적었다. 6시도 안돼 공연장에 도착했다. 한 시간나마를 허비하고 나서 공연관람을 포기한 채 건물을 나와 음식점들이 즐비한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아내는 골목길을 또박또박 앞장서 걸어 내려갔다. 심사가 뒤틀렸음을 알기 어렵지 않았다. 기세와는 달리 스커트 아래 노출된 종다리가 안쓰럽게 가늘었다. 요 몇 해 사이 배도 좀 나온 데다 다리 살이 많이 내렸다.
무얼 먹을까, 한우 암소갈비? 아님 갈비탕? 아내는 고개를 젓는다. 평소에도 아내는 고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이 들어 고기를 많이 먹어봐야 코레스톨이나 높아져요, 하면서 한사코 아내는 채식만을 고집한다. 탓에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달에 한 번쯤밖에는 고기구경을 못 했다. 딸네식구나 와야 푸짐하게 고기맛을 보고는 했다.
그러던 아내가 이사한 뒤로 조금 변했다. 한달에 세 번은 꼭 고기를 먹게 한다. 닭을 삶는다거나 돼지불고기 아니면 삼겹살을 삶아낸다. 그래도 역시 자신은 고기를 잘 입에 대려하지 않는다.
젊어서는 솜사탕 같던 아내, 나이 들어 한때는 억척스럽기가 겨울갯가 돌김 따는 아낙네, 물기마른 단단한 굴참나무 같아지더니, 이젠 스러지는 저녁햇살처럼 아슴아슴 부드럽게 저물고 있다.
어디 순두부 잘하는 집 없을까, 아내가 두리번두리번 주변을 살핀다. 저기 두부요리전문집이 있기는 한데 여러 가지를 하는 집 순두부는 맛이 없더라, 하면서 나에게 동의를 구한다.
조금 더 내려가자 마침 아랫골목에 ‘ㅂ 순두부집’이란 간판이 나타났다. 연휴가 시작된 토요일의 저녁시간 식당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호젓하게 앉아 외식을 즐기는 것도 참 오랜만이었다. 글을 씁네 하고 그간 아내에게 너무 무심했다. 미안했다. 난 매운걸로 먹을래, 하면서 아내는 해장순두부를, 나는 해물순두부를 시켰다.
소주한잔 하고 싶구먼, 안주는 무얼 시킬까, 하는 내 물음에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아내가 자기는 녹두부침개가 더 좋다며 부침개를 한 접시 시킨다. ‘술안주로는 해물파전이 날 텐데.....’하는 내 혼잣소리를 듣더니 대뜸 종업원을 불러 파전으로 바꾸어 주문한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을 가다보니 술병을 진열해놓은 투명유리로된 냉장고안에 백세주병이 보인다. 맞아, 아내는 소주를 못 마신다는걸 그때서야 깨닫는다. 평소 산사춘이 아니면 백세주나 두어 잔 마셨다. 종업원에게 일러 소주대신 백세주를 가져오게 했다.
내온 순두부는 기대보다 맛이 덜했다. “전에 김포에서 먹어본 순두부는 참 맛있었는데- ” 아내가 그리운 듯 말했다. “맞아, 십년도 더됐지? 지금도 그 집이 있을까? 가면 찾을 수는 있을까? 하긴 여의도 먹자빌딩 순두부도 맛이 있었지.”
아내는 신혼 초부터도 순두부를 무척 좋아했다. 염색한지 한참 된 아내의 귀밑머리가 불빛에 하얗게 드러났다. 이제는 머리카락도 늦게 자라는 아내, 가파른 산길이 힘겨워 더는 뒷산을 오르려하지 않는 아내, 고집이 빠져 순한 빛이 된 아내의 눈, 함께 살아온 날들보다 함께 있을 날이 보다 적을게 확실한 아내, 그래 이제부터는 한달에 한두 번씩은 맛있다는 순두부집을 찾아 전국을 섭렵하자, 전국이 힘들면 시내라도 섭렵하자. 그래도 다는 다니지 못하겠지.
공연 따위는 벌써 잊은 사람처럼 아내는 이것저것 수다스럽게 말을 늘어놓는다. 돌아오는 전철 안, 잡힌 손이 쑥스러운 듯 아내가 접어들고 있던 내 윗도리로 손을 가리며 TV를 보는 척 딴청을 한다.
2006. 9. 30. 湛 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