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어느 해, 서리 산으로 봄 소풍을 다녀 온 적이 있습니다.
그날의 모습을 적어 놓은 것이 있어 오늘의 우리 모습과 연결해 보았습니다.
우리 처음 만났던 학창시절을 시작으로 하여 오늘을 추억하는 동안 저는 행복했습니다.
주위에 한사람의 진정한 친구를 두면 성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정도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유사가족’과도 같은 이웃이 주위를 채우고 있다는 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 사람들이 곧 25기 친구들임을 고백하며 제 마음과 다르지 않은 친구들의 마음을
확인하고자 이곳에 섰습니다.
우화(雨花)
동창회 주최 소풍도 어언 3회, 3년을 맞았습니다.
시작할 때는 언제 임기가 지나나 생각했는데 산행 3번 하니까 끝나더라는 동창회장님의
말을 들으며 그 하기 싫은 김장도 열댓 번하니 청춘이 지나가더라는 여인네들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래,
감당키 힘들어 고통스러운 일도 지나가게 마련이고
군대에 간 남자들이 ‘국방부 시계도 간다’라고 하면서 기다리는 제대 날처럼 오지
않을 것 같은 날도 오고야 마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일 모두가 흐르는 세월에 각자의 무늬를 새겨 넣는 일인 것 같습니다.
그 무늬가 개인의 역사를 말하고 또한 그 사람의 얼굴을 만들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도 누군가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쳐다본 우리 친구들의 얼굴들은 열아홉 그 시절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살갑고 애처로우며 잊기 싫은 아름다운 추억의 시절은 그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
정신적인 퇴행을 한다던가요? 그 날, 바로 우리가 그랬습니다.
비오는 서리산.
나는 몸의 컨디션으로 인해 산악대장 안내 말에서처럼 산책로가 끝난다는 중간 부분에서
내려오려 했습니다.
그런데 몇몇이 중간에 길을 잘못 들었고 어찌 어찌하다 보니 내려 갈 일행이 없는 관계로
함께 정상까지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산을 오를 때 처음부터 목표를 정상에 두고 올랐다면 갈등도 덜 했을 테고 힘도
덜 들었으리라.
그러나 돌아 올 생각을 먼저 하고 내딛은 발걸음에 어찌 인내심이 있었을 것이며 속도가
붙었겠습니까. 더욱이 함께 올라가는 친구들과 발을 맞추지 못하니 마음도 비껴나가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주어진 잔이라면 마셔야 하는 것이 받은 사람의 몫입니다.
받아들이자 마음을 바꾸니 산 또한 다른 얼굴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대체로 완만한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비 내리는 날이었기에
먼지가 없어 걷기에 좋았습니다.
흔히 겨울 산행의 백미(白眉)라 하면 설화와 상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들이
걷는 길가의 나뭇잎에 수정으로 맺혀 있는 우화(雨花)는 더욱 일품이었습니다.
어쩌면 칼날 같은 풀잎에 송알송알 완두콩 형제들이 되어
조르르 대 여섯 개 씩 사이좋게 들어 있는 빗방울의 모습이라니….
흡사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동창회장님과 동창회 임원들. 그리고 산악 대장님과 총무님.
정말, 정말 수고 많으십니다.
쉽지 않은 일 맡아 보시느라 고단하고 힘들겠지만 너무 외로워하지는 마세요. 우리가
동무하여 함께 걸을 테니까요.
차안에서 길가의 꽃을 두고 물었습니다.
저 꽃 이름이 뭐야?
한 친구가 ‘진달래야’하자
거의 동시에 한 친구가 ‘목련이야’합니다.
이게 웬 이구이성(異口異聲)입니까?
알고 보니 왼쪽에 앉아있던 친구는 오른 쪽 길가의 꽃을 보고
오른 쪽에 앉아 있던 친구는 왼쪽 길가의 꽃을 보고 한 대답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이란 둘이서 한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것이라는데
우리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겠네요.
버스 한 차가 가득 차서 빈자리가 눈에 띄지 않고 승용차 한대가 더 갔을 정도이니 많이
참여해 준 동문들이 고맙고 흐뭇했습니다.
다만 꼭 한 사람으로 인하여 우리는 커다랗게 빈자리를 느꼈으니
그 빈자리의 친구를 위해 흘린 친구들의 눈물이 귀했습니다.
바로 전 달 같이 산행했으나 지금은 쓰러져 투병하는 동문의 쾌유를 빌며
함께 하지 못함을 슬퍼하는 친구들의 흐느낌이 빗소리에 묻혔습니다.
짐짓 못들은 체 고개를 돌리는 또 다른 친구들의 표정도 눈물을 흘리는 친구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늘 그들이 흘린 눈물은 모두의 가슴에 뜨겁게 화인(火印)으로 새겨져 비가 오는
날에는 그 자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를 것을 압니다.
친구들이여~
우리 모두 건강 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우정을 지키는 길이며 자신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함께 한 친구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일이 바빠서 혹은 여러 사정으로 함께 하지 못한
친구들 다음에 꼭 함께해요.
한 공간에서 가장 순수했던 시간을 함께한 우리들의 인연이 소중합니다. 삼십년의 세월을
잘 지내고 오늘 이렇게 다시 모인 친구들이 정겹습니다.
우리가 지난 날 각자의 이름에 이력을 한 줄씩 채워갈 때 우리의 눈빛도 초록빛 지금의
빛이었을지니 젊은 그들 사월과 닮아 있음이라...
이제 구월입니다.
지금 우리 나이가 딱 이쯤에 서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까지도 잘 살아 왔지만 앞으로 더욱 아름다운 삶을 위한 터닝 포인트로
오늘을 선물하고자 합니다.
.
잘 오셨습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에 스스로 귀하고 멋진 당신을 위한
판을 펴고자 합니다.
당신이 오늘의 주인공이십니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 2006, 9, 16 , 서명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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