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인연'이 생각나 올려 본다.
-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이름 : 피천득 (皮千得) 출생 : 1910년 4월 21일 학력 : 중국 후장대학교 영문학과
- 수상경력 : 199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은관문화훈장 1999년 제9회 자랑스런 서울대인상
- 경력사항 : 1945년 경성대 예과 교수 1946년 서울대 사범대 영문과 교수 1969년 미국 하버드대 등에서 강의
- 작품 : '인연', '플루트프레이어', '생명', '피리부른 사람' 등 많은 시와 수필이 있다.
-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꼭 소유해야 행복한 것은 아니죠.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됩니다. 좋은 기억은 욕심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 “부자는 돈이나 재산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진짜 부자지요. 파리의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세운 것이지만 그의 것이 아니라 그곳을 거니는 연인들 것이거든요. 꼭 좋은 그림을 소유해야 행복한 것도 아니죠. 기억 속에 넣어두면 됩니다. 좋은 기억은 욕심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랍니다.”
- “죽어서 천당에 가더라도 별로 할 말이 없을 것 같아요. 억울한 것도 없고 딱히 남의 가슴 아프게 한 일도 없고… 신기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볼 때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 내 삶과 똑같은 생을 살고 싶어요. 공부하고 가르치고 내가 느낀 아름다움을 글로 남기고....... 훗날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 사람, 사랑을 하고 갔구나’ 하고 한숨지어주기를 바라는 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그것도 참 염치없는 짓이지만….”
- 추억이 많은 사람이 부자라면 나도 아주 아주 부자네~ ^*^
-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과 똑같은 생을 살고 싶다는 피천득 선생님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의 삶을 사랑했는지...... 부럽다
- 우리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 인 연 -
- 지난 사월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 대학에 가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한 일이 있다.
-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수녀님과 김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수십 년 전 내가 열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동경(東京)에 간 일이 있다.
- 어떤 분의 소개로 사회 교육가 미우라(三浦) 선생 댁에 유숙을 하게 되었다. 시바꾸 시로가네(芝區白金)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트피이'를 따다가 꽃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트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 피천득의 아사코
- 성심(聖心) 여학원 소학교 일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까지 산보를 갔었다. 유치원부터 학부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까지 가지고 있었다.
- 아사코는 자기 신발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연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동경을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뺨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
- 옆에서 보고 있던 선생 부인은 웃으면서 한 십년 지나면 좋은 상대가 될 거예요하였다.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아사코에게 안델센의 동화책을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 그 동안 나는 국민학교 일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동경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동경역 가까운데 여관을 정하고 즉시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하고 세련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꽃과 같이. 그때 그는 성심 여학교 영문과 삼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책을 나갔다. 그리고 계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졌다.
-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로 무렵, 나는 아사코 신발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한다. <쉘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꼬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 아사꼬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고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 그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 통에 어찌 되지나 않았나, 남편이 전사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동경에 들러 미우라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미우라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 그리고 아시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二世)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이 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二世)와 결혼하였다는 것은 마음에 걸렸다.
-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해 주었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 * 앙드레가뇽 - 첫날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