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1970.01.01 09:33

갈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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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채

오 세 윤

내년 개교 60주년을 앞두고 고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선농문학상을 제정했다. 작품 하나를 응모했다. 고맙게도 대상이 주어졌다. 어제 송년회 겸 정기총회를 하는 자리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많은 동문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동기회에선 축하화분까지 준비했다. 화려한 꽃다발을 세 개나 받았다. 박수도 많이 받았다. 기쁘면서도 쑥스러워 행사 내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이라고 타본 게 과연 얼마만인가. 단상에 올라가 상을 타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내겐 상복이라곤 없었다. 초등학교 때의 개근상 네 번이 전부였다. 공부는 잘한 편인데도 우등상은 한번도 못 탔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물론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다.

남들이 이 사실을 알면 무어라할까. ‘저런 친구가 고등학교는 어떻게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왔지? 의대는 어떻게 들어갔지? 낙제도 안하고 어떻게 제때 졸업은 했을까.’ 의아하여 쳐다볼 사람이 한둘이 아닐 듯싶다.
돌이켜보니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상이 하나 있기는 하다. 전공의 3년차인 때, 국가의 보건시책에 따라 6개월간 무의촌진료에 파견된 적이 있었다. 대천 인근의 무의면 보건지소는 크기라야 20평정도로 진료실 겸 치료실, 방 둘에 주방이 딸린 최소한의 규모였다. 외래환자만 볼 수 있었다. 밤잠도 설치며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던 병원생활에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오히려 우리들에게 파견근무는 숨통 트이는 훌륭한 휴식기간이기도 했다.

수당도 월급의 세배라 생활에도 제법 여유가 생겨 좋았다. 겨울방학에는 식구들이 내려와 함께 지내다 갔다. 식구들이 올라간 다음 밥을 해먹기도 귀찮은데다 시간도 아까워 이웃집에 부탁해 식사를 해결했다.

파견근무가 거의 끝날 무렵인 3월 중순쯤 동네위쪽의 외딴집에 불이 났다. 어린 아들 둘을 데리고 사는 과수댁이었다. 마침 보건지소에는 먹다 남겨둔 쌀이 세말쯤 독에 그대로 담겨있었다. 다음날 바로 자전거로 그 집에 실어다주고 왔다. 근무기간이 끝나 서울로 올라가게 되면 저걸 어떻게 하나하고 가볍게나마 부담스러워하던 차라 제 참 잘됐다싶어 마음도 홀가분했다. 그 일은 바로 잊어버렸다.

병원에 복귀한 다음날, 과장께서 보사부를 다녀오라고 했다. 생각지도 않게 표창패를 받았다. 선행과 헌신적 의료봉사에 대한 표창, 부끄럽고 황당했다. 주말을 이용한 것이기는 했지만 겨울의 해수욕장과 인근의 도서지방을 두루 돌아보게 된 귀한 기간의 고마움이 오히려 컸는데 표창을 받다니, 그것도 남아있던 쌀 세말에. 얼굴 뜨겁게 받아가지고 왔다. 거기에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 뒤로 연이어 정말로 낯 뜨거운 짓거리를 했다.

수련을 마치고 얼마 지나 낯선 동네에 개업을 하게 되자 무언가로 나를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나타내어야만 유리할 듯싶었다. 별생각 없이 그때의 표창패를 걸었다. 몇 달이 지나자 단골이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의 속엣 말도 나누게 되는 친분들이 생겨나게 됐다. 하루는 그중의 한 환자가 넌지시 물어왔다.

“보건지소에도 계셨군요. 선행을 많이 하셨나보죠?”

부끄러워진 나는 딴청을 하는 것으로 우물쭈물 그 물음을 모면했다. 그날 밤 내내 나는 나 자신이 너무도 싫었다. 다음날로 바로 상패를 치웠다. 처치곤란이던 쌀 세말로 엉뚱하게 받은 선행 상, ‘나는 선행을 베푸는 의사’라고 광고한 그 몰염치함, 상패를 치우고도 참 오랫동안 부끄러웠다.

어쩌다 주어진 상이란 미적 외모나 물려받은 재능이나 한가지로 그건 그렇게 뽐낼 일은 못되는성싶다. 부모의 은공이나 재수여서 고마워나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는 한다.

글쓰기도 어쩌면 마찬가지일 듯 하다. 공로에 대한 상과 갈채는 받아 마땅하기는 하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게 과연 갈채를 받고자 함이었던가. 칭찬에 귀가 솔깃해지면서 글을 쓰는 것에도 점점 더 인정받기를 은근슬쩍 바라는 속물스런 자신을 본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달래는 일과 상과 갈채를 탐하는 일은 무엇이 다를까. 하나는 육체적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적이라고 말할까. 모두가 삶에는 필요한 일일 듯도 싶다. 위안과 기쁨이 되기는 한가지일 것도 같다.

인정과 갈채를 바라는 일도 모두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망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욕망을 절제하여 그것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을 때 그것이 기쁨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인기를 의식하게 되면 글쓰기의 초심은 이미 잃어진 상태가 된다. 갈채와 상과 인기, 인정을 받고자 연연한 이 며칠 나는 전혀 자유스럽지 못했다.

‘사물을 활용하여 할 수 있는 한 거기에서 기쁨을 얻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일이다.’ 스피노자의 한마디가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가슴으로 다가온다.


2005. 12. 11. 湛 如

가을 정원


수줍게 메꽃이 피고 아침이슬 맑게 맺히는
초여름이 가고
풀벌레 밤을 새워 우는 팔월과 구월사이
달빛 흐벅져 내리던
낙엽 흩날려 시나브로 비워가는 뜰
천둥치던 여름의 모든 것 져 내리는 가을정원

갈채는 이제 그만
마른 잎 뒹구는 빈 뜰에 내려놓고
은행나무 벗은 둥치에 기대어 한갓
흐름이고 싶은 가을
잎들을 노랗게 물들이며 너는
접혀진 악보가 되어 내게로 오는구나

하나의 결실을 맺고 흐뭇하기 잠깐
바람은 차갑게 목덜미를 파고든다
옷섶을 헤집고 품으로 기어들어
날뛰던 심장을 빙점으로 잠재우고 어느새
햇볕과 그늘사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있다

부르는 이 없어도 자꾸만
뒤돌아 올려다보는 가을 밤 하늘
별 한개 잘못 은하에서 튕겨져 나와
한줄기 빗금 긋는 적막으로
노래를 갈무리하는 둥치에 가만히
귀를 기대고 선다

정원에서 이어지는 가을의 빈 들판너머로
다시는 안을 수도 만질 수도 없이
아쉽게 떠나버리는 여름의 잔영에
이제 곧 낙엽이 되어버릴 나의 메마른 안녕을
찬이슬 내리는 정원에 악보로 적는다
바람마저 깊게 잠재우는 어둠이 오기 전에


2005. 10. 23. 담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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