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uel Johnson은 그의 수필집에서
“Happiness is not a state to arrive at, but a manner of traveling.”이라고
그의 행복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 가고자 하는 목적지, 손에 넣고자 하는
대상, 대기만성이라고 하는 인생의 말년에 만발하는 거둠등,
이러한 것들을 이룬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 보다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어떤 방법과 삶의 양태를 취하며
가느냐, 이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 일게다.
예전에 골프를 시작했을때는 다음날 새벽 골프를 치러 간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날이 한 두번이 아니였다. 지금은 손을 놓고
낚시로 돌았지만 그때 잠을 설치며 뿌근했던 흥분의 느낌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낚시를 갈 때도 언제나 마음이
들 뜨게 된다. 더군다나 바빌로니아 속담에 따르면,
神은 낚시에 쏟는 시간만큼은, 우리에게 할당된 삶의 날들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하였다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보너스이다.
아마도 돌아갈 자연에 미리 안겨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자연과 포개진 시간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기가 물릴 때는 세상 만사가 잊혀 진다. 세상 일을
굳이 잊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제아무리 큰일이 생기고
걱정거라가 있드라도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도 없다.
고기가 않 물 때는 계곡의 물소릴 들으며, 호수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장엄한 바다의 위용에 한낱 일엽편주의 외소함을
자각하며 겸허해 질 수 있다.
잡힐땐 모든 것 잊어서 좋고,
않 잡힐 땐 모든 자연 즐길 수 있어 좋다.
그러니까 잡혀도 그만, 않 잡혀도 그만, 꼭 부처님 게송처럼
“이 세상에도 욕심이 없고 저 세상에도 욕심이 없다”는 말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은 그렇다 치드라도 낚시는 잡아야 맛이다.
그런데 고기는 사람 차별하는 법이 없다.
天地不仁이라고 하였던가? 하늘과 땅은 사람에게 인자한 법이 없다.
그냥 지들 뜻대로 운행할 뿐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운행 당할 뿐이다.
고기란 녀석도 인격만큼은 티끌 만큼도 없는 존재이다.
고기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아무리 귀신같은 낚시꾼도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고기 한마리가 거만한 우리를 이처럼 매몰차게 내동댕이 칠때면
낚시꾼은 그제서야 새로운 수단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고기의 꽉 닫힌 입을 열기위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늘은 불굴의 노력을 다하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He that is slow to wrath is of great understanding.”(Proverb 14:29)
고기가 않 물린다고 화가 나서 낚시대를 접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고기한테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린들 받아 주는 일도 알아 주는
일도 없다. 그렇다고 고기가 입을 열고 먹이를 먹어 주겠는가.
성냄과 조급함을 인내로서 제어하는 자가 가장 통달한 낚시꾼이다.
바늘도 바꿔보고, 미끼도 새것으로 걸고, 추도 바꾸어 던져보다가,
정히 고기가 없는 곳이라 여겨지면 자리를 바꾸어 다른 물에
던져야 한다. 고기가 없는 곳에서 무한정 진을 치는 것은
무덤 앞에서 사람이 살아 걸어 나오기를 바라는 바와 다름 없다.
인내와 지구력이 낚시의 최고 비결이다.
우연히 현명해지는 법은 없으며, 인내와 지구력으로 해보는 자만이
경험을 통하여 배우게 된다. 책을 통해서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의 모든 체험을 직접 다 경험할 수 없드시
때론 책을 통하여 좀 더 나은 낚시꾼이 될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배움을 얻던 배운다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기를 잡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과, 노력과, 나름대로의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
미끼를 걸고 던질 수 있다해서 배움이 끝난 것이 아니요,
시작일 뿐이다. 단 몇일 만에 얻은 경험이 수년간의 경험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어찌 물때와, 고기가 있음 직한 물가를
식별하여 알아 볼 수 있으리요.
낚시꾼의 십분의 일이 잡히는 고기의 90프로를 잡는다고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대어를 걸었다가 놓치고 난 후 우리는
장비를 재 점검하면서 세월의 흐름을 통하여 체득하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천직에 종사한 사람들과 장인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책을 통하여 이루었다기 보다는, 오랜 동안 인내와
지구력을 통하여 실 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경륜이기 때문이다.
낚시꾼이라면 너나 할 것없이 대어를 엮는 것이 꿈이다.
큰 고기는 큰 물에서 논다고 , 넓은데로 자주 가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질 않는다. 여건보다도 나의 도전 의욕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가끔 큰 고기를 잡으면 그자체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낚시를 하며 자연의 정취에 푹 파묻힐 때가 내게는 더한
행복감을 주곤 한다. 호젓한 때문일까?
아마도 자연이 무언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힌트를
조금씩 흘려 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유될 수 없는 자연을 잠시 빌려 무료로 세들어 살고 있다만
세든자의 도리를 할만큼 해야 하는 것이 소위 인격이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고기는 말이 없고 입을 열지 않는 한 잡히지 않는다.
나도 입을 띠고 말한 연후에 수없이 많은 후회를 했지만
침묵했을 때를 후회해 본적은 기억에 없다.
그래도 나는 개울에 열마리 물고기보다는 입을 열고
나의 낚시 바늘에 걸려 올라온 한마리 고기를 좋아한다.
낚시꾼에겐 물속에 있는 고기는 걸리기 전까지는
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입을 벌려 바늘에 걸렸다가
몸부림쳐 벗어날 때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고기에게도
많은 배움과 성장이 있었으리라.
지고의 겸손함은 스스로 만족하는데서 나오고,
인격은 성공의 삶이 아니드라도, 평범하면서도
훌륭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하듯이,
낚시는 우리를 자연으로 인도하여 겸손과 인격을
배우게 해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비록 진짜 대어를 엮어 보지는 못했지만
나의 인생속에서 대어가 아닌 大人을 엮었다고
뒤 늦게나마 어느날 불현듯 느꼈을 때
그 기쁨과 감사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늘 그 大人, 마누라로부터
처음으로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았다.
“당신 얼굴 모습에서 높은 인격 같은 것이 느껴져요.”
지난날 어두운 구석쟁이에서 수없이 저질렀던 삿된 짓들이,
벌건 대낮에도 부끄러움 모르고 천연덕 스러웠던 언행들이,
당뇨로 쇠잔해 가는 볼품없는 얼굴속에서,
마치 물속의 고기처럼
자유로히 헤집고 다니는 꼴이 내 눈에는 선명한데…
낚시는 천상 나의 팔자 소관인가 보다.
넓은 바다에서도 낚시하고
내 좁은 얼굴 속에서도 잡아 올려야 하니…
안 팎 고기가 모두 입을 닫고 말이 없구나.
“지난날 악업들을 물로 씻어 낼수 있다면
저 넓은 바닷가에 뛰어 들어 물고기가 되리라.
이승에서 저지른 죄 이승으로 소멸 된다면
내 물고기 되어 낚시 바늘을 물리라.
악업은 남은 자에게 고통으로 남으니
죽음으로도 소멸될 수 없는 죄의 영원함이여.
헤아릴 수는 없으되, 그래도 건널 곳이
저만치에 있었으면 싶은 가냘픈 소망 한자락,
비록 命在一息之間이나,
오늘 가냘픈 소망 한자락 부여 잡은 기쁨에,
이승의 마지막 내 뿜는 숨 속에서나마
내세를 엮으려는 덧없는 낚시질 하네.”
“Happiness is not a state to arrive at, but a manner of traveling.”이라고
그의 행복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 가고자 하는 목적지, 손에 넣고자 하는
대상, 대기만성이라고 하는 인생의 말년에 만발하는 거둠등,
이러한 것들을 이룬데서 행복을 느끼는 것 보다는,
그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을 어떤 방법과 삶의 양태를 취하며
가느냐, 이것 자체가 바로 행복이란 뜻 일게다.
예전에 골프를 시작했을때는 다음날 새벽 골프를 치러 간다는
생각에 잠을 설친 날이 한 두번이 아니였다. 지금은 손을 놓고
낚시로 돌았지만 그때 잠을 설치며 뿌근했던 흥분의 느낌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낚시를 갈 때도 언제나 마음이
들 뜨게 된다. 더군다나 바빌로니아 속담에 따르면,
神은 낚시에 쏟는 시간만큼은, 우리에게 할당된 삶의 날들에
포함시키지 않겠다고 하였다니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보너스이다.
아마도 돌아갈 자연에 미리 안겨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돌아갈 자연과 포개진 시간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고기가 물릴 때는 세상 만사가 잊혀 진다. 세상 일을
굳이 잊어야 할 필요도 없지만 제아무리 큰일이 생기고
걱정거라가 있드라도 생각할래야 생각할 수도 없다.
고기가 않 물 때는 계곡의 물소릴 들으며, 호수의 고요함을
만끽하고, 장엄한 바다의 위용에 한낱 일엽편주의 외소함을
자각하며 겸허해 질 수 있다.
잡힐땐 모든 것 잊어서 좋고,
않 잡힐 땐 모든 자연 즐길 수 있어 좋다.
그러니까 잡혀도 그만, 않 잡혀도 그만, 꼭 부처님 게송처럼
“이 세상에도 욕심이 없고 저 세상에도 욕심이 없다”는 말과
비슷한 것 같은 기분이다.
기분은 그렇다 치드라도 낚시는 잡아야 맛이다.
그런데 고기는 사람 차별하는 법이 없다.
天地不仁이라고 하였던가? 하늘과 땅은 사람에게 인자한 법이 없다.
그냥 지들 뜻대로 운행할 뿐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운행 당할 뿐이다.
고기란 녀석도 인격만큼은 티끌 만큼도 없는 존재이다.
고기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제아무리 귀신같은 낚시꾼도 입을 닥치고
있어야 한다.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고기 한마리가 거만한 우리를 이처럼 매몰차게 내동댕이 칠때면
낚시꾼은 그제서야 새로운 수단 방법을 강구하게 된다.
고기의 꽉 닫힌 입을 열기위해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하늘은 불굴의 노력을 다하는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He that is slow to wrath is of great understanding.”(Proverb 14:29)
고기가 않 물린다고 화가 나서 낚시대를 접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고기한테 화를 내고 성깔을 부린들 받아 주는 일도 알아 주는
일도 없다. 그렇다고 고기가 입을 열고 먹이를 먹어 주겠는가.
성냄과 조급함을 인내로서 제어하는 자가 가장 통달한 낚시꾼이다.
바늘도 바꿔보고, 미끼도 새것으로 걸고, 추도 바꾸어 던져보다가,
정히 고기가 없는 곳이라 여겨지면 자리를 바꾸어 다른 물에
던져야 한다. 고기가 없는 곳에서 무한정 진을 치는 것은
무덤 앞에서 사람이 살아 걸어 나오기를 바라는 바와 다름 없다.
인내와 지구력이 낚시의 최고 비결이다.
우연히 현명해지는 법은 없으며, 인내와 지구력으로 해보는 자만이
경험을 통하여 배우게 된다. 책을 통해서 훌륭한 낚시꾼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의 모든 체험을 직접 다 경험할 수 없드시
때론 책을 통하여 좀 더 나은 낚시꾼이 될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배움을 얻던 배운다는 것은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고기를 잡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과, 노력과, 나름대로의 연구와 준비가 필요하다.
미끼를 걸고 던질 수 있다해서 배움이 끝난 것이 아니요,
시작일 뿐이다. 단 몇일 만에 얻은 경험이 수년간의 경험을
어찌 알 수 있으리오.. 어찌 물때와, 고기가 있음 직한 물가를
식별하여 알아 볼 수 있으리요.
낚시꾼의 십분의 일이 잡히는 고기의 90프로를 잡는다고 한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대어를 걸었다가 놓치고 난 후 우리는
장비를 재 점검하면서 세월의 흐름을 통하여 체득하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천직에 종사한 사람들과 장인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책을 통하여 이루었다기 보다는, 오랜 동안 인내와
지구력을 통하여 실 생활 속에서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경륜이기 때문이다.
낚시꾼이라면 너나 할 것없이 대어를 엮는 것이 꿈이다.
큰 고기는 큰 물에서 논다고 , 넓은데로 자주 가고 싶지만
여건이 허락하질 않는다. 여건보다도 나의 도전 의욕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가끔 큰 고기를 잡으면 그자체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낚시를 하며 자연의 정취에 푹 파묻힐 때가 내게는 더한
행복감을 주곤 한다. 호젓한 때문일까?
아마도 자연이 무언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힌트를
조금씩 흘려 주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소유될 수 없는 자연을 잠시 빌려 무료로 세들어 살고 있다만
세든자의 도리를 할만큼 해야 하는 것이 소위 인격이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고기는 말이 없고 입을 열지 않는 한 잡히지 않는다.
나도 입을 띠고 말한 연후에 수없이 많은 후회를 했지만
침묵했을 때를 후회해 본적은 기억에 없다.
그래도 나는 개울에 열마리 물고기보다는 입을 열고
나의 낚시 바늘에 걸려 올라온 한마리 고기를 좋아한다.
낚시꾼에겐 물속에 있는 고기는 걸리기 전까지는
고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면 입을 벌려 바늘에 걸렸다가
몸부림쳐 벗어날 때까지 그 짧은 순간 동안 고기에게도
많은 배움과 성장이 있었으리라.
지고의 겸손함은 스스로 만족하는데서 나오고,
인격은 성공의 삶이 아니드라도, 평범하면서도
훌륭한 삶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하듯이,
낚시는 우리를 자연으로 인도하여 겸손과 인격을
배우게 해주는 최상의 선물이다.
비록 진짜 대어를 엮어 보지는 못했지만
나의 인생속에서 대어가 아닌 大人을 엮었다고
뒤 늦게나마 어느날 불현듯 느꼈을 때
그 기쁨과 감사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오늘 그 大人, 마누라로부터
처음으로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았다.
“당신 얼굴 모습에서 높은 인격 같은 것이 느껴져요.”
지난날 어두운 구석쟁이에서 수없이 저질렀던 삿된 짓들이,
벌건 대낮에도 부끄러움 모르고 천연덕 스러웠던 언행들이,
당뇨로 쇠잔해 가는 볼품없는 얼굴속에서,
마치 물속의 고기처럼
자유로히 헤집고 다니는 꼴이 내 눈에는 선명한데…
낚시는 천상 나의 팔자 소관인가 보다.
넓은 바다에서도 낚시하고
내 좁은 얼굴 속에서도 잡아 올려야 하니…
안 팎 고기가 모두 입을 닫고 말이 없구나.
“지난날 악업들을 물로 씻어 낼수 있다면
저 넓은 바닷가에 뛰어 들어 물고기가 되리라.
이승에서 저지른 죄 이승으로 소멸 된다면
내 물고기 되어 낚시 바늘을 물리라.
악업은 남은 자에게 고통으로 남으니
죽음으로도 소멸될 수 없는 죄의 영원함이여.
헤아릴 수는 없으되, 그래도 건널 곳이
저만치에 있었으면 싶은 가냘픈 소망 한자락,
비록 命在一息之間이나,
오늘 가냘픈 소망 한자락 부여 잡은 기쁨에,
이승의 마지막 내 뿜는 숨 속에서나마
내세를 엮으려는 덧없는 낚시질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