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주변 한 건널목에 이제 막 50을 넘은 여인이 벌써 구부정해진
허리 뒤에 한 손을 대고 한 손엔 거무튀튀한 무명 보자기에 무언가를
싸들고, 통금 시간이 가까와 바삐 달리는 차들을 피해 잠시 섰다. 그 옆
엔 한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짧은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은 여대생인
듯 여인의 보따리에서 스미는 비린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부비
더니 차가 지나자 얼른 앞서 길을 건너 사라진다. 뒤따라 건너던 중
년의 여인은 한 손에 들린 자그만 보따리를 잠시 들어 한번 만져 보
고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만든다.
창신동...낙산 쪽으로 가는 길... 양 옆에 튀김집이며 세탁소등 가게들
은 문닫은지 오래고 가끔 배추 잎 몇 장 실린 리어카만 바쁘게 끌려간다.
오래 전에 탄력을 잃은 눈까풀은 내려앉고 통금 시간이 재촉하건만
돌산을 오르는 여인의 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겨우 싸이렌이 불기 직
전에 산 중턱 작은 골목을 돌아들어 첫 귀퉁이에 보이는 자그마한
나무대문, 언제나처럼 그저 밀면 열리니 들어선다. 콘크리트 마당에
있던 세숫대야에 반쯤 담겨 있는 얼음장같이 찬 물이라도 우선 눈에
띄니 대충 손을 씻고는 불 켜진 방, 둘째 셋째 딸,조카 딸이 자고 있는 방,
미닫이문을 열고 요 밑에 손을 넣으며 두 딸을 깨운다.
` 자니? 자니? 이거 먹겠니? 이거 먹어라. 먹고 잘래?`
`음~ 아이, 지금 몇 시야? 엄마 왔어? 나 졸려.`
`그래? 그래도 먹고 자라. 내일 아침엔 일찍 학교 가야하니 못
먹는다`
`뭔데...? 엄마. 엄만 저녁 드셨어요?`
`이제 너희 이거 먹는 거 보고 먹어야지.`
여인은 들고 온 작은 보따리에서 군데군데 검어진 바나나 세 개를 꺼
내 하나씩 손에 들려준다. 워낙 여리디 여린 둘째 딸은 잠이 덜 깬
눈에 어느새 눈물을 담으며 달콤한 바나나 살을 베어 물고, 여인은 흐믓
함에 가시 일은 손으로 딸의 흐트러진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부엌으로
가 부뚜막 위에 덮어 놓은 저녁을 그 자리에 앉아 한 술 뜬다.
이제야 더운물 두 바가지 섞어 부엌에서 간단히 목욕을 하니 오늘은
그래도 비린내가 덜 베었나 상큼한 비누향이 더 짙다.
안방엔 풍채 좋은 남편의 코고는 소리, 내려다보니 오히려 딱하다.
이북에서 피난 와서도 처음엔 그런대로 사업도 잘 되고 큰 집도 있었
건만 적산(敵産)집 잘못 사서 큰 집 하나 날리고, 인심 좋은 큰 아들이
친구 빚보증 잘못 서서 집하나 날리고...양반이라고 택시 태워 곱게
잘 키운 열 일곱된 양반집 처녀 데려올 때는 언제고 저렇게 고혈압에
심장병을 얻어 누워, 천성이 조용한 마누라 시끄러운 시장바닥에 내
놓고 비린내 나는 종이돈 몇 장 들고 밤에 오게 하고는 잠도 잘 잔다.
다음날 새벽, `여보 여보, 오늘은 안 가오? 일어나오..일어나오..음`
`예...벌써 다섯 시가 넘었네...` 여인은 매일 새벽 일찍 가야 물 좋은
생선 몇 궤짝 받을 수 있어 이렇게 하루를 열며 밖을 나서니 어둠 속
에도 두부 배달 자전거가 바쁘다.
세밑이라 시장은 머리부터 북적거린다.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지전
한 잎 아쉬워도 조상들의 제사는 거를 수 없는 터라 대목장은 서지게
마련, 여인도 한 몫 끼어 아직은 단련되지 않은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참조기 20미(尾)짜리 둘 하구예...동태...셋, 그리구 청어..하나,
가자미..하나, 오징어...하나, 꽁치...하나, 아아 오늘 민어 있구만...
민어두..하나, 이면수..하나...그럼 모두 열 한 궤짝이오. 보관소에
보내 주겠지예? `
` 예...고운 할머니`
벌써 붙여진 할머니라는 호칭에 여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둘둘
만 머리 수건 아래로 맺힌 땀을 옷소매 끝으로 닦아내고 다시 창신동
집을 향해 식전 허기를 느끼며 발을 옮긴다. 오후 네 시나 되어야 동
대문 시장 좌판에서 장이 시작 되니 직접 새벽에 나오지 않고 도매
상에 주문해도 되건만 몇 번의 실망으로 여인은 좋은 물건 받으러 이
렇게 새벽 걸음을 하고는 얼른 식구들 아침 준비를 위해 바삐 가고
있는 것이다.
애국모임인지...천도교 모임인지...그런대로 바쁜 남편은 양복차림에
모직 코트 위로 중절모를 쓰니 빈 호주머니도 감춰진다. 아침 설거지
를 끝내고 나니 열한시가 다 되간다. 여인은 한숨 자고 싶지만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20대 중반의 둘째 아들이 걸린다.
`오늘 아침 민어찌게 맛있지?`
본시 양반집 규수였던 여인은 피난통에도 요리솜씨를 잃지 않았고, 이
웃과 동서들에게도 인정받는 터라 자신 있게 묻는다.
`맛있었어. 근데...엄마, 엄마, 어제 대공수사본부에서 전화 왔었지?
내가 쓴 논문 통과 되어서 상금으로 이천만원 준대지?`
`또 쓸데없는 소리...자...이 사과 먹어라...`
`엄마도 빼 돌리는 거야? 다 한통속이지? 그래봐...그래 보라구!`
(계속)
허리 뒤에 한 손을 대고 한 손엔 거무튀튀한 무명 보자기에 무언가를
싸들고, 통금 시간이 가까와 바삐 달리는 차들을 피해 잠시 섰다. 그 옆
엔 한겨울 추위가 무색하게 짧은 미니스커트에 부츠를 신은 여대생인
듯 여인의 보따리에서 스미는 비린내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을 부비
더니 차가 지나자 얼른 앞서 길을 건너 사라진다. 뒤따라 건너던 중
년의 여인은 한 손에 들린 자그만 보따리를 잠시 들어 한번 만져 보
고는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만든다.
창신동...낙산 쪽으로 가는 길... 양 옆에 튀김집이며 세탁소등 가게들
은 문닫은지 오래고 가끔 배추 잎 몇 장 실린 리어카만 바쁘게 끌려간다.
오래 전에 탄력을 잃은 눈까풀은 내려앉고 통금 시간이 재촉하건만
돌산을 오르는 여인의 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겨우 싸이렌이 불기 직
전에 산 중턱 작은 골목을 돌아들어 첫 귀퉁이에 보이는 자그마한
나무대문, 언제나처럼 그저 밀면 열리니 들어선다. 콘크리트 마당에
있던 세숫대야에 반쯤 담겨 있는 얼음장같이 찬 물이라도 우선 눈에
띄니 대충 손을 씻고는 불 켜진 방, 둘째 셋째 딸,조카 딸이 자고 있는 방,
미닫이문을 열고 요 밑에 손을 넣으며 두 딸을 깨운다.
` 자니? 자니? 이거 먹겠니? 이거 먹어라. 먹고 잘래?`
`음~ 아이, 지금 몇 시야? 엄마 왔어? 나 졸려.`
`그래? 그래도 먹고 자라. 내일 아침엔 일찍 학교 가야하니 못
먹는다`
`뭔데...? 엄마. 엄만 저녁 드셨어요?`
`이제 너희 이거 먹는 거 보고 먹어야지.`
여인은 들고 온 작은 보따리에서 군데군데 검어진 바나나 세 개를 꺼
내 하나씩 손에 들려준다. 워낙 여리디 여린 둘째 딸은 잠이 덜 깬
눈에 어느새 눈물을 담으며 달콤한 바나나 살을 베어 물고, 여인은 흐믓
함에 가시 일은 손으로 딸의 흐트러진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부엌으로
가 부뚜막 위에 덮어 놓은 저녁을 그 자리에 앉아 한 술 뜬다.
이제야 더운물 두 바가지 섞어 부엌에서 간단히 목욕을 하니 오늘은
그래도 비린내가 덜 베었나 상큼한 비누향이 더 짙다.
안방엔 풍채 좋은 남편의 코고는 소리, 내려다보니 오히려 딱하다.
이북에서 피난 와서도 처음엔 그런대로 사업도 잘 되고 큰 집도 있었
건만 적산(敵産)집 잘못 사서 큰 집 하나 날리고, 인심 좋은 큰 아들이
친구 빚보증 잘못 서서 집하나 날리고...양반이라고 택시 태워 곱게
잘 키운 열 일곱된 양반집 처녀 데려올 때는 언제고 저렇게 고혈압에
심장병을 얻어 누워, 천성이 조용한 마누라 시끄러운 시장바닥에 내
놓고 비린내 나는 종이돈 몇 장 들고 밤에 오게 하고는 잠도 잘 잔다.
다음날 새벽, `여보 여보, 오늘은 안 가오? 일어나오..일어나오..음`
`예...벌써 다섯 시가 넘었네...` 여인은 매일 새벽 일찍 가야 물 좋은
생선 몇 궤짝 받을 수 있어 이렇게 하루를 열며 밖을 나서니 어둠 속
에도 두부 배달 자전거가 바쁘다.
세밑이라 시장은 머리부터 북적거린다. 극심한 경제공황으로 지전
한 잎 아쉬워도 조상들의 제사는 거를 수 없는 터라 대목장은 서지게
마련, 여인도 한 몫 끼어 아직은 단련되지 않은 목소리로 주문을 한다.
`참조기 20미(尾)짜리 둘 하구예...동태...셋, 그리구 청어..하나,
가자미..하나, 오징어...하나, 꽁치...하나, 아아 오늘 민어 있구만...
민어두..하나, 이면수..하나...그럼 모두 열 한 궤짝이오. 보관소에
보내 주겠지예? `
` 예...고운 할머니`
벌써 붙여진 할머니라는 호칭에 여인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둘둘
만 머리 수건 아래로 맺힌 땀을 옷소매 끝으로 닦아내고 다시 창신동
집을 향해 식전 허기를 느끼며 발을 옮긴다. 오후 네 시나 되어야 동
대문 시장 좌판에서 장이 시작 되니 직접 새벽에 나오지 않고 도매
상에 주문해도 되건만 몇 번의 실망으로 여인은 좋은 물건 받으러 이
렇게 새벽 걸음을 하고는 얼른 식구들 아침 준비를 위해 바삐 가고
있는 것이다.
애국모임인지...천도교 모임인지...그런대로 바쁜 남편은 양복차림에
모직 코트 위로 중절모를 쓰니 빈 호주머니도 감춰진다. 아침 설거지
를 끝내고 나니 열한시가 다 되간다. 여인은 한숨 자고 싶지만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20대 중반의 둘째 아들이 걸린다.
`오늘 아침 민어찌게 맛있지?`
본시 양반집 규수였던 여인은 피난통에도 요리솜씨를 잃지 않았고, 이
웃과 동서들에게도 인정받는 터라 자신 있게 묻는다.
`맛있었어. 근데...엄마, 엄마, 어제 대공수사본부에서 전화 왔었지?
내가 쓴 논문 통과 되어서 상금으로 이천만원 준대지?`
`또 쓸데없는 소리...자...이 사과 먹어라...`
`엄마도 빼 돌리는 거야? 다 한통속이지? 그래봐...그래 보라구!`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