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1970.01.01 09:33

망명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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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에게 들려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얼마 전 제가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네 분의 망명객중 한 분이
他界하셨다는 悲報를 전해 들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를 수기로 쓴 분입니다.
이런 글로서라도 그 분을 追慕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98년 불가리아에 처음 갔을 때 북한 유학생 출신 망명객
네 분이 그곳에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당시 북한사람 소리만 들어도 겁이 덜컹 났던 나는
그 곳 사람들을 마치 外界人처럼 인식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만나는 것이 두려울 정도였지요.

그들은 1950년대 중반에 김일성 체제에서 黨性이 강하고 머리가 좋아
모범학생으로 뽑혀 당에서 마련해준 새 옷을 입고 머나먼 불가리아까지
열흘씩이나 기차를 타고 온 젊은 북한 유학생들입니다.
소피아 대학에서 공부를 했던 化學, 工學, 農業 등 주로 이공계
학도들이었습니다.

북한보다 자유로운 동유럽에서 얼마간 살아본 이 젊은이들은
당연히 뭔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유럽에서 유럽 물이 안 들게 하려는 것은 처음부터 矛盾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思想교육과 자아비판, 끝없는 재충전을 받았지만
타오르는 自由를 향한 불길을 아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들 중 한 분은 그 당시 무슨 위원장이라는 감투를 써서
불순한 생각을 가진 학생들을 골라내는 '게스타포' 같은
책임자였답니다. 그러니 학교공부와 사상교육 그 이외에
外國人과의 자유로운 만남이나 남녀 간의 사랑은
그들로서는 상상할 수가 없는 奢侈스러운 이야기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이럭저럭 그들이 유학 온 지 4-5년이 지나
돌아갈 때가 거의 되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북한체제에 대해
懷疑를 품은 4명의 학생들은 누구하고 상의할 수도 없었습니다.
亡命을 한다는 것은 生과 死의 갈림길을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만일 상의를 하다가 잘 못하면 누설될 위험이 컸겠지요.

드디어 그들의 마음속 결심을 실행할 단계가 찾아 왔습니다.
함께 온 유학생 수십 명 모두 평양으로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
바로 그 전날 저녁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학교 뒤편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 만난 그들 네 북한 학생은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읽고 무의식중에 손을 꽉 잡았습니다.

그 길로 즉시 그들은 소피아 근교 2천 3백 미터 높이의 '비토샤 산'
속으로 숨어들었습니다. 물론 각자의 소지품을 챙길 틈도 없었고
다만 당분간 延命할 정도의 빵 값 몇 푼만 가지고 있었답니다.
산 속에서 그들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즉, 김일성체제는 진정한 共産主義가 아니므로 망명한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이러한 뜻을 모아 공동 명의로 망명선언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게 됩니다. 저도 그 선언문을 읽어 봤는데,
요지는 결코 공산주의가 나빠서 망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김일성 독재체제에 반대하기 때문에 망명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북한으로 송환되면 처형밖에 기다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당초 예상의
범위를 넘어서, 공산주의 내의 헤게모니 쟁탈전과도 연관이 되는
중대한 문제로 발전되어갑니다. 그 당시 理想사회 구현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있는 공산주의 세계 내에서 이러한 분규는
전체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중대한 挑戰'을 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구소련과 중공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은
비공식적으로 서구사회에 알려진 것이고,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공산주의는 하나였지요. 그래서 이 문제는 북한뿐만이 아니라
구소련이나 중공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도 밖으로 불거지는 것을
꺼려하여 쉬쉬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중소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 이용도 되었답니다.
즉, 흐르시쵸프가 국제공산당 전당 대회에서 이 사건을 引用하면서
간접적으로 중공체제를 비판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서 구소련 측과 중공측은 입장이 달랐습니다.
당시 북한은 중공 편에 서 있었고 본국 송환을 당연시 했습니다.

반면, 불가리아는 겉으로는 북한의 뜻에 순응하는 체 했으나
내심으로는 이들의 북한 송환에 은근히 消極的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철저한 소련 衛星國家인 불가리아는 결코 고운 눈으로
북한을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가리아의 비밀첩보원들은
오히려 그들의 隱居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불가리아가 얼마나 구소련과 가까웠는지 이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주 불가리아 소련대사관 안에서 불가리아 閣議를 주재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금의 러시아 대사관엘 들어 가보니 그 당시의
'빅 브라더'로서의 구소련의 威嚴을 능히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굉장한 대사관 건축물과 마을과 같은 직원 숙소 아파트가 있더군요.

어쨌든 북한으로서는 어떻게든 이들을 색출해서 소환을 해야 되는
중대한 문제였지요. 결국 당시 북한 대사 임춘추는 이 문제 때문에
본국으로 소환됩니다. 북한은 이들 학생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중공,
루마니아와 알바니아 같은 친 중공 계 국가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소피아 시내를 온통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공산주의 세계에서 일어났던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잘 몰랐던 일이지요. 89년 소련이 붕괴되고 불가리아와
우리가 수교를 하고 나서 비로소 일부나마 알게 된 것입니다.
정작 당사자들은 아직도 자기들의 이러한 이야기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말하기를 주저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비토샤 깊은 산 속에 숨어 연명하고 있은 지 20여일,
산 속에만 있으니 전혀 바깥 사정을 모르게 된 이들은
그만 誤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 측이 설마 아직도 자기들을
찾고 있겠느냐고. 지루해진 젊은 그들은 어느 날 조심스레
소피아 시내로 나와 어둠 컴컴한 극장 안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그러나 감시자들의 그물망에 걸리고 맙니다.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붙잡혀 북한 대사관에 감금되기에 이릅니다.
불가리아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답니다. 다만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그들을 마치 짐승을 우리 안에 가두듯이 거칠게 다루는 것만을
막아줄 정도였습니다.

외국에 있는 북한대사관이 거의 다 그렇듯이 그 위치나 건물의
규모에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즉, 위치는 한가한 곳 또는
막다른 길 같은 곳에 있어 접근하거나 감시하기 어려운 곳이고,
또 건물 규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비현실적으로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직원들 모두가 集團生活을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리아에 있는 북한 대사관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당시 북한 대사관은 지금도 그대로 쓰여 지고 있지요.
외딴 곳, 엄청나게 큰 건물에 웬 안테나는 그리 많은지.
지나면서 얼핏 볼 뿐, 결코 들어가 볼 수가 없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두 명씩 각각 다른 방에 두 달이 넘도록 감금되어
있었던 거지요. 그러던 중 어느 날 평양에서 취조를 하러
국가보위부 직원들이 들이닥쳐 얼마간 심한 취조를 받았는데 협박과
회유의 연속이었답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곧 평양으로 압송될
것으로 느꼈고 다급하게 살아날 길을 궁리하게 됩니다.

우선 이들 중 같은 방에 있던 두 명은 치밀한 계획아래 탈출을
결심합니다. 감시하던 북한 대사관 직원 부인이 아기 젓을 먹이려
잠깐 자리를 비운 기회를 이용했습니다.
이불로 끈을 엮어 4층 창문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딴 방에 있던
나머지 2명은 이러한 사정을 전혀 알 수가 없었지요.

그러나 그들은 그들대로 전혀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항에서 탈출한다는 계획인 데, 여권이 없으면
출국 수속을 밟을 수 없다는 데 着眼을 한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보통 해외에 있는 자국민의 여권을 모두 압수해 보관
하다가 출국수속을 밟을 때 내어 주지요. 離脫을 우려해서입니다.

며칠 뒤 실제 계획했던 대로 둘은 공항에서 여권을 받아 쥐는 순간
여권을 찢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비행장 tar mac 을 향해 무조건
뜁니다. 이 때 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소피아 대학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이들은 劇的으로 탈출에 성공합니다.
물론 앞서 탈출에 성공한 두 사람의 힘이 컸지요.

당시 그렇게도 엄한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불가리아 학생 중에
反體制 학생들이 존재했다고 합니다. 이들을 도운 불가리아 학생들
중에도 그런 반체제 성향의 학생들이 있었는가 봅니다.
이들 불가리아 학생들 중 하나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91년-97년까지 불가리아 공화국 대통령이 된 젤레프씨 입니다.

우리가 이 전직 대통령과 우리 관저에서 식사를 했을 때
젤레프 전 대통령은 그 때의 장면과 그 당시 국제정세를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 해 줄 정도로 생생하게
그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4명의 당사자들은 현장에서의 상황을 알지만, 결코 그들의 행동이
국제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는 까마득하게 몰랐지요.

이렇게 해서 일단 망명에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이들의 떠도는
國籍이 문제가 됩니다. 북한 눈치를 보던 불가리아 정부는 이들에게
함부로 불가리아 국적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다만 불가리아 당국은
이들에게 북한 대사관의 눈길이 잘 미치지 않는 '스타라 자고라'라고
하는 먼 시골에 머물도록 하는 정도의 배려는 했지만.

거기서 불가리아 당국의 도움을 받아 못다 한 공부를 계속해서
박사학위까지 받습니다. 공산주의 세계에서는 박사라고 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박사가 아닙니다.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자격증을
받아도 모두 꼭 같이 노동자 봉급을 받으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90년대 초반 은퇴할 때까지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그 동안에 이들 중 세분은 용감한(?) 현지 여인들과 만나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드러내 놓고 살지 못하는 망명객으로서
말 못할 迂餘曲折이 있었던 가 봅니다.
불가리아의 눈치, 북한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니까요.
그 중 한 분은 평생 獨身입니다.

독신의 변 - '나 같은 무국적자와 결혼할 여자가 불쌍해서' 라고.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것이 빈말이 아니라
정말 행동으로 실천하는 휴머니스트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조용한 성격의 60대 말,
쓸쓸해 보이는 그 분 생각이 지금도 가끔 납니다.

88 서울 올림픽을 보고 그들은 무척 쇼크를 받았다고 합니다.
TV 화면을 보고 '도대체 저건 무슨 별나라의 일인고?
그들에게는 평생 동안 오직 공산주의 세계만 봤었고,
북한만 나라로 알고 있었다가 갑자기 그런 장면을 보고
歡喜와 함께 잃어버린 세월의 허망함을 한꺼번에 느꼈다지요.

역사의 전환, 즉 구소련 체제의 붕괴는 이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1989년 어느 날, 그 도시에서 열린 국제 산업 박람회장에서
그들은 떨리는 가슴으로 대한민국 코트라 직원에게 다가갑니다.
넘쳐나는 눈물을 참으며 잘 안 나오는 한국말을 하기에 이릅니다.
感激이라는 말은 이런 때 써야할 것입니다.

그로부터 1년 후, 드디어 한국과 불가리아가 修交하게 되었고
그 후 이들 중 일부는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됩니다.
여러분, 국적이라는 것에 대해 별로 생각 안 해 보셨지요?
우리는 날 때부터 자연스럽게 대한민국 사람이 되니까
관심이 없을 수밖에요.

국적이 없다는 것은 상상을 뛰어 넘는 悲哀입니다.
국적이 없어 행동과 사고의 운신 폭이 좁아서 고통스럽고
천대받는 서글픔을 당해보지 않은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결코 먼 이야기도 아닙니다.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는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왜 그토록 슬펐겠습니까.

이 나라에 가면 저 나라로 추방되는 팔레스타인인 같은
그런 국제 떠돌이 신세의 비애를 우리가 어찌 이해하겠습니까.
인도에서 떠도는 티벹트인들, 시킴 사람들의 만년 슬픈 표정들,
바스크 족, 알바니아 인, 해결할 길이 없는 쿠르드 족, 집시...
이 세상에는 아직도 국적이 없는 민족이 많다는 군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십 여 년을 살아 본 그들은 이제 70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 서슬이 시퍼렇던 한 체제를 부정하던 남다른 패기는
어디 가고 이제는 無氣力하게 겨우 겨우 오늘을 살아갈 뿐입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이.

이런 인생 역정을 보면서 나는 진정한 의미의 그들의 인생은
1961년 망명선언과 더불어 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힘을 한꺼번에 쏟아 부어 그만 무기력해져 버렸고
그 이후는 그저 덤으로 살아가는 인생일 뿐이라고
인간은 참으로 모진 것같이 보여도 결국 약한 존재인가 봅니다.

이 망명객들은 지금도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만 입을 다뭅니다.
북한에 관한 한 그들의 기억과 시간은 아직도 한 곳에 머물러서
흘러갈 줄 모르는 가 봅니다.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 모르는 가족들을 생각하고...
자라보고 놀란 사람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말이 적절할 겁니다.

그들이 하는 한국말은 5, 60년대의 북한 언어에다가 그나마
불가리아 식 발음이 섞여서 어떤 때는 영어보다도 더 알아듣기가
힘듭니다. 말도 안 쓰면 어눌해지고 退色해 지는 가 봅니다.
한국 사람도 아니고 불가리아 사람도 아닌 그들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영 지워지지를 않습니다.

(200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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