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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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이재-봉화산-월경산-중재-백운산-영취산 / 2003년 4월 13일



새벽 4시 30분. 복성이재에서 대간이어가기를 시작했다. 동쪽으로는 남원시 아영면인데 고갯길을 따라 내려가면 흥부마을이 있다고 한다. 판소리 박타령에 나오는 흥부와 놀부는 유치원생들도 다 안다. 이의 근원설화는 방이 설화이다. 방이설화(旁 說話)를 백과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금추설화(金錐說話)라고도 하는데 중국에까지 전해져 당(唐)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속집(酉陽雜俎續集)> 권1, 《태평어람(太平御覽)》 권 41,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 부권(附卷) 중의 괴설변증(怪說辯證) 방이조(旁條)에 각각 실렸다 한다. 그 내용은 이렇다.

신라시대에 김방이(金旁 )가 살았는데 그의 아우는 부자였고, 형인 방이는 몹시 가난하였다. 어느 해 방이는 아우에게 누에와 곡식 종자를 구걸하자 심술사납고 성질이 포악한 아우는 누에와 곡식 종자를 삶아서 형에게 주었다. 이를 모르는 방이는 누에를 열심히 치고 씨앗도 뿌려 잘 가꾸었다. 그 중에서 단 한 마리의 누에가 생겼는데, 그것이 날로 자라 황소만큼 컸다. 소문을 듣고 샘이 난 아우가 찾아와 그 누에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러자 사방의 누에가 모두 모여들어 실을 켜 주었으므로 형은 ‘누에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곡식도 한 줄기밖에 나지 않았으나, 역시 이삭이 한 자가 넘게 자랐다. 하루는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이삭을 물고 산 속으로 달아났다. 새를 쫓아서 산 속 깊이 들어갔던 방이는 해가 저물어 돌 옆에 머물게 되었다. 그 때 붉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 나타나 금방망이[金錐子]로 돌을 두드리니 원하는 대로 음식이 다 나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이를 먹고 놀더니 금방망이를 돌 틈에 놓아두고 헤어졌다. 방이가 그 금방망이를 주워서 돌아오니 아우보다 더 큰 부자가 되었다. 심술이 난 아우는 형처럼 하여 새를 쫓아가 아이들을 만났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지난번 금방망이 도둑으로 몰려 사흘이나 굶주리며 연못을 파는 벌을 받고 코끼리처럼 코를 뽑힌 다음에야 돌아왔다. <흥부전(興夫傳)>은 이 설화를 번안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며, ‘코 떼었다’ 또는 ‘내 코가 석 자’라는 속담도 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신라가 통일을 한 후 남원은 9주5소경으로 편제한 행정구역 가운데 하나였다. 남원경이었던 것이다. 방이 형제가 실제로 남원에 살았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보니 흥부와 놀부의 본관이 남원이라 주장해도 다른 시도에서 강력하게 반박을 못할 것이리라.

복성이재에서 봉화산(919m)에 오르는 구간은 철쭉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어둠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관목들이 다 철쭉인 듯 하였다. 손전등에 의지해 어둠을 헤치고 1시간 반 정도 오르자 먼동이 부옇게 트기 시작했다.

6시 무렵 봉화산 정상에 올랐다. 이곳에는 삼국시대에 백제의 아막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정상부근에 돌무더기가 쌓인 것이 보였다. 이것이 봉수대를 쌓은 돌로 추측이 되었다. 이곳 봉화산에도 봉수대가 있었던 것일까. 전국에 봉화산이란 이름이 수도 없이 많다.

봉수(烽燧)는 밤에 불로써 알리는 봉(烽), 즉 연봉(燃烽)과 낮에 연기로 알리는 수(燧) 즉 번수(燔燧)를 합친 말이다. 봉수는 대개 수십리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망하기에 유리한 산꼭대기에 연대(燃臺), 즉 봉수대를 설치하여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신호를 보내는 주연야화(晝煙夜火)의 방법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비가 오거나 안개, 구름이 덮여 연락이 불가능할 때에는 봉수군이 직접 차례대로 달려가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AD42년 전후에 이미 봉화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나고 있다. (<삼국유사> 권2 가락국기) 또한 <삼국사기>에는 백제 온조왕 이후로부터 '봉현(烽峴)', '봉산(烽山)', '봉산성(烽山城)' 등 봉화와 관련된 의미를 지닌 지명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산악국가이어서 봉수는 가장 효율적인 통신수단이 될 수 있었으며 중앙집권적 지배가 지속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리라 생각된다.

봉수가 제도화 된 것은 고려시대 중엽으로 당시는 4개의 횃불로 상황을 전달했으며, 조선시대 세종 원년(1419년)에 이르러 5개의 횃불을 사용하는 봉수제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세종조 중기 이후 남방의 왜구와 북방의 야인들에 대한 정벌이 성공하면서 이들에 의한 침략위협이 사라지자 봉수제의 실효성이 의심받기 시작하여 한 때는 아예 혁파되기도 하였으며, 을묘왜변(1555년)이나 임진왜란 등의 전란이 있어서는 아무런 효능을 발휘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이후 존폐논의가 거듭되면서 봉수제도는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하다가 1855년 근대식 전기통신이 도입되면서 전신전화가 설치되었고 이에 따라 봉수제의 필요성이 희박해지자 먼저 경남의 망산봉수와 의봉산봉수가 고종 26년(1889)에 폐지되고, 고종 31년(1894)에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 봉수대에 불을 피우기 위해 밤낮으로 산에 올랐을 민초들의 삶이 생각났다.


봉화산에서 월경산으로 용틀임하는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월경산으로 꿈틀거리며 이어지는 용(龍)이 장대하다. 능선 부위는 온통 억새밭이다. 산불이 났었다고 한다. 밋밋하게 흐르는 능선을 따라 금새 중치에 당도하였다. 해발 650미터의 중치 고개 몬댕이에서 봉화산과 월경산을 넘은 다리를 쉬었다.
중치에서 백운산(1,278m)을 오르는 능선은 매우 가팔랐다. 벌써 식수도 고갈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백두대간을 빨리 주파해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천천히 갈수록 백두대간을 많이 볼 수 있다. 산마루에 수북히 깔린 가랑잎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겼다. 두런두런 소리를 내며 대원들이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뒤처진 일행을 만나 다시 팍팍한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 음지에서 잔설을 만났다. 이 산에서 음기가 가장 센 곳이리라. 그곳에서 싸온 김밥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마침내 백운산 정상에 당도했다. 먼저 당도한 대원들이 여기저기 픽픽 쓰러져 봄볕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다. 많은 등산객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점심을 차려먹고 있었다. 된장과 풋고추를 얻어 마지막 남은 소줏병을 꺼내어 정상주를 하였다.

백운산에서 우측 능선으로 난 지맥을 따라가면 함양군 서상면 서래봉이 나오고 대간은 방향을 틀어 서북쪽으로 흐른다. 백운산에서 호남금남정맥이 갈라지는 영취산까지는 3.6km이다. 서쪽으로 맞은편에는 해발 1,236m의 장안산이 우뚝 솟아있다. 호남금남정맥에 속하는 산이다. 산죽과 굴참나무, 신갈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선 능선을 따라 쉽게 영취산(1,076m)에 도달했다. 이곳에서 11km북상하면 육십령에 이른다.
좌로 방향을 틀어 호남금남정맥을 따라 하산하기 시작했다. 영취산 정상에서 1km쯤 호남금남정맥을 따라 내려오면 무령고개가 있다. 이 고개는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북으로 금강수계 장수군 장계면이고 남으로는 장수군 번암면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최근 공사한 것으로 보이는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호남금남정맥을 악랄하게 끊어놓고 있었다. 터널을 뚫거나 동물 이동통로라도 해놓아야 할 것 아닌가. 그동안 우리는 성장 위주의 개발논리를 내세우며 대대로 물려받은 이 강토, 후손 만대에 물려주어야 할 이 산하를 철저히 파괴하여왔다.

동물들의 이동통로이기도 한 우리 국토의 상징 백두대간이 곳곳에서 허리를 잘려 아스팔트대간이 돼버렸고, 세계 5대갯벌 중 하나인 우리 서해갯벌,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커다란 혜택이며 생명의 보고인 갯벌을 지난 40년 동안 민관이 합심하여 파괴하였다. 골프장을 만든다고 산을 헐고 도로를 낸다고 들판을 잡아먹었으며, 수많은 댐들이 계곡을 덮쳤다. 삽교천을 필두로 안성천, 낙동강, 영산강, 금강 등의 하구를 두드려 막아버려 귀중한 하구역 생태계를 파괴하고 마지막 남은 동진강 만경강 하구도 막고 있다. 이것이 새만금간척사업이다. 이러한 개발사업에서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멸종돼버린 생명체들이 얼마인가.

'죽임의 굿판'이 이곳에서도 벌어졌구나. 이로써 정읍 내장산, 광주 무등산, 승주의 조계산 등의 명산은 백두대간과 일찌감치 이별을 한 것이다. 근처에서 서성대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하여 카메라에 담았다.


뿌리부터 잘린 호남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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