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재미라는 게 새로운 자연과 사람과 풍물, 그리고 음식을 접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수구초심으로 돌아오는 게 입맛 같다. 그렇게 새로워 보이던 현지 음식들이 그리고 먹은 햇수로 보면 내 나라 음식 먹듯 한 것 같던 양식의 음식 냄새가 서서히 역겨워지며 된장찌개며 육개장 맛이 그리워지게 된다.
내 경우는 한식을 구할 수 없는 경우 대체음식으로 일식을 먹곤 했는데 하기사 생선구이나 매운탕이야 사실상 한식이나 다름없으니 그렇다 치겠지만 의외로 스시 즉 초밥은 쉬이 물리지를 않아 여행 중 현지음식에 식상할 경우 먼저 떠오르는 음식의 하나가 되었다. 다만 고놈의 값이 일반 음식에 비해 비싼 편이라 주저되긴 하지만 말이다.
인도네시아에 가 호텔에 투숙하는 경우 음식걱정을 덜어주는 효자음식이 하나 있다. 아침 부폐메뉴에 꼭 나오는 식단인데 닭죽(Chicken Rice Porridge)이 그것이다.
죽은 죽인데 우리의 죽이나 일본의 죽과는 다르다. 우리와 일본의 것이 물의 양이 많아 걸죽한데 비해 인도네시아의 죽은 죽이 아니라 떡이다 싶은 정도로 되다. 그게 오히려 맛을 더한다. 닭죽이라 하여 닭살을 넣어 끓이는 것이 아니라 되지게 끓인 죽을 퍼 그 위에 삶아 말려 놓은 닭살을 넣고 간장을 쳐서 먹으면 된다. 맛이 일품으로 아침부터 평상심을 잃기 십상이다.
인도네시아는 천혜의 옥토에 수려한 풍광을 받은 복된 국가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발리를 비롯하여 그 정도의 유원지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런 평화의 나라에 얼마 전 발리에서 발생했던 폭탄테러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면서 수많은 호텔과 유원지가 을씨년스럽게 비어 있었다.
음이 있으면 양이 있게 마련인가? 손님을 끌어보려는 호텔 일식당의 기발한 아이디어로 인해 느닷없이 내가 횡재(?)를 하게 되었다.
라마단 즉 금식월이 종료되던 날 아침 양식당에서 커피를 한 사발 마시고 나오다가 그 옆 일식당 앞에 붙여놓은 작은 광고문구를 보게되었다. [100,000 루피아를 내고 먹을 수 있을 만큼 스시를 드세요]
10만 루피아면 미화 약 11 불, 한국사람끼리는 흔히 그냥 만원 어치로 부르는 단위이다. 나는 눈이 동그레지며 가슴까지 뛰는 걸 느꼈다. 옳지. 어서 점심시간이 되라.
12시 5분, 아무도 없는 일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 주저 없이 스시카운터에 자릴하고 종업원을 불렀다. 밖에 써 붙인 게 아직 유효하냐를 물으니 그렇단다. 인도네시아 원주민 출신의 주방장과 대좌하여 그때부터 나의 스시 먹기 게임이 시작되었다. 농 삼아 지금까지의 기록을 물으니 미국인 거한이 먹은 46개가 기록이란다. 그래? 마흔 여섯 개면 많은 건가? 어디 해보자.
주방장이 맨 먼저 어느 생선으로 시작하겠느냐고 묻길래 스시 매니아답게 전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전어로 시작하여 참치 등 각양의 생선으로 이어진 스시 만들기와 먹기는 20 개까지는 일사천리였다. 불필요한 스페이스를 만들지 않으려고 된장국과 물도 마시지 않으며 스시만을 직방 공격을 하였건만 20개가 넘어가자 포만감이 전달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성을 일깨워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명예(?)를 위해 성질을 부려봐? 아니지 배부르게 먹으면 됐지, 이 나이에 명예는 무슨 명예냐. 명예 찾다 몸만 망가지지.
나는 후자를 선택키로 하고 꼭 먹고싶은 생선을 짚어 6 개를 더 먹고 자리를 일어섰다. 주방장에게 빙그레 미소를 건네주며.
인도네시아는 나한테 또 한번 멋진 추억을 선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