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1970.01.01 09:33

시월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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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를 택한 데는 특별한 ‘이유’가 없다. 그 곳에 친한 친구가 있기 때문에 잠자리
가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말이다. 사람들이 진주를 생각할 때 남강을, 촉석루를, 논개를 떠올릴 무언가의 기억이 있을 테지만 나에게는 썩어 가는 마산 앞 바다가, 바다를 향한다는 가포의 바이킹이, 논개를 닮은 ‘그녀’가 생각날 뿐이다. 그녀가 마산 중앙동 자기 집에서 라디오주파수를 맞추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마산을 떠날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이다. 이렇듯 진주로 향할 아무런 까닭이, 내게는 없는 것이다.

다섯시 오분 통일호(統一號)가 발착하는 것을 눈앞에서 놓치고는 망연히 서 있었다. 이 것은 촉박한 시간에 쫓겨 택시를 탔을 때부터 예감한 일이었고 눈앞에 여실히 드러났을 뿐인데도 몇 분전의 시간은 고대(古代)로 흘러 버렸고 나는 안도하고 있었다.
기차가 무슨 결함으로 발착시간이 늦추어지기라도 했었다면 나는 당황했을 지도 모른다. 그 만 분의 일(1/10000)쯤의 확률은 나의 운명을 바꿀 찬스였음에도 불구하고 유유히 피해 가버린 것이다.

나의 발길은 자연스럽게 역전 공중전화부스로 향하고 있었다. 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동전을 꺼냈다.
1180원, 하필이면 그녀의 집 전화번호 끝자리일게 뭐람.
오랜 시간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을 까닭도 없고 처지도 아닌 걸 알면서도 무작정 그녀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가족 중의 누군가가 받는다면 끊어버리자고 생각했으나 다행히도 그녀가 받아 나의 갈등을 덜어 주었다.

「나야.」

다섯시 오십사분 무궁화호(無窮花號). 개찰구 맨 앞에서 삼십분을 보낸 보람을 고스란히 팽개치고 사람들 옆으로 반원을 그리며 뒷줄에 섰다.
시월 마지막 금요일. 그 바람을 앞서서 맞을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진주행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 틈에서 나를 포함해서 단 두 사람뿐이었다. 잔뜩 짐을 진 서른 중반의 아주머니와 나. 나와 그녀이기를 바랬던 것이 엇갈리게 이루어진 셈이다. 우리 둘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4분 후에 다시 닫혔다가 열릴 개찰구를 향한 이들이었다. 대구행 기차를 타기 위해 말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구행 기차를 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곳에도 나를 재워줄 만한 친구는 있었고, 논개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그녀를 대구의 어떤 상징물과 빗대어야 할 지에 대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만 빼면 말이다.
2번 홈을 향해 내려가면서 몇 번이고 전신 거울과 맞닥드려야만 했다. 나의 낡은 가을 옷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는 그 거울들을 애써 외면하면서 걸었다. 그녀와 나란히 할 수 없다는 위기감에 초라함이 밀려오는 순간임을 오래도록 기억나게 할 것이다.

상행선(上行線)을 탔음에도 여기를 행선지로 삼은 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아직 더운 마산을 찾아드는 그들이 나의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가 없을 따름이다.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나 역시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서로를 위해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주어진 좌석에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마산까지 오는 데 있어서 피곤해서 오던 내내 잠을 잤던 모양이다. 뒷머리는 눌러져 보기 싫게 헝클어져 있었고 젖은 눈꼽이 들러붙어 있었다. 그의 신경질적인 인상은 손가방에서 삐져 나온 약봉지의 의미까지 헤아리게 하고도 남았다. 내가 그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나보다 단지 서른 해쯤 더 살았음직하다는 것과 잔뜩 싼 짐을 경계하는 눈빛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대로 그의 모습엔 삶을 향한 집착이 있었다. 그의 다부진 입매 때문에 말을 걸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반대편 자리에 앉았다. 1시간 18분이 걸릴 이 시간으로의 길을 그와 나란히 하기에는 삶의 의미가 달랐다.

기차는 멈출 때의 쇳소리를 다시 한 번 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포기의 눈으로 밖을 바라다 보았다. 기차는 떠나가면 그만 인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떠남을 간절한다. 그러나 떠남이 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 움직임에 부동하는 여느 사람들 틈으로 아이들의 목소리가 쨍쨍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마른 땅에도 싹은 틀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난다. 생명이라는 것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지만 생명을 발아(發芽)하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들에게 어린 시절이 존재했었기 때문에 생명을 가진 적이 있다는 기억이 있을 뿐이다. 그 기억은 사람에게 죽을 때까지 혼자이게 할 것이다.

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들떠 있을 수 있는, 고리타분하게 이별이나 생각하고 마는 세월을 퍽이나 먹은 사람들 틈으로 주위의 눈치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것도 시월 마지막 주말에 말이다, 이렇듯 어린 사람들뿐이다.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하이톤의 아이들 목소리 뒤로

「젓가락 두 짝이 똑같…….」

조심스럽고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여자는 정말이지 젓가락 두 짝이 똑같은지 자신이 없을 것이다. 의심해 보지 않으면 결코 믿을 게 없는 이 곳의 생리를 안다면 말이다.

지금은 하이톤으로 또랑또랑하게 노래하는 저 아이들도 십 년, 이십 년 후면 저 여자처럼 조심스러워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야 말겠지만.

「무엇이 무엇이 고운걸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생각으로 가사를 지으려 든다. 그 것으로 가끔 어른들을 놀래키고 아이들은 어른들이 놀란다는 사실을 즐긴다. 아이들이 영악한 것이 아니라 어른들이 바보스럽다. 아이들이 생각을 한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므로 놀랄 필요가 전혀 없다. 내 반대편에서 눌러진 머리를 애써 쓰다듬으며 아이들을 귀찮은 눈으로 쫓고 있다. 걸핏하면 당장이라도 고함을 지를 듯하다. 그 아이들이, 그들의 젊음을 이기지 못해 예까지 돌진해 온다면 그 젊음에 기가 질려 버릴지도 모른다. 그럼 고함이 터지겠지. 다른 사람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와 아이들을 볼 것이고 그는 어른이라면 당연히 공공장소에서 떠드는 아이들을 야단칠 권리가 있다고 딱딱한 어조로 이야기하겠지. 뻔한 잔소리겠지만.

그러나 아이들은 더는 그의 신경을 긁지 않고 낮아진 목소리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내 예상이 빗나감과 동시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나는 여전히 아이들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하늘과 바다가 고운거지.」

이렇듯 아이들은 아직 손에 잡을 수 없는 것을 자기 것인양 축복하고 사랑함으로서, 쉽게 포기하고 마는 우리와는 다른 존재들이다.
그러나 나에게도 저 아이들처럼 손에 잡을 수 없지만은 내 것 인양 사랑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말이다. 지독한 슬픔이나 나 같은 놈이나 찾아다니는 고독 따위는 그녀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기차는 중리를 지나 함안역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십 일을 살았다는 중리를 가본 적이 있다.

그녀가 무의식중으로 그 곳의 이름을 말했을 때 나는 가고야 말겠노라고 벼루고 있었다. 그리고 가고야 말았다. 그녀의 흔적은 찾으래야 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황황히 다녀왔다.

그녀가 일 년을 살았다는 함안이란 곳도 가 보았다. 그 곳을 시내버스로 두 시간정도를 돌면서 그녀의 냄새를 희미하게 맡고 돌아왔다.
이제 그녀가 십 년쯤 살게될 지도 모를 진주로 가는 것이다.-이 것은 가능에 대해 말할 뿐 그 이상은 아니다.- 그녀에게 미래의 시간, 그러나 나에게는 현재의 시간으로 말이다.

「고독해서 떠나.」

「고독 군자!」

「…….」

「선배, 가을 타나봐.」

「그럴지도 모르지.」

「어디로 가는 데?」

「진주.」

「언제쯤 가는 거예요?」

「지금.」

「꼭 가야 되나요?」

「…아마도.」

「조심해서 다녀와요.」

「그래.」

…그녀와의 통화는 나를 떠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나에게 ‘고독군자’라고 부르는 그녀를 실망시킬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위해서’라는 특별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묻지 않은 것이 나를 불안케 했다. 돌아오고야 말 어떤 이유가 있을 테니 걱정할 필요가, 무언가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저 편에서 그녀는 무언(無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통화가 끊기고 수화기를 내려놓음과 동시에 동전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 좁은 반환구를 통해 동전을 끄집어내기란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다. 그 귀찮은 일을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을 놀리면서 시도했다. 그리고 한 움큼의 동전을 전화기 위해 올려놓은 체 부스를 나와 버렸다.

밤은 나를 유리창에 비치게 한다. 묻혀버린 풍경을 나의 이마와 눈과 입으로 덧칠하며 순수하길 바라던 이 길을 꼽씹게 만들고 있다.
반성역이라는 말에 다시 눈을 창가로 돌렸다. 내리는 이는 있어도 더 이상 올라타는 이가 없다. 그 것이 나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빼 주위를 둘러보게 한다. 얼마나 더 가야 진주에 도착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시계도, 안경도 내게는 소유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금씩 지루해지는 시간을 때울 겸해서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보았지만 나의 그녀보다 눈에 띄는, 관심 가는 이가 없다. 그녀의 또래도 있고 그녀와 비슷한 긴 생머리도 있고 그녀가 즐겨 입는 붉은 니트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아가씨도 있는 데 말이다. 그녀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고독여행에 기회비용은 컸다.
떠나기 삼십 분 전부터 만나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은 저버렸고-그는 원칙을 좋아하고 계산적이니 나를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미나실에서 나의 「기회비용」에 대한 발표를 기다렸을지도 모를 학회사람들까지 배신해야만 했다.-배신은 아니다, 이미 나는 그 기회비용을 실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비록 혼자의 것이지만 말이다. 학회 후배인 그녀는 혼자 아는 비밀에 즐거운 나머지 쿡쿡 거리며 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녀는 나의 무모함을 좋아했다.

일곱시 십사분. 나의 고독을 태운 무모행 기차는 행선지에 나를 내려놓고 떠나갔다. 기차를 택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 시장바닥처럼 삶에 얽히고 설킨 버스터미널에서 내 고독이 짓밟힐 바에야 혼자 가는 기차에 나를 태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대구를 가나 진주를 가나 다를 것은 없듯이 버스를 타나 기차를 타나 별반 다를 것은 없다. 그녀가 기차를 좋아한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내리는 사람들 틈을 삐져 나와 역 앞을 서성거렸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모든 게 순조로워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친구가 사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다 게 어색하다. 고독이 전염성 강한 균이라고 해도 그 친구에게는 통하지 않을 법도 한데 미안하고 조심스러워 진다. 내가 아닌 사람이 고독해서도 안되고 불행해서도 안되며 상처받아서도 안 된다. 그 친구라면 현실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는 사람 아니던가. 해서 안 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아야 하고 해야할 일에는 철저한 삶. 친구ㅡ의 이상향이었다.

친구를 생각하니 전화를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다. 동전 떨어지는 소리를 놀라운 경적소리로 들으며 목소리를 가다듬을 요량으로 헛기침을 두 번 했다. 케케거림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뱉어댔다.

친구는 십 분 안으로 오겠노라고 전화를 끊고 정말이지 십 분을 넘기지 않고 달려왔다. 예상했던, 너무나 당연한 친구의 태도가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리고 친구는 혼자가 아니었다. 한 여자를 알게 되었다는,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말을 그에게 들은 지 석 달만에 ‘함께’가 되어 있었다. 내가 ‘친구의 여자’에게서 다시 친구에게로 눈을 돌리자 그는 내게 손을 내밀어 왔다.

「오랜만이다.」

「그래, 반갑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싶었는데 잘 왔어.」

친구는 내가 자신을 보고싶어서 찾아온 것으로, 나의 ‘진주행’을 해석하는 듯 했다. 그의 그런 식에 나는 동조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오늘 내 몸을 그에게 의탁할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엎을 만한 어떤 ‘단서’도 보일 필요는 없다.
「인사해. 이쪽은 은교, 강은교야. 그리고 이쪽은,」

「진, 유진입니다.」

나는 친구의 여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머뭇거리며 손을 내미는 친구의 여자. 모든 것이 작게 생긴 여자였다. 눈도 코도 입도 얼굴도 몸집도 자그만 했고 검은 눈동자는 고동색보다 짙었고 입술은 새촘하게 붉었다. 붉은 니트에 검은 치마. 누구나 입을 수 있는 그 차림새를 여기서 다시 본다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나에게 울렁거림을 주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올해 가장 유행할 의상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옷차림은 항상 유행을 쫓고 있었다.

친구의 여자에게 내밀었던 손은 시릴 만치 무색하게 친구의 여자에게로 향하고 있었지만 친구의 여자는 여전히 머뭇거리고 친구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렇게 내게는 그 손을 잡아볼 호의를 빼앗기고 말았다. 그가 자연스럽게,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내 손을 잡아버린 것이다. 그들에게는 ‘모면’이였을지도 모르지만 타지에 찾아들은 내게는 내가 단순한 이방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할 뿐이었다.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자취방으로 향하면서 다시 대구행 기차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구에 사는 친구녀석은 분명 혼자일 것이다. 그의 뭉턱한 코와 실낱같은 눈,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는 그를 혼자이게 할 것이 분명했다. 비록 나의 얼척없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녁으로 중국음식을 시키는 친구더러 빼갈 한 병을 시키자고 했다. 빼갈을 시키면서 친구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정말 염려스러워서 그러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여자는 오히려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보는 데, 친구보다 친구의 여자가 내게는 더 부담스럽게 다가왔다. 친구의 여자가 눈에 밟히면서 자꾸만 그녀의 기억이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그와 그의 여자처럼 ‘함께’이기를 수없이 시도했었지만 그녀는 그의 여자처럼 소유되지 못했다. 오늘 고독여행만해도 그렇다. 그녀를 생각하고 은연중에 그녀에게 나에 대한 기억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 친구의 여자라는 새로운 얼굴만 알게 해준 것에 지나지 않고 있었다.

‘고독여행’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혼자여야만 그녀의 논리를 즐겁게 해줄 것인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친구가 없었다면 결코 엄두가 나지 않았을 여행이다. 고독하고는 싶지만 내가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 깨닫게 되는, 그런 순간은 정말이지 내키지 않는다.

짬뽕국물에 빼갈을 두 잔쯤 마셨을 때 나의 목줄기는 붉게 달아올랐다. 술에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 피부는 붉은 열꽃을 견뎌내지 못했다.

「마산은 언제 갈 거야?」

「내일 새벽기차 타고.」

「버스로 가는 게 더 낫지 않을까.」

「그럴 지도.」

「그렇고 말고.」

나는 친구의 여자가 술기운을 못이기는 것을 보았다. 안쓰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나는 숨기지 못하고 친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의 그런 표정들은 그의 오해를 사게 했다. 불쾌함을 애써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하더니 곧, 그는 다 안다는 얼굴로 능청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지금 내게 무척이나 위에 선 자처럼 굴려고 하는 것이다. 위선자(僞善者). 지금 이 순간 나는 그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셈이다. 그가 그의 여자를 차지함에 있어 ‘관계’가 빠졌을 리가 없다는 것을. 그 사실이 나로 하여금 고독하게 했다.

나는 고독하고 그는 고독하지 않다. 나는 개워낼 만큼 술을 마시고 마는 ‘무모함’이 있고 그는 ‘적당히’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의 그녀는 순결하고 그의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

「아직도 후배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거니?」

「…….」

「일찌감치 포기해라. 너무 어리잖니.」

‘관계’나 좋아하는 놈은 그럴 테지. 너라는 놈은 정말.
나는 친구와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나와 나누고 싶은 것은 ‘시시하고 진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고 나는 그의 의도를 만족시킬 만큼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문외했다. 그 것이 그로 하여금 나에 대해 실망을 안겨 주고야 말았던 모양이다.

「샌님 같이. 시(詩)를 쓴다면 좀 더 그럴 듯한 시를 써야하지 않겠니. 그러기 위해서는 해학과 위트 정도는 갖추고 있어야지, 원.」
그가 말하는 해학이 무엇인지 위트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상상이 되면서 빼갈보다 더 내피부를 자극해왔다. 내가 그런 것들을 갈겨 된다면 그 것은 그녀에 대한 모독이다. 내가 왜 여기 까지 찾아들어야만 했는데.
나는 아무 신발이나 꾀어 신고 밖으로 나왔다. 친구의 자취방에서 멀지 않은 하늘 위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백일장에서 ‘불꽃놀이’에 관한 시로 장원을 했던 부끄러운 기억이 되살아난다.

불꽃놀이는
축복의 시발점, 사랑의
환희다.

그 따위 엉터리 시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조차 믿어지지 않은 시어들이 존재하는, 그 것은 ‘낙서’에 지나지 않는다. 내일 새벽같이 내려가야겠다.
한참을 밖에서 떨다가 방으로 들어가기 위해 손잡이를 돌렸다. 반쯤 열리는 문을 통해 보이는 정경이라는 것은 그의 여자가 술에 취해 울고 있었고 친구는 무심한 얼굴로 그런 여자를 안주 삼아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뭔가가 얽혀버린 이 곳에서의 하룻밤은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기대를 하고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실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언제나 나에게 ‘너라는 놈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거냐.’고 묻던 그가 과거의 인물처럼 낯설게 겹쳐지고 있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깊이가 있는 사람이 그가 아니었던가. 나의 시를 ‘낙서’에 지나지 않다고 비웃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그를 고마워 했다. 나를 비난하지 않으면 안되고 내일에 시비를 걸지 않으면 안되었던 친구. 나는 그래서 그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리며 그를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어떤 확신도 서지 않고 있었다.

밤하늘의 시계는 별이다. 별이 있다는 것은 아직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갑자기 역전 공중전화부스에 다 쏟아 버리고 온 동전이 아까웠다. 그의 방으로 오던 길에 보았던 슈퍼 앞의 공중전화로 최대한 빨리 달려갔다. 반쯤 열린 그의 방문을 닫지도 못한 채.

「진주야.」

「선배, 집으로 전화해 봐요. 학회로 선배 찾는 전화가 걸려 왔었어.」

「…….」

「어서요.」

나는 하나 남은 동전으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의 젖은 목소리는 예상하지도 못한 외할머니의 부음을 알려왔다. 나는 무겁게 수화기를 놓아야만 했다. 노인은 죽기 마련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은 어느 ‘병명’과도 같을 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이다. 그러나 나는 타고 흐르는 눈물을 뿜고야 말았다. 이제껏 숨겨왔던 감성이 터지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달력에서 할머니의 기일로 표시될 때마다 오늘을 기억할 것이고 내 무모함을 기억할 때마다 외할머니의 부음이 나의 머릿속으로 찾아들 것이다. 다리를 질질 끌었다.

그리고는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아니, 무작정 걷기로 마음먹었다. 걷다보면 다리가 아프면서 어쩌면 모든 신경이 다리와 함께 마비가 될 지도 모른다. 그런 다행을 바라지만 나에게 올 수 있을지. 이미 나는 돌아갈 길을 생각하고 있었다. 무작정 걸음으로써 길을 잃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오히려 겁이 났다. 얼마나 더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해야, 해도 좋은 것이 될까. 해도 좋다는 것에 고독하다는 것은 없어야 할텐데.

물소리에 눈을 떴다. 친구의 여자가 씻고 있는 듯 했다. 친구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반라에 가까웠다. 친구의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구역질을 삼키며 돌아누웠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계는 여덟시를 넘기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친구는 조간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고 친구의 여자는 쌀을 씻고 있었다. 새벽기차는 내 잠 속을 뚫고 지나 가버린 뒤였다.

「내일 가지 그러냐.」

「아니, 가야지.」

「무리해서 갈 필요 있을까요.」

친구의 여자까지 거들고 나섰다.

「이래뵈도 할 일이 많은 놈입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부음을 그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하고 대신 배시시 웃었다. 친구의 여자가 차린 아침상은 푸짐했지만 먹을만한 것은 없었다. 열심히 먹어대는 친구를 보니 그들이 사는 방식이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게 했다.
올 때보다는 차라리 갈 때가 더 두둑한 것은 친구의 여자가 잔뜩 챙겨준 성의 때문이었다. 심심하지 말라고, 가는 길에 읽으라는 시집 한 권과 점심이 어중간하다고 싸준 도시락 하나.

읽어버리고 나면 두고 와도 좋을 만치의 싼 책임에도 불구하고, 다 먹고 구겨 버리고 돌아오면 될 일회용 도시락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둑한 것을 느꼈다. 만약 친구에게 외조모의 부음을 알렸다면 조의금까지 쥐어주었을 것이다. ‘현실’은 나를 이렇게 가만히 두지 않고 있었다.

육교 앞 매표소에서 남마산행 차표를 끊었다. 친구는 기차표가 아닌 버스표를 끊은 나에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뭇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나에게 이 상황은 어쩔 수 없는 데 있는 것이지 친구의 말에 귀 기울인 것은 결코 아니다. 삶이 나에게 살아야한다고 말하는 상황에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의구심과 다르지 않다. 영원히 떠나려는 사람을 배웅하기에는 버스를 타고서 달려가도 늦다. 그와 그의 여자는 손을 흔들었고 나는 어색하게 왼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왼손잡인 것이다.

시월의 고독이 꺼져 가는 장면이 눈앞에 선하다. 그러나…그녀를 위해서, 아니 나를 위해서 돌아가야 할 곳이 있다. 고기비린내를 풍기며 내 옆을 지나가는 노인의 주름진 얼굴처럼 말이다. 세월은 노인에게 비린내와 주름진 살을 남겨 놓았지만-외할머니처럼 영원한 여행을 준비하게 했듯이- 세월을 모르는 내가 그 노인에 대해 무어라 하는 것은 정말이지 건방진 태도가 아닐 수가 없다. 그리고 기차와 버스를 갈등하는 것과 진주와 대구를 갈등하는 것과 그녀와 친구의 여자를 비교하는 것도 말이다.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듯이 그녀는 나에게 고독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버스는 정오의 시간을 건너며 마산으로 향한다. 그녀에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여느 후배 대하는 듯이 고독한 척 노인의 세월을 견디면 되는 것이다. 그 것이 나에게 주어진 삶이라면 거스름 없이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시월이든, 그 시월의 고독이든지 간에 말이다.

-떠날 때 행상은 가난할수록 좋고 버스보다는 기차를 타는 것이 좋지만, 돌아 올 때에는 삶에 이겨낼 변명과 다짐을 안고 돌아오는 것이 좋다. 왜냐면 의미를 가진 것들은 넌센스의 해답보다 나을게 없기 때문이다.

(출처 : 스토리문학관 www.stor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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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1970.01.01 By장성호(29회) Views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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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모시 조각보를 만드는 어머니

    Date1970.01.01 By장성호(29회) Views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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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강렬함이 넘쳐나는 <판>을 느껴보자 ! `

    Date1970.01.01 By장성호(29회) Views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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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강렬한 부고인-되기 `

    Date1970.01.01 By장성호(29회) Views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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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나는 귀한 사람이었네 (퍼온글)

    Date1970.01.01 By어느님 Views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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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부고인이요 리토르넬로가 되자 ! `

    Date1970.01.01 By장성호(29회) Views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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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

    Date1970.01.01 By최현근(16회) Views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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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남아 있는 날들을 즐기자

    Date1970.01.01 By김광훈 (33회) Views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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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추석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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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레이건의 성공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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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때로는 정신없는 선행을 베풀어 보자

    Date1970.01.01 By김광훈(33회) Views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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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학창시절 그리운 얼굴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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