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때론 살아가면서
극단적인 추상적인 개념과
아주 구체적인 사물 사이를 왕복하지만
이 추상과 구체사이는 항상 노모스에
의해 묶여 있다
노모스는 원래 성문화되지 않는 관습법이다
노모스는 언제나 국가 이성으로 존재하려는
추상화 방법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추상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감각적으로 둥근 것과 원이라는 관념적
본질의 중간에 `둥근것`이라는 다른 하나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 둥근 것은 여러 가지 도구에 의해 감각적인
사물을 둥글게 하는 과정의 극한이자
매끈한 모습을 원하는 변용태의 극한으로만
존재하며 어디까지나 사물과 사유의 중간에 존재한다
이공간은
유동적이고 비정확하지만 아주 엄밀한 본질의 영역
즉 추상적인 매끈한 공간 이다
`고른판`은 이러한 비정확하지만 중간적인 본질이
서로 연결되든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 고른판은 바로 추상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 고른판은 신바람 나는
흥겨운 `판세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씨름판, 소리판, 잔치판을 말한다
잡다한 잡초같은 사람들이 모여 끈끈한
시선이 교차되는 통합의 자리이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장단을 맞추는 상호성 다양성
동질성을 이루는 장을 말함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의 추상적인 선이
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의 선으로 돌변해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돌아설
위험을 항상 간직하고 있으며
너무 갑작스러운 매끈한 공간화는
자살적인 것이나 암적인 것이
될 위험이 크다
즉 카오스, 공허, 파괴에 빠지든지
아니면 점점 더 강하게 경화되어
가는 지층에 다시 갇혀 일정한
다양성, 분화, 유동성마저 잃어버리고
마는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한 상태에 빠지면
추상적인 매끄러운 판이
비속한 것으로 추락한다
즉 섰다판, 술판, 노름판, 정치판, 싸움판,
모략판, 먹자판, 노가다판, 개판,
이판사판 등이 됨을 유의해야한다
여기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고정된 물질의 형태도 , 관념적인 영원의
형태도 아닌 지각 할 수 없는 것의 도표만이
지각되고 중간이자 극한으로서 하나 하나
의 실천을 이끄는 것이 지각된다
이공간에는 추상적인 선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고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는 선.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는 선.
바깥도 안도 형태도 배경도 또 시작도
끝도 없는 이 변이 하는 선.
베토벤의 피아노 연속적 변주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선을 말함이다
아랍의 건축은 아주 가깝고 아주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공간을 그려나간다
아랍의 건축은 중심도 없고
여러 출구와 입구만 존재한다
하나의 `미로판` 이다
가벼운 것과 대기적인 것이 아래에 놓이고
반대로 단단한 것이나 무거운 것이 위쪽에 놓인다
중력의 법칙이 전도되어 방향의 결여나
입체감의 부정은 역으로 구성적인 힘이 된다
이에 반하여
이집트제국의 피라미드의 직선적인 선,
그리스(이후 비잔틴,르네상스)예술의 유기적 선
중국의 초-현상적인 포괄적인 선 등은
이미 추상적인 선을 변질시키고
이것을 매끈한 공간에서 떼어내 그것에
구체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에 불과하며
이는 홈파인 공간이다
한편 매끈한 공간속의 추상적인 선은
바둑판적이며, 잡초적이며, 이동통신적이며
잉여적이며, 결연관계적이며
고딕적 ,유목적인 선이다
이 선은 기계론적이며 자유로운 행동의 선이다
소용돌이 선이다
이 선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비유기적이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비유기적이며 배아 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 없는 강력한 삶 , 기관이 없기 때문에
더욱 생명력이 있는 몸체말이다
이 선은 예술이 시작되는 점 자체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다
세잔은 밀밭을 보지말고 밀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아무런 좌표 없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으라고 한다
홈파기는 그런 다음에 탄생할 수 있다
기학적인 완고함, 세계의 척도 , 모든 것이
수직으로 하강...
그러면 이제 홈이 패인 것이 `파국`으로
사라져 새로운 매끈한 공간이 생기고 또
다른 홈파인 공간이 펼쳐진다
매끈한 것은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 촉지적 공간의 요소이다
촉지적 공간이란 촉각적, 시각적,청각적일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홈파인 것은 오히려 원격지각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홈패인 공간은 원거리 파악의 요구들로 규정된다
즉 방향설정의 항상성, 부동적인 좌표의 교환을
통해 얻어지는 거리의 불변성, 주위 환경에
젖어 듦에 따라 얻어지는
접속, 중심 관점의 구성등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서 물러서는 사람은
훌륭한 화가가 아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멀리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에서 듣는다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반면
작가 자신은 짧은 기억을 갖고 쓴다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막, 잡초, 빙원, 바다 등 순수한 연결접속의
국지적인 공간이 그렇다
여기에서는 먼 곳도 볼 수 없으며
또 이공간을 멀리서 볼 수도 없다
어떤 정면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방향들은 일정치 않으며 식생, 관심사, 일시적인
조금함 등에 따라 변화한다
이 접속들은 다양체를 흡수하고 거리에 불변성을
부여하는 주변 공간을 내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이 존재하며 접속들과
방향 변화들을 무한대로 연속시키면서
매끈한 공간을 구성한다
생성자체 또는 과정과 하등 다를 데 없는
절대성이다
이공간에는 수평선도 배경도
원근법도, 한계도, 윤곽이나 형태도
중심도 없다
중개적인 거리도 없으며
오히려 모든 거리가 중개적이다
에스키모의 공간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서 공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시켜
이런 한 홈파기를 가로 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을 출현시킬까?
빠른건 느리건 운동만으로도
종종 다시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물론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하고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 또한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새로운 거동을 발명하고
적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지 말자
다만 우리모두 매끈한 공간에서 사유가 흐르는
추상적인 선이 만드는 소용돌이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며 생성과 긍정의 실천을 진동으로 느끼자
극단적인 추상적인 개념과
아주 구체적인 사물 사이를 왕복하지만
이 추상과 구체사이는 항상 노모스에
의해 묶여 있다
노모스는 원래 성문화되지 않는 관습법이다
노모스는 언제나 국가 이성으로 존재하려는
추상화 방법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추상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한다
감각적으로 둥근 것과 원이라는 관념적
본질의 중간에 `둥근것`이라는 다른 하나의
본질이 존재한다고 말이다
이 둥근 것은 여러 가지 도구에 의해 감각적인
사물을 둥글게 하는 과정의 극한이자
매끈한 모습을 원하는 변용태의 극한으로만
존재하며 어디까지나 사물과 사유의 중간에 존재한다
이공간은
유동적이고 비정확하지만 아주 엄밀한 본질의 영역
즉 추상적인 매끈한 공간 이다
`고른판`은 이러한 비정확하지만 중간적인 본질이
서로 연결되든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 고른판은 바로 추상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 고른판은 신바람 나는
흥겨운 `판세상`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씨름판, 소리판, 잔치판을 말한다
잡다한 잡초같은 사람들이 모여 끈끈한
시선이 교차되는 통합의 자리이고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어울려 서로
장단을 맞추는 상호성 다양성
동질성을 이루는 장을 말함이다
그러나
매끄러운 공간의 추상적인 선이
자신의 창조적인 잠재력을
포기함으로써 죽음의 선으로 돌변해
순수하고 단순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돌아설
위험을 항상 간직하고 있으며
너무 갑작스러운 매끈한 공간화는
자살적인 것이나 암적인 것이
될 위험이 크다
즉 카오스, 공허, 파괴에 빠지든지
아니면 점점 더 강하게 경화되어
가는 지층에 다시 갇혀 일정한
다양성, 분화, 유동성마저 잃어버리고
마는 위험이 있다
이런 위험한 상태에 빠지면
추상적인 매끄러운 판이
비속한 것으로 추락한다
즉 섰다판, 술판, 노름판, 정치판, 싸움판,
모략판, 먹자판, 노가다판, 개판,
이판사판 등이 됨을 유의해야한다
여기 매끄러운 공간에서는
고정된 물질의 형태도 , 관념적인 영원의
형태도 아닌 지각 할 수 없는 것의 도표만이
지각되고 중간이자 극한으로서 하나 하나
의 실천을 이끄는 것이 지각된다
이공간에는 추상적인 선이 존재한다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고 어떠한 윤곽도
그리지 않는 선.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점과 점 사이를 지나가는 선.
바깥도 안도 형태도 배경도 또 시작도
끝도 없는 이 변이 하는 선.
베토벤의 피아노 연속적 변주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선을 말함이다
아랍의 건축은 아주 가깝고 아주 낮은 곳에서
시작되는 공간을 그려나간다
아랍의 건축은 중심도 없고
여러 출구와 입구만 존재한다
하나의 `미로판` 이다
가벼운 것과 대기적인 것이 아래에 놓이고
반대로 단단한 것이나 무거운 것이 위쪽에 놓인다
중력의 법칙이 전도되어 방향의 결여나
입체감의 부정은 역으로 구성적인 힘이 된다
이에 반하여
이집트제국의 피라미드의 직선적인 선,
그리스(이후 비잔틴,르네상스)예술의 유기적 선
중국의 초-현상적인 포괄적인 선 등은
이미 추상적인 선을 변질시키고
이것을 매끈한 공간에서 떼어내 그것에
구체적인 가치를 부여한 것에 불과하며
이는 홈파인 공간이다
한편 매끈한 공간속의 추상적인 선은
바둑판적이며, 잡초적이며, 이동통신적이며
잉여적이며, 결연관계적이며
고딕적 ,유목적인 선이다
이 선은 기계론적이며 자유로운 행동의 선이다
소용돌이 선이다
이 선은 비유기적이지만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비유기적이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살아 있다
비유기적이며 배아 상태인 강렬한 삶
기관 없는 강력한 삶 , 기관이 없기 때문에
더욱 생명력이 있는 몸체말이다
이 선은 예술이 시작되는 점 자체 또는
예술 의지의 최초의 표현이다
세잔은 밀밭을 보지말고 밀밭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 아무런 좌표 없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길을 잃으라고 한다
홈파기는 그런 다음에 탄생할 수 있다
기학적인 완고함, 세계의 척도 , 모든 것이
수직으로 하강...
그러면 이제 홈이 패인 것이 `파국`으로
사라져 새로운 매끈한 공간이 생기고 또
다른 홈파인 공간이 펼쳐진다
매끈한 것은 근거리 파악의 특권적인 대상인
동시에 촉지적 공간의 요소이다
촉지적 공간이란 촉각적, 시각적,청각적일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홈파인 것은 오히려 원격지각
광학적인 공간과 관련되어 있다
홈패인 공간은 원거리 파악의 요구들로 규정된다
즉 방향설정의 항상성, 부동적인 좌표의 교환을
통해 얻어지는 거리의 불변성, 주위 환경에
젖어 듦에 따라 얻어지는
접속, 중심 관점의 구성등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서 물러서는 사람은
훌륭한 화가가 아니다
음악을 듣는 사람은 멀리서 듣는 반면
작곡가는 가까이에서 듣는다
독자는 긴 기억을 갖는 반면
작가 자신은 짧은 기억을 갖고 쓴다
촉지적이고 근거리 파악적인 매끈한 공간의
측면은 방향 좌표, 접속의 연속적 변주에서
찾을 수 있다
사막, 잡초, 빙원, 바다 등 순수한 연결접속의
국지적인 공간이 그렇다
여기에서는 먼 곳도 볼 수 없으며
또 이공간을 멀리서 볼 수도 없다
어떤 정면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방향들은 일정치 않으며 식생, 관심사, 일시적인
조금함 등에 따라 변화한다
이 접속들은 다양체를 흡수하고 거리에 불변성을
부여하는 주변 공간을 내포하지 않는다
이처럼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이동하는
국지적 통합이 존재하며 접속들과
방향 변화들을 무한대로 연속시키면서
매끈한 공간을 구성한다
생성자체 또는 과정과 하등 다를 데 없는
절대성이다
이공간에는 수평선도 배경도
원근법도, 한계도, 윤곽이나 형태도
중심도 없다
중개적인 거리도 없으며
오히려 모든 거리가 중개적이다
에스키모의 공간처럼 말이다
어떻게 해서 공간은 이 과정에서
다른 힘들을 발전시켜
이런 한 홈파기를 가로 질러
새로운 매끈한 공간을 출현시킬까?
빠른건 느리건 운동만으로도
종종 다시 매끈한 공간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물론 매끈한 공간 자체가
해방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매끈한 공간에서 투쟁하고
변화하고 이동하며 삶 또한 새로운 도박을 감행하고
새로운 장애물에 직면해서 새로운 거동을 발명하고
적을 변화시킨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의 매끈한
공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믿지 말자
다만 우리모두 매끈한 공간에서 사유가 흐르는
추상적인 선이 만드는 소용돌이 속으로 깊숙이
빠져들며 생성과 긍정의 실천을 진동으로 느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