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농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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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이별을 위한 신혼


- 할아버지, 어딜 그렇게 급히 가세요

조금 천천히 좀 가자구요

- 나 바뻐, 할 일이 아주 많거든

그 말을 뒤를 따르는 한 젊은이에게 던져주며 일주일후에 있을 제빵기능사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빵을 만들 수 밖에 없다는 일흔 셋의 할아버지는 더 급해진 걸음으로 전철을 타고 종로 3가역을 빠져 나간다.

양수리에 있는 재래시장에 들린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시장통을 누비시며 미리 살 것을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지 망설임 하나 보이지 않고 이것저것 사신다.
하루종일 할아버지를 따라 다니던 젊은이의 존재는 처음부터 그의 안중에 없었던 것처럼. 마치 무언가에 잔뜩 쫓기는 듯한 재빠른 행동이 오히려 젊은이의 궁금증을
더 강하게 유발시켜 놓을 뿐이다
도대체 저 할아버지는 왜 저리 바쁘신 것일까?

한적한 농촌의 풍경이 여실하게 살아있는 양수리 작은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할아버지.
주방이 딸린 방 한칸짜리 건물이 작아보이지 않고 서른여평 대지위에 평화롭게 서 있다.

- 나, 다녀왔소. 잘 지내셨는가? 심심했지요?

할아버지는 방문을 열면서 누군가에게 지금까지 그렇게 바쁘던 마음을 접고 아주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뒤따라 들어가던 젊은이는 순간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방안에는 머리가 백발인 할머니께서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낯선 방문객을 보고 힘을 들여 일어나신다

-그냥 누워 있어도 돼요. 이 양반이 누군가 하니 내가 조금 수상쩍다고

누가 일러바쳤는지 나를 뜯어보겠다고 오늘 하루종일 내 뒤를 밟고 다닌다오. 나쁜 일로 그러는 것은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말구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도 아주 즐거우신 얼굴로 시장보아온 것을 풀어 주방으로 가시더니 음식을 만들 준비를 하신다

-할아버지. 조금 쉬었다 하세요. 오늘 힘드셨잖아요

-아니. 힘들긴. 얼른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서 저 사람을 먹여야 하거든.
저 사람은 내가 해 주는 음식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아주 어리광이 심하다오. 나한테는 애기여. 애기같은 할망구라고.
순간, 할머니는 아주 수줍은 듯이 빙긋이 웃으시면서 할아버지의 수첩을 꺼내 보여준다. 놀랐다. 그 속에는 한식, 양식, 중식, 일식요리사 자격증이 꽂혀 있었다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이제는 제빵기능사 자격증까지 따려고 양수리에서 종로까지 매일 학원을 간다는 것이였다

십년전.
할머니는 간암말기를 판명받으셨다. 막 환갑을 넘긴 나이였다,
그때 할아버지는 큰 아들과 같이 살고 있는 퇴직공무원의 평범한 사람이였는데 아내의 병을 자신만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다짐을 하더니 같이 살면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해보자는 자식들의 걱정을 물려낸 다음 아내를 데리고 경치좋고 공기맑은 이곳 양수리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이다.
간암이란 첫째 중요한 것이 어떤 음식을 어떠한 마음으로 섭취를 하여야 하는가.
그것이 제일 우선적으로 절실한 것임을 깨달은 할아버지는 저 사람의 병은 내 마음, 내 손으로 고쳐놓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요리학원에 다니면서 각종 요리사 자격증을 딸만큼 정성을 들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지 벌써 십년 세월이 흘렀다
의지가 약한 사람들 같으면 진즉에 포기했을 간암 환자에 대한 남편으로서의 사랑과 정성이 얼마나 극진했는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믿어질 만큼 십년이 넘는 너무 긴 세월동안 단 한번도 같은 음식을 할머니에게 해 드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퇴직 후 연금으로 지급받고 있는 돈은 어쩌면 할머니의 병을 호전시키거나 최소한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유지시킬 수 있었던 음식을 위한 재료비로 들어가고 있다 해도 거짓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할아버지는 산다는 것이 이렇게 축복스럽고 보람스러울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저것 다 만들어 먹여 보았으나 아직 빵은 직접 구워 먹이지 못한 것 같아 내내 미안하고 속상했었는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아 빵을 아주 맛있고 달콤하게 구워 꼭 할머니 입에 넣어드리고 싶어 오늘도 밀가루를 뒤집어 썼던 할아버지의 진실은 어쩌면 이미 십년전부터 이미 할머니를 보낼 마음을 준비한 것인지 모른다.

사람은 죽는다.
단 언제인가가 궁금할 따름이다.
누구든지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따지지 않고 인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사실이다.
어떠한 마음으로 준비를 해야 그 죽음앞에 의연할 수 있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그러기에 할아버지는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오래전부터 자신을 비워내고 온통 할머니를 채워놓은 희생으로 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일흔이 넘은 남편에게 하루에 백번도 넘는 뽀뽀를 받고 사는 할머니는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혼생활을 하고 있는 신부일지 모를 일.
부부라는 緣을 맺을 때 한 약속이 조금 어긋나거나 늦어진다 하여 다른 선택을 하려 잠시 방황을 한다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예 절대체념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한테 할아버지의 사랑은 분명 부끄러운 일이였다.

아마 할아버지의 그러한 마음이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별을 하였을 그들이였으련만.
할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손으로, 마음으로, 사랑으로 음식을 만들 수 없을 때까지는 꼭 곁에 있어야 하는 것이 할머니의 팔자라면서 그것을 불행이라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만들어 주던지 맛있게 먹어주는 할머니를 위해 오늘은 소고기 그라탕을 요리하는
날이라면서 일류 주방장들이 쓰는 흰 모자를 높다라이 쓰고 앞치마까지 뽀얗게 두르며 아주 밝은 웃음을 터뜨리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위한 신혼부부들이 내일, 모레 아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더 건강하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양수리 작은 집에 살그마니 놓고 젊은이는 오랫만에 터질 것 같은 삶의 환희를 느끼며 대문을 나선다.

양수리 가을바람은 아직 차웁지 않았다.


(출처 : 스토리문학관
저자 :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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