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밥상
모처럼이란 단어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밥상이 놓였다. 둘째 누이는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광주에 계신 어머니만 함께 했더라면 더 완벽한 그림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란 이름만을 남긴 채 두 분은 이미 오래 전에 타인이 되어버린 사이였기에 차마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대신, 어머니의 자리에는 부르기조차 생소한 새어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계셨다. 긴 세월을 말해주듯 밥상에 놓인 음식들 위엔 서먹함이 덮여있었다. 아버지가 밥상 위의 한기를 걷으시려는지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씀을 꺼내셨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한 누구의 호응도 얻을 수는 없었다. 누구도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2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나와,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서먹함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우리 가족이 이런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 광주사태가 있은 지 2년이 지날 무렵쯤이었다. 사회생활에도, 가족에게도 그리 성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끝내 사업실패라는 시련을 맞이하셔야만 했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몇 번인가 실패를 맛보았던 아버지였지만 그때의 부도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전의 실패에는 지방 유지이셨던 할아버지의 유산을 손에 꼭 쥐고 계셨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실 수 있었으나 할머니의 손에도 더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의 실패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맞는 절실한 고난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늘 기댈 수 있었던 언덕이 없어진 아버지는 밀려드는 빚 독촉에 현실도피라는 가장 개인적이고 편리한 방법을 택하게 되셨다. 아버지는 살고있던 광주를 등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셨다. 내 나이 8살 무렵의 일이었다.
세간에는 모두 빨간색의 차압딱지가 계급장처럼 붙어있었다. 아버지의 포니 승용차도 빚쟁이의 손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살던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부도가 나기 전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난에 찌든 날들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 안 벽에는 궁핍이 덕지덕지 눌어붙었고, 가슴에는 빈곤함이 수북히 쌓이고 있었다. 하다못해 빨간 계급장의 매서운 눈초리를 겨우 피한 장롱 안의 고급 옷을 입어도 빈티가 흘러내렸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떠나신 곳에서 편하실 리만은 없었겠지만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빚쟁이들에게 매일 시달리셔야 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누이 둘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막내 누이와 어린 나까지 이렇게 다섯 식구의 생계까지도 책임지셔야만 했다. 하루하루 먹고산다는 것이 전쟁과도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외가에서 싸게 구입해온 젓갈이나 소금가마를 등에 지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셔야 했고, 서민아파트 계단을 매일 오르내리셔야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가족들의 하루는 늘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활이 일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아질 것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큰누이는 졸업과 함께 집을 나갔고, 또 일년이 지나자 늘 착하기만 했던 둘째 누이도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떠났다. 같은 해, 급기야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 누이마저도 변해버린 환경과 가난에 적응하지 못해 가출을 했다. 가난뿐 아니라 가족마저 해체되고 있었다.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서 어머니와 나는 그렇게 일년을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어머니와 나, 둘만이라도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었더라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정상적인 가족으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어머니의 외도. 성인이 된 한참 후에서야 내 어머니가 아닌, 한사람의 여자로서 용서가 아닌 이해를 하게되었지만, 믿고 의지할 남편도 보살펴야 할 자식도 거의가 떠나버린 어머닌 심한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고 부쩍 외로움을 느끼셨을 것임에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사라진 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무너져 갔다.
사춘기 무렵, 무던히도 방황을 많이 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싫어졌다. 세상도 미웠고, 부모도 미웠고, 사람들도 미웠다. 모든 것이 불결하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있는 둘째 누이와 함께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계시는 집에는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은 채 친구 집과 친척들의 집을 이 년 가까이 오가며 중학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8살 이후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아버지 역시 같은 서울하늘 아래에서 생활하고 계셨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누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찾은 아버지의 곁에 얌전히 앉아있던 어린아이였다. 가족들을 떠난 뒤로 아버지는 나름대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신 거냐고, 왜 우리를 버리셨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어붙은 입은 명절이랍시고 일년에 한번 잠깐씩 찾아 뵙는 날들이 더해가도 녹을 줄을 몰랐다.
둘째 누이는 추석과 구정 때가 되면 억지로 내 등을 떠밀어 한번은 아버지에게, 나머지 한번은 어머니에게 보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했다. 가슴 속 원망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 부모라고 했다. 당시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지만 부모님을 대신해 내게 헌신적인 둘째 누이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탈된 가족관계에서의 구성원이란 말은 무의미했다. 일년에 한번이나마 얼굴을 대하게 된 부모님도 그러했고, 큰누이와 막내 누이도 그러했다. 큰누이와 막내 누이는 몇 년에 한번도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큰누이의 경우엔 이런 집안 속내를 숨기고 결혼한 매형에게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부러 부모님을 더 멀리 하려했고, 막내 누이의 경우 자기 몸 하나 돌보기에도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살다보니 형제들 간에도 왕래가 많지 않았다. 오직 둘째 누이와 나만이 가족이란 이름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 우리 가족이 이렇듯 몇 십 년만에 함께 밥상을 마주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두 번째 인생 중, 가장 큰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이복동생 때문이었다. 나와는 14년, 큰누이와는 25년이라는 나이차이가 지는 아이였다. 명절 때나 한번씩 곁눈으로 보아왔던 그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엊그제 사고를 당한 직후 아직까지도 혼수상태였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던 날 새벽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 무척이나 떨리는 음성이었다. 두서없는 사고내용을 잠깐 말씀하시더니 아이가 죽어간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지나간 과거야 어찌 되었던 늘 내 앞에 당당하시려 했던 아버지였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눈물 끝에 한 마디를 더 보태셨다. 비록 배다른 동생이라고는 해도 마지막 가는 길에 형제들 얼굴이나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둘째 누이를 비롯해 오랫동안 연락이 뜸했었던 두 누이에게도 전화를 했다. 큰누이에게는 다소 오랜 시간동안 지금의 상황과 왜 가야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했지만 다른 두 누이에게는 처음 들은 아버지의 울먹임만으로 설득이 가능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시고 익산으로 이사를 하셨기에 아침까지 기다려 첫차를 타야했다.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했지만 정신만은 맑았기에 버스 안에 앉아있어야 하는 3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버지의 울먹임 하나만으로 얼굴 몇 번 마주한 적 없는 동생을 위해 익산으로 향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아마 가슴에 쌓였던 원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 아버지가 하신 말씀 중에 한 부분이 영 찜찜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동생을 불쌍한 아이라 표현하셨다. 어린 시절 내가 받지 못했던 것을 이복동생은 다 받으며 자라왔는데 도대체 무엇이 불쌍한 아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질투라고 표현하기에는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을 그토록 바랬던 때에는 모른 척 외면하셨던 분이 이제와 더 이상 부모의 손길이 필요치 않는 지금, 나이 서른이 다되어 가는 내게 손을 내미시는 것 자체가 용납하기 힘들었다. 창 밖 풍경 따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섰을 때 동생이 누워있는 침대 한편에 쪼그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내려오는 내내 한 마디쯤 해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위로한다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척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다 담당의사를 찾아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위급한 상태임에는 틀림없으나 아버지의 말씀처럼 오늘 하루를 넘기기 힘든 것은 아니라 했다. 일주일이 고비가 될 거라 했다. 아버지의 건너편에 간이의자 하나를 펼치고 앉았다. 침대 건너편에서 젖은 눈빛의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할말이 없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굳어버린 입은 이런 상황이라 해도 쉽게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해질녘이 다되어서야 큰누이와 막내 누이가 병원에 도착했다. 누이들 역시 내가 응급실에 들어와 했던 그대로를 답습하려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이라 그런지 마음에 있든, 없든 아버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이를 잠시 살피고 의사를 찾으려던 누이들에게 의사 대신 아이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잠시의 대화 끝에 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며 식사제안을 한 것은 새어머니였다. 아버지와 나, 새어머니는 새벽부터 그때까지 밥 한 톨 입에 넣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그저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모두가 병원 앞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해 보니 전부는 아니라 해도 4명 이상의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해본지가 20여 년만에 처음인 듯 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미리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두었던 둘째 누이가 들어왔다. 병원에 누워있는 이복동생을 제외한다면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세월이 우리 가족의 목소리를 모두 빼앗아 가버린 것만 같았다.
밥상 건너로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밥술을 뜨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온통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도 보였다. 이제는 중년부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큰누이의 모습과, 삶에 고단함으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막내 누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면 지금의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둘째 누이의 엷은 미소와 마주쳤다. 그때서야 예전 누이가 내 등을 떠밀며 했던 말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가슴 속 원망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부모라고……`
함께 밥상에 마주앉았던 그날 이후 동생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 점점 더 호전되어가고 있고, 요즘의 나는 비록 효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자식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이 허락되는 날이면 익산 행 버스에 오른다. 예전처럼 등을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버스를 탄다. 시간이 날 때면 오랫동안 소원했던 누이들에게도 종종 연락을 하고 광주어머님께도 연락을 한다. 그날의 밥상이 내게 잊혀졌던 가족이란 의미를 푸짐하게 차려내어 준 것일까? 그날 밥상 너머로 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원망뿐인 아버지라 해도 돌아가신 후에 결국 후회하는 것은 분명 내가 될 것이야…….`
원전 : 스토리문학관
지은이 : 김진규
모처럼이란 단어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사이에 두고 밥상이 놓였다. 둘째 누이는 곧 도착할 예정이었다, 광주에 계신 어머니만 함께 했더라면 더 완벽한 그림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내게 친아버지와, 친어머니란 이름만을 남긴 채 두 분은 이미 오래 전에 타인이 되어버린 사이였기에 차마 거기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대신, 어머니의 자리에는 부르기조차 생소한 새어머니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계셨다. 긴 세월을 말해주듯 밥상에 놓인 음식들 위엔 서먹함이 덮여있었다. 아버지가 밥상 위의 한기를 걷으시려는지 짐짓 밝은 표정으로 말씀을 꺼내셨지만 그 자리에 함께 한 누구의 호응도 얻을 수는 없었다. 누구도 원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20년이란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나와, 우리 가족은 그렇게 서먹함을 사이에 두고 각각의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우리 가족이 이런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초, 광주사태가 있은 지 2년이 지날 무렵쯤이었다. 사회생활에도, 가족에게도 그리 성실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끝내 사업실패라는 시련을 맞이하셔야만 했었다.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몇 번인가 실패를 맛보았던 아버지였지만 그때의 부도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전의 실패에는 지방 유지이셨던 할아버지의 유산을 손에 꼭 쥐고 계셨던 할머니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실 수 있었으나 할머니의 손에도 더는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때의 실패는 아버지가 처음으로 맞는 절실한 고난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늘 기댈 수 있었던 언덕이 없어진 아버지는 밀려드는 빚 독촉에 현실도피라는 가장 개인적이고 편리한 방법을 택하게 되셨다. 아버지는 살고있던 광주를 등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셨다. 내 나이 8살 무렵의 일이었다.
세간에는 모두 빨간색의 차압딱지가 계급장처럼 붙어있었다. 아버지의 포니 승용차도 빚쟁이의 손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살던 집도 경매로 넘어갔다. 부도가 나기 전과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난에 찌든 날들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방 안 벽에는 궁핍이 덕지덕지 눌어붙었고, 가슴에는 빈곤함이 수북히 쌓이고 있었다. 하다못해 빨간 계급장의 매서운 눈초리를 겨우 피한 장롱 안의 고급 옷을 입어도 빈티가 흘러내렸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떠나신 곳에서 편하실 리만은 없었겠지만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그보다 더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빚쟁이들에게 매일 시달리셔야 했고,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누이 둘과 초등학교에 다니던 막내 누이와 어린 나까지 이렇게 다섯 식구의 생계까지도 책임지셔야만 했다. 하루하루 먹고산다는 것이 전쟁과도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어머니는 외가에서 싸게 구입해온 젓갈이나 소금가마를 등에 지고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셔야 했고, 서민아파트 계단을 매일 오르내리셔야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겨진 가족들의 하루는 늘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생활이 일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아질 것 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큰누이는 졸업과 함께 집을 나갔고, 또 일년이 지나자 늘 착하기만 했던 둘째 누이도 돈을 벌겠다고 서울로 떠났다. 같은 해, 급기야 중학교에 다니던 막내 누이마저도 변해버린 환경과 가난에 적응하지 못해 가출을 했다. 가난뿐 아니라 가족마저 해체되고 있었다.
모두가 떠난 빈자리에서 어머니와 나는 그렇게 일년을 버티고 있었다. 지금까지도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어머니와 나, 둘만이라도 그 자리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었더라면 얼마의 시간이 지나더라도 우리는 다시 정상적인 가족으로 만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어머니의 외도. 성인이 된 한참 후에서야 내 어머니가 아닌, 한사람의 여자로서 용서가 아닌 이해를 하게되었지만, 믿고 의지할 남편도 보살펴야 할 자식도 거의가 떠나버린 어머닌 심한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고 부쩍 외로움을 느끼셨을 것임에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가 사라진 뒤 우리 가족은 그렇게 무너져 갔다.
사춘기 무렵, 무던히도 방황을 많이 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원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모든 것이 싫어졌다. 세상도 미웠고, 부모도 미웠고, 사람들도 미웠다. 모든 것이 불결하게만 느껴지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있는 둘째 누이와 함께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계시는 집에는 거의 발걸음을 하지 않은 채 친구 집과 친척들의 집을 이 년 가까이 오가며 중학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8살 이후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서울생활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고등학교 1학년 무렵이었다. 놀랍게도 아버지 역시 같은 서울하늘 아래에서 생활하고 계셨었다. 그러나 나를 더욱 놀라게 한 것은 누이의 권유로 어쩔 수 없이 찾은 아버지의 곁에 얌전히 앉아있던 어린아이였다. 가족들을 떠난 뒤로 아버지는 나름대로 제 2의 인생을 살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그러신 거냐고, 왜 우리를 버리셨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음과는 달리 입은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얼어붙은 입은 명절이랍시고 일년에 한번 잠깐씩 찾아 뵙는 날들이 더해가도 녹을 줄을 몰랐다.
둘째 누이는 추석과 구정 때가 되면 억지로 내 등을 떠밀어 한번은 아버지에게, 나머지 한번은 어머니에게 보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해야 한다고 했다. 가슴 속 원망이 아무리 많더라도 결국 부모라고 했다. 당시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였지만 부모님을 대신해 내게 헌신적인 둘째 누이의 말을 차마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일탈된 가족관계에서의 구성원이란 말은 무의미했다. 일년에 한번이나마 얼굴을 대하게 된 부모님도 그러했고, 큰누이와 막내 누이도 그러했다. 큰누이와 막내 누이는 몇 년에 한번도 부모님을 찾지 않았다. 자기 자신들만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큰누이의 경우엔 이런 집안 속내를 숨기고 결혼한 매형에게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해 부러 부모님을 더 멀리 하려했고, 막내 누이의 경우 자기 몸 하나 돌보기에도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살다보니 형제들 간에도 왕래가 많지 않았다. 오직 둘째 누이와 나만이 가족이란 이름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다시 십여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 우리 가족이 이렇듯 몇 십 년만에 함께 밥상을 마주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두 번째 인생 중, 가장 큰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이복동생 때문이었다. 나와는 14년, 큰누이와는 25년이라는 나이차이가 지는 아이였다. 명절 때나 한번씩 곁눈으로 보아왔던 그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엊그제 사고를 당한 직후 아직까지도 혼수상태였다. 아이가 사고를 당하던 날 새벽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었다. 무척이나 떨리는 음성이었다. 두서없는 사고내용을 잠깐 말씀하시더니 아이가 죽어간다는 말씀을 마지막으로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지나간 과거야 어찌 되었던 늘 내 앞에 당당하시려 했던 아버지였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아버지는 눈물 끝에 한 마디를 더 보태셨다. 비록 배다른 동생이라고는 해도 마지막 가는 길에 형제들 얼굴이나 보여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둘째 누이를 비롯해 오랫동안 연락이 뜸했었던 두 누이에게도 전화를 했다. 큰누이에게는 다소 오랜 시간동안 지금의 상황과 왜 가야하는지에 대해 설명을 해야했지만 다른 두 누이에게는 처음 들은 아버지의 울먹임만으로 설득이 가능했다.
몇 해 전 아버지가 서울 생활을 정리하시고 익산으로 이사를 하셨기에 아침까지 기다려 첫차를 타야했다. 밤새 한잠도 이루지 못했지만 정신만은 맑았기에 버스 안에 앉아있어야 하는 3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버지의 울먹임 하나만으로 얼굴 몇 번 마주한 적 없는 동생을 위해 익산으로 향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질 않았다. 아마 가슴에 쌓였던 원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벽 아버지가 하신 말씀 중에 한 부분이 영 찜찜하게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동생을 불쌍한 아이라 표현하셨다. 어린 시절 내가 받지 못했던 것을 이복동생은 다 받으며 자라왔는데 도대체 무엇이 불쌍한 아이라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질투라고 표현하기에는 스스로가 용납되지 않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길을 그토록 바랬던 때에는 모른 척 외면하셨던 분이 이제와 더 이상 부모의 손길이 필요치 않는 지금, 나이 서른이 다되어 가는 내게 손을 내미시는 것 자체가 용납하기 힘들었다. 창 밖 풍경 따윈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병원 응급실에 들어섰을 때 동생이 누워있는 침대 한편에 쪼그리고 계시는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내려오는 내내 한 마디쯤 해야겠다는 생각과는 달리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아버지를 위로한다거나 과장된 몸짓으로 아이의 상태를 살피는 척 하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아이를 바라보다 담당의사를 찾아 아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의사는 위급한 상태임에는 틀림없으나 아버지의 말씀처럼 오늘 하루를 넘기기 힘든 것은 아니라 했다. 일주일이 고비가 될 거라 했다. 아버지의 건너편에 간이의자 하나를 펼치고 앉았다. 침대 건너편에서 젖은 눈빛의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셨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히 할말이 없기도 했으나 오랫동안 굳어버린 입은 이런 상황이라 해도 쉽게 열릴 것 같지가 않았다. 해질녘이 다되어서야 큰누이와 막내 누이가 병원에 도착했다. 누이들 역시 내가 응급실에 들어와 했던 그대로를 답습하려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들이라 그런지 마음에 있든, 없든 아버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아이를 잠시 살피고 의사를 찾으려던 누이들에게 의사 대신 아이의 상태를 설명해 주었다. 잠시의 대화 끝에 또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며 식사제안을 한 것은 새어머니였다. 아버지와 나, 새어머니는 새벽부터 그때까지 밥 한 톨 입에 넣지 않은 상태였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그저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기에 모두가 병원 앞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생각해 보니 전부는 아니라 해도 4명 이상의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해본지가 20여 년만에 처음인 듯 했다.
막 식사를 시작하려 할 때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 미리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두었던 둘째 누이가 들어왔다. 병원에 누워있는 이복동생을 제외한다면 아버지와 그리고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은 자식들이 모두 모인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별다른 이야기가 오가지는 않았다. 세월이 우리 가족의 목소리를 모두 빼앗아 가버린 것만 같았다.
밥상 건너로 꾸역꾸역 넘어가지 않는 밥술을 뜨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온통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카락도 보였다. 이제는 중년부인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큰누이의 모습과, 삶에 고단함으로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는 막내 누이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만 같았다. 똑바로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들면 지금의 감정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둘째 누이의 엷은 미소와 마주쳤다. 그때서야 예전 누이가 내 등을 떠밀며 했던 말들이 가슴에 와 닿았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가슴 속 원망이 아무리 많아도 결국 부모라고……`
함께 밥상에 마주앉았던 그날 이후 동생은 어려운 고비를 넘겨 점점 더 호전되어가고 있고, 요즘의 나는 비록 효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자식된 도리를 다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시간이 허락되는 날이면 익산 행 버스에 오른다. 예전처럼 등을 떠밀려 가는 것이 아닌 진실한 마음으로 버스를 탄다. 시간이 날 때면 오랫동안 소원했던 누이들에게도 종종 연락을 하고 광주어머님께도 연락을 한다. 그날의 밥상이 내게 잊혀졌던 가족이란 의미를 푸짐하게 차려내어 준 것일까? 그날 밥상 너머로 아버지의 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었다.
`원망뿐인 아버지라 해도 돌아가신 후에 결국 후회하는 것은 분명 내가 될 것이야…….`
원전 : 스토리문학관
지은이 : 김진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