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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응은 그 어떤 조롱과 박대속에서도 꾸준히 철종 이후를 계산에 두고 속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래 네놈들 두고 보자 ,너희들이 권력 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만큼 나의 집념도 멈출수 없다)
이하응은 시정 잡배들과 어울리며 철저하게 자기 위장을 하여 안동 김씨들의 표적에서 비켜 나가면서 철종이후를 생각하며 죽은 순원왕후 김씨와는 전혀 교분이 없었으면 서도 신정왕후 조씨와 왕족으로서 교분은 계속 유지 해왔다 .

신정 왕후 조씨도 철종이 임금이 된후 시 어니인 순원 왕후 그늘 아래서 안동 김씨들 세도에 눌려 큰소리 한번 못치고 죽어 지내고있던 참에 비록 몰락한 왕족이지만 그래도 범상 해보이는 이하응과는 부담 없이 교분을 가질수 있었다 .

순원왕후가 죽자 대비는 되었으나 안동 김씨들은 철종에게 영향력을 주지 못하게 얼씬도 못 하게 하였다.
안동 김씨들은 힘 없는 조대비와 이하응과의 접촉을 그다지 의혹의 눈 초리로 보지 않았다 .힘 없는 대비와 몰락한 시정 잡배 이하응 이란 인물이 무슨 엉뚱한 짓이라도 하겠냐는 뜻에서였다 .

이하응은 조대비를 만날때는 은밀한 얘기가 오고 갔다 .철종 이후 문제였다 .
철종에게는 철인 왕후 김씨가 있었는데 조 대비의 시 어머니인 순원 왕후의 근친으로 세도가인 영은 부원군 김문근의 딸이다 15살 나이에 간택되어 원자를 낳았으나 금방죽었다.
안동 김씨들은 무식한 철종이 말도 않되는 소리로 정사를 좌지 우지 하려고 하면서 사사건건 말썽을 이르키자 아예 후궁들을 들여 보내 주어 궁녀들과 세월을 보내게 해 주었다 .

그래서 철종에게는 후궁이 자그만치 8 명이나 되는 데도 자식이 없다 .후궁과 궁녀들에게서 아들 넷을 낳기는 했었으나 어렸을때 모두 죽었다 . 살아 있는 자식이 라고는 숙의 범씨 소생의 공주 한명 뿐이었다 .
조대비가 그것을 모를리가 없었다 .
조대비는 안동 김씨들이 자기 친정 사람들의 출입을 감시하고 있어 만나기를 의식적으로 피 하였으나 왕족인 이하응이 문안차 방문 한다며 다녀 갈때는 별 부담이 없었다

어느날 이하응이 조대비에게
"대비마마, 철종께서 후사가 없으니 다음이 문제 아니옵니까?"
하고 넌지시 말을 던지었다
"글쎄 말이에요. 만일 이러다가 돌아 가신 다면 후사가 보통 문제가 아닌데요"
이하응은 이때다 하고
"마마 , 우리 명복이가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후사 후보 감에는 해당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단도 직입적으로 말을 던지었다
"..........."
조대비는 대답을 못하고 주위를 살핀다
"아무도 없습니다 .제가 주위에 있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조대비는 이하응의 태도에 다시 한번 놀랐다
"암요, 명복이가 올해 몇살이지요?"
"열 한살이옵니다"
"나이가 아직....."
조대비가 말을 마치기전에 이하응이 말도중에
"선왕들이 모두 어린 나이에 등극하여 수렴청정 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하자 조대비는 수렴 청정이란 말에 귀가 번쩍 트이었다
" 안동 김씨들이 그냥 있지 않을걸요"
조대비가 안동 김씨들을 의식하며 우려를 표한다
"걱정 마십시요 대제학 김병국 대감이나, 훈련도감 김병국 대감도 상가집에서 만나 잠간 대화를 나누었는데 저에 대하여 호의를 갖고 있는 분들이 있으니 아마 도움이 될것입니다"
"잘해보시오 , 잘못하면 역모로 몰릴지 모르니"
이렇게 하여 조대비와 이하응간의 은밀한 거래는 철종이 살아 있을때 부터 거래 아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조대비는 안동 김씨들의 세도에 불만을 품고있다가 결국 비록 몰락한 왕족 이지만 이하응에게 마음을 내 보인것이다

그런데 때는 일찍 닥아왔다
철종이 재위 14 년 6 개월만에 사망한것이다 .그의 나이33 세였다.
조대비가 기회를 놓질세라 옥새를 차지하였다 .
그리고 새임금을 정하기 위한 회를 소집했다 .안동 김씨들은 33 세의 젊은 철종이 별안간 그렇게 죽을지 몰랐다.더구나 철종이 살아 있을때 후사 문제를 거론조차 않은것에 당황 하였다 .아무도 대책이 없자
대제학 김병국이 먼저 말을 꺼냈다
"이번 일은 왕실의 큰 어른이신 대왕 대비께서 결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조대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흥선군 이하응의 두째 아들로 후사를 정합시다"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자 모두들 의외라는 듯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대신들 대부분이 안동 김씨들인 그들은 시정 잡배와 어울리며 돌아 다니는 몰락한 왕족이라는데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상가집 한 모퉁이에서 술상을 얻어 먹 고있던 무능한(?) 지아비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 한다는것이 그리 나쁠것 없었다 .
"지당한 말씀입니다"
정원용이 맞장구를 처 주었다
"그러면 흥선군 이하응의 두째 아들 명복을 제 26 대 임금으로 대를 잇게 하오"
대왕대비의 최종 명령이 떨어지었다

열두살의 명복은 조선의 26 대 임금으로 탄생한것이다. 이하응도 흥선군에서 대원군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대원군은 임금의 부친에게 내리는 호칭이었다 .이때 대원군 이하응의 나이 44 세였으니 그는 그때서야 자기의 시정 잡배라는 오명의 오랜 턴널에서 벗어난것이다 .

고종이된 명복은 나이가 겨우 열두살이기 때문에 예정 한대로 궁중의 최고 어른인 조대비가 수렴 청정을 시작했다 .
조대비는 동학란 사건으로 서울로 호송하는 도중에 철종의 서거로 친국을 못했던 최제우를 죽이도록 하고 동학 탄압에 들어갔다.

조대비가 수렴청정 하면서 전국각 처에서 농민들의 항쟁은 더욱 격화 되었다 .양반들은 양반들대로 자기 이익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천주 교세의 확장과 동학의 창궐은 조대비의 힘으로는 감당할수 없었다
조대비는 대원군 이하응을 예전 처럼 불러서 정사를 의논 하였으나 엄연히 안동김씨들이 눈을 부릅뜨고있는 상황하에서는 한계가있었다 .
결국 조대비는 수렴청정 권한 대부분을 대원군 이하응에게 넘겨준다

대원군은 궁궐에 들어 올때는 창덕궁내 관물헌에서 머물렀고 그의 일상적인 정치활동 공간은 운현궁이었다 . 대원군은 가급적이면 국왕 면전에 나가지않고 중요한 법령제정 같은것만 왕의 결재를 받았고 실무적인 문제는 거의가 국왕에게 아뢰지 않고 "분부(吩咐)"라는 형식으로 명령을 내렸다
"대원위 분부"
라는 명령서만 있으면 전국어디고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다 .
당황 한것은 안동 김씨 가문이 사실상의 권력 독점의 역활을 했던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지금 까지 중요치 않은 일은 국왕으로 부터도 직접 지시 받지않고도 권력행사를 하던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의 총 본산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후 모든 중요 명령은 운현궁이나 창덕궁 관물헌에서 명령이 하달 되었다.
처음에는 비변사의 안동 김씨들이 반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대원군이 발하는 대원위 분부는 자기들이 지금 까지 해온 명령의 한계를 넘는 무시 무시한 정책이 개혁이란 이름으로 마고 쏟아저 비변사로서는 어리둥절 할수 밖에 없었다

섭정의 대권을 조대비로부터 부여 받은 대원군은 안동김씨세도정치를 분쇄하며 몰락한 왕권을 회복하고 몰려오는 외세를 막아 내기 위하여 과감한 "대원위 분부 "가 나오기시작한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대원군 전횡(專橫) 정치가 시작된것이다.

대원군은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서원(書院)의 유생들이 글이나 읽으며 백성들위에 군림하려는 태도에 도 이상의 반감을 갖고있었다.
그는 고종 8 년 3 월 각도에 있는 600여개의 서원에 폐쇄령을 내리고 서원에서 공부하고있는 유생들을 모두 자기고향집으로 돌아 가게 하였다 .
이에 분노한 유생들은 대궐 앞에 모여 서원의 부활을 청원하는 수만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끝내 굽히지 않고 형조와 한성부의 병사들을 풀어 유생들을 한강넘어로 내 쫓기 까지했다 .

이제 대원군의 행동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대원군은 다음 대대적 인사 이동을 단행한다
조두순을 영의정, 김병학을 우의정, 정기세를 병조판서, 김세균을 호조판서, 이승보를 선혜청 당상, 이경하를 훈련대장, 이장염을 금위대장 , 이경우를 어영대장, 이방현을 총융사, 신명순을 우 포도대장,으로 발령을 내었는데 모두가 대원군 일파였다 .

대원군은 또 각도에 비밀히 관원을 보내 양반들의 거동을 살피게하고 백성들을 못살게하는자가 있으면 당사자를 처벌하고 가산을 몰수하게 하였다.
또 나라에 공이있는 자손에게 면제해주는 신포(身布)면제 제도를 없애버리고 충훈(忠勳)자손이고 양반이고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모두 이를 징수했다 .
그리고 각도 감사에게 "대원위 분부"를 발하여 세금 걷는것을 엄격하게 하여 세금을 천석을 내지 않는자는 참수하고 천석 이하를 내지 않는자는 유배를 보내게 하는등 비상 수단을 썼는데 이것도 그가 경복궁 중건의 재정 염출을 위한 포석이 저변에 깔려있었다

눈코 뜰새 없는 "대원위 분부"에 어리둥절 한것은 안동 김씨들이었다 .더구나 안동김씨들의 구심점인 비변사 까지 폐지 시켰으니 허탈 감이 이루 말할수 없었다 .

확고한 기반을 닦은 대원군은 백성들이 깜짝 놀랄만한 사업을 기획 하였는데 바로 엄청난 재정이 들어가는 경복궁 중수의 토목 사업이었다 .
이사업은 고종 2 년 4 월에 착공한 대 사업으로 이 대사업의 자금으로 왕족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 까지 "스스로 바치는 돈"이라 일컫는 원납전(願納錢)이라는 명목을 붙쳐 스스로가 아닌 반강제적으로 받아냈다.

경복궁은 임진란 불이난 이후 지금 까지 방치 상태였다가 일으키는 거대한 공사로 엄청난 국가 재정이들어가는 공사였다
"아니 백성들은 살수가 없어 막막한데 별안간 경복궁을 짓는다고 야단이지?"
백성들의 불만이나오기시작하였다 .
"개혁 개혁 잘도 떠들더니 이제는 백성들의 주머니나 털 생각이군....."
원납전 이라고 하며 관에서 걷워가는 돈을 빼앗기다 시피 내 주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

백성들의 불평은 아랑곳 하지 않고 "대원위 분부"계속 발동 된다 .
조정 대신들은 있으나 마나이었다 .그들은 모두 대원군이 세워 놓은 꼮두각시에 불과 했다 .
경복궁 공사에 들어가는 돈은 엄청났다 .
시작한 공사를 중단 한다면 대원군의 체면은 무엇이될것인가 하는 강박 관념에서 대원군은 공사를 더 밀어 부쳤다

대원군은 원납전으로는 터무니 없는 공사비를 감당 할수 없자 전지(田地)의 세곡(稅穀)에 추가하여 내는 결두전(結頭錢)의 세율을 아주 높이 올려 받아 내었다
"세금을 이렇게 올리면 백성들은 어떡히 살라고 그러누......."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이 늘어나고 있었다
"합하(閤下),세금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백성들 원성이 자자한데요..."
균역청 관원이 애로를 보고하자 대원군은
"누가 불평을 해? 나라의 대 사업을 앞두고 원납전을 내어도 시원치 않은때 내지도 않는 주제에 ..."
"세율이 너무 높아서...."
"나라에서 하라면 했지 무슨 불평이 많아? 잔말 말고 법대로 세금을 부과 시키되, 안내고 체납하면 법대로 처벌하면 되지 "
대원위 분부는 법이었다
(법 대로만 하라니?)
균역청 관리는 어이 없다는듯이 물러가면서 얼마전 내린 대원위분부를 다시한번 되새겨 보았다
(세금을 천석을 체납하는자는 참수하고 ,천석 이하를 내지 않는자는 유배를 보낸다 )
그는 혼자말로 지꺼렸다
"참수와 유배자가 넘치겠구먼......."

대원군은 이에 만족 하지 않고 고종 4 년2 월에는 서울의 도성문을 출입 하는자 마다 문세(門稅)까지 받아 냈다
"허허 개혁 개혁 하더니 미쳤어 ...오래 살더니 별꼴 다보는군 문세(門稅)가 다 무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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