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이야기(80)-세금 뜯어내기 바쁘다 바빠....-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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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궐의 윗 어른은 순조의 왕비인 순원 왕후 김씨로서, 죽은 효명세자가 추존된 익종의 부인 신정 왕후 조씨가 있었으나 역시 어른은 시어머니 순조의 부인인 순원 왕후 김씨 였다.
국가의 대군이 철종에게 이어지고 철종을 수렴 청정을 할머니인 순원왕후 김씨가 행사하자 그간 10 여년간 세도를 부리던 풍양 조씨들은 하루 아침에 안동 김씨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시대의 세계는 조선과 교류가 많았던 청나라가 서양 세력이 물밀듯이 밀려 들자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나와 청 나라를 흔드는 반란이 일어나났다.
철종 11 년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중국의 수도 북경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 되기도 했다.이 사건으로 청나라는 천주교를 공식적으로 믿어도 좋다는 조약을 영국과 프랑스 양국과 조약을 맺는다 .
그러나 조선은 천주교 탄압을 계속하여 수 많은 신도들이 잡혀 죽는다.

조선도 바야흐로 청나라가 천주교를 인정 함으로서 다시 한번 검토 하여야 할 위치에서야 했다 .그러나 안동김씨 일파는 돈을 받고 벼슬 팔기와 권력을 과시하기에 여념이없었으니 우물안 개구리나 다름 없었다

수렴 청정은 3 년만에 철종에게 친정으로 돌아 왔으나 철종은 여전히 안동 김씨들 그늘 밑에서 자신의 의지 대로 할수 없는 불우한 왕이 되어 있었다 .신정왕후 조씨가 있었으나 안동김씨 위세에 밀려 시어머니인 순원왕후의 권세 만큼 은 어림도 없었다

신정왕후조씨는 안동김씨에대한 반발로 왕족들과는 가차히 접촉하였다 .특히 남연군의 아들 이하응과는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이하응은 시정 잡배와 가까이 지내는 건달이라하여 안동 김씨들은 신정왕후와 이하응과의 접촉에 별로 신경 쓰지않았다
.이하응은 안동김씨들을 경계하는 말을 은밀히 신정왕후 조씨에게 했고 조씨도 이를 은근히 받아들였다 .서로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지었던 것이다.

철종은 단순한 마음으로 자기가 강화도 시절 보아 온 불우한 사람들을 생각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 던가 한해나 장마로 피해 입은 백성들을 위하여 이재민 도움에 남과 다른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

이러한 모든 구휼 (救恤)정책도 돈 없이는 할수 없는것인데 세금을 내어야할 사람들이 세금을 못내고 이농 하는 농민들의 현실도 모르는 무식한 철종은 의욕만 내세우다가 바닥난 재정에 속수 무책으로 명분 좋은 구휼 정책도 중도 포기하고 만다
결국 그는 길지 않은 경험과 깊이 배우지 못한 지식이 문제였다.게다가 자기는 농민 출신 이었다는 자괴감에 빠저 뜻 있는 데다 안동 김씨들의 전횡에 기를 펴지 못하고 주저 앉고 만다

말하자면 왕은 안동 김씨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는 남 다른 애정을 보였지만 그것도 충분치 못한 재정 으로는 불가능 하다는 한계점에 도달 한것이다
이를 테면 왕은 친정을 시작한 해에 평안도 지방의 기근 대책, 함흥이 대 화재 사건, 영남의 수재 사건등에 적지 않은 재정을 투입했다 . 이로인해 국가가 갖고 있던 재정은 바닥이 날수 밖에 없었다. 막대한 세금을 백성들로 부터 걷워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

조선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는 벼슬을 얻지 못 했다 .조선 시대의 벼슬이란 권력과 부(富)가 자연적으로 굴러 들어 오는 화수분이었다 .
조선시대의 부는 토지와 직결 되어 있고 토지는 원천적으로 국가 소유 였지만 과전법을 토대로 등급에 따라 관리들에게 나라에서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지주는 양반 일수 밖에 없었다 .
하지만 실제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은 일반 농민들이 었기 때문에 관리들은 소작인인 농민들이 농사 지어 먹는 대가로 세금을 걷우워서 그것으로 생활을 했다.

이 과전 제도는 세습되기도 했기 때문에 누구든지 양반 벼슬을 하면 가만히 앉아서 농민들로 부터 손톱 하나 까딱 않고 세금만 받아 먹고 싶어 하는것은 인지 상정이었다
그러니 양반 벼슬은 농민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다
양반이 되어야 지주가 될수 있다 .벼슬을 못 하면 자손 대대로 소작인으로 고생만 하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어있다.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소작인인 농민들은 수확량의 10 %만 조세로 나라에 바치고 그나머지 90 %를 가지고 지주인 양반과 소작인인 농민이 절반씩을 나누어 갖게 되어 있었다. 땅주인이 국가라는 것은 허울 뿐이고 벼슬을 한 양반들의 땅이었다 .
그러니 누군들 양반 되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는가?

양반 벼슬을 하려면 실력으로 해야 하겠지만 어찌된 세상 인지 문벌에 속 하든가 돈이있어야 했다 . 아니 문벌 보다도 돈 꾸러미를 갖다 받쳐야 약효가 빨라서 지방 수령 자리라도 한자리라도 할수 있었다

.안동김씨들이라고 다썩은 사람들은 아니었다 ,대제학 김병국,훈련도감 김병국, 정원용 같은 사람들은비교적 부패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이하응은 안동 김씨들중에서도 이들과는 가까이 다녔고 그들도 어렴풋이 이하응의 진실된면을 찾으려 애를 쓰는 편이었다.

여기서 말썽이되는 지방 행정 체계좀 알아보자
지방행정의 최고 벼슬은 관찰사 인데 관찰사 만큼은 임금이 직접 임명 하는 것 이므로 문벌 이나 돈으로 거래 하기는 힘들고 그 다음 계급인 수령 자리가 문제 이다 .수령은 지역의 중요도에 따라 두었는데 부윤, 목사, 군수, 현령 ,현감,등의 계급 순인데 이들을 통 털어 지방 수령이라 부른다 .
이들은 과거 나 각종 시험에 의해 임명해야 하는데 철종대에 와서는 뒷 구멍으로 돈을 받고 임명 하는것이 비일 비재였다.
그 아래가 면장, 이정, 6 방으로 나누는데 6 방은 이방, 호방, 예방,병방,형방,공방 등 6 방이있다.모두 수령이 임명하는 직종이다.

세상은 점점 어지러워갔다.
서울에는 도둑 떼들이 대 낮에도 공공연히 집을 털고 시골에서는 떼 도둑이 30 여명씩 말을 타고 포를 쏘며 온 마을을 휩쓸었다 .
"명화적이다"
하고 마을 누군가가 소리치면 몸을 산속으로 피해야지 우물 쭈물 하던가 대항하면 살려 두지 않았다 .명화적(明火賊)이란 밤에만 횃불을 들고 기습 습격 하기 때문에 붙인 명칭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바닷가나 강가에는 수적(水賊)들이 해안가 마을을 털거나 강가를 거슬러 올라와 강가의 민가를 털었다 .

이들 도적들은 대부분 국가와 양반들 한테 세금을 받치고 나니 살길이 막막 하자 모두 도둑으로 변한사람들이었다 .
이토록 과중한 세금으로 백성들은 허덕이고 있는데 권력층들은 조금도 아랑곳 하지않았다 .철종도 처음에는 어려운사람들에 관하여 관심 갖는 듯하더니 안동 김씨들 세도에 기가 질려 매일 같이 궁녀들에 휩싸여 노는데 만 정신을 쏫고있었다 .

나라가 이 지경이니 지방 수령들도 혼자만 충성을 다하면 무엇 하느냐는 자포 자기로 경쟁적으로 백성들에 대해 협잡질을 일삼았고 안동김씨 일문에 뇌물을 바치고 벼슬을 산 수령 일수록 도가 더 심했다 .
(군수 한 자리 하는데 든 돈이 얼마인데 ....본 전을 빼고도 군수로 있는 동안 본전에 너 대섯배는 뽑아야 할것 아닌가?")
수령들은 돈 긁어 모으는 궁리로 날을 밝혔다.

특히 진주에 있는 경상우도 병마사 백낙신은 진주 목사와 결탁하여 1 년동안 무려 1만냥이나 긁어 모아 목사와 나누어 먹고 서울 대감댁에도 상납을 했다
백낙신은 돈에 맛을 들이자 다음에는 양반들을 모아 놓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지금 경상우도는 재정이 말이 아니오.여러분들은 농민들로 부터 걷은 세금도 있으나 병사는 걷을 방법이 없오 그래서 그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것이오 고을 병력 발전을 위해서 7 만냥쯤 만들어주시오"
"병사또, 너무 합니다,백성들도 지금 농사를 짓지 않고 모두 농촌을 떠나는 판국에 병사의 생각 만큼 충족하 지 못하오, 그건 어렵습니다"
"정말 그러기요? 내 명령은 나라님의 명령이나 같소 .두말 말고 준비나 하시오"
그러나 양반들은 날자만 미루면서 돈을 내지 않자
(이놈들이 아직 내 맛을 못 보았구나)
하고 양반 몇사람을 옥에 가두었다 .

그런데 서울에서 성균관 교리로 있었던 이명윤 만큼은 마음대로 할수가 없었다
(병사놈을 그냥 두어서는 않되겠어...)
이명윤은 잡혀 갈 위기에 빠진 양반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했다.
" 여러분들은 백병사의 요구를 어떵게 생각하오? 돈을 내겠소? 아니면 무슨 방법이라도 강구하겠소?"
"......."
성미가 급한 유계춘이 나섰다.
"내 이놈을 진주에서 쫓아 내고야 말겠소 ,양반들이 농민들로 받는 세금이 과중 하다하여 전정이나 환곡을 제대로 시행도 못하고있는데 병사는 무조건하고 돈을 내라니 말도 안되오.그런 썩어 빠진 놈 때문에 나라가 이꼴이오 .내 농민들을 찾아 다니며 백병사놈 때문에 못살게 된다고 하여 항의 하자고 할것이니 그리아시오"
"쉽지 않을거요"
"걱정 마시오 내가 앞장 서겠소"
유계춘은 마을 마다 돌며 병사의 비행을 예를 들고 진주 병영을 습격 하자 하였다

철종 13 년 2 월 19 일 장날 이었다 ,유게춘은 자기가 모은 농민들과 장꾼들을 선동하여 진주 병사의 집을 습격하였다
"세금 때문에 못살겠다 .백병사를 잡아라"
병영에 있던 관리들이 준비 없이 맥 놓고 있다가 별안간 들여 닥친 농민들에게 얻어 맞고 터지고 도망치었다 .
병사 백낙신은 포로로 잡히었다.
성균관 교리로있던 이명윤이
"백낙신 병삿또 그동안 진주에서 걷우워 들인 쌀과 돈이 어디있오?,"
하고 물었다.
백낙신은 온몸이 꽁꽁 묶이어 병사시절의 당당하던 모습은 어디로가고 초체한 얼굴로대답하였다
"쌀은 창고에 있으나 돈은 모두 서울 대감댁에 올려 보냈소 . 나는 가진게 없소 이다 . 이몸이나 풀어주시오"
이명윤이 질타한다

" 병사라는 것이 나라를 지키라고 나와 있는 것이지 지방 양반들에게서 세금을 걷우라고 내 보냈소? 알고 보면 병사가 걷으려는것은 세금의 일종이오 .그렇다면 그대가 양반들로 부터 그렇게 세금을 마구잡이로 걷는다면 양반들은 그 돈을 어디서 걷는 다는말이오? 답은 분명하오 .농민들로 부터 세금을 걷는수 밖에 없는것이오 .그렇다면 지금 농민들이 정상적으로 내는 세금도 많은데 웃돈을 더걷워 내어야 하니 양반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이오?
"............."
백낙신은 말을 못하고 있었다

그사이에 병영 창고문이 뜯기고 곡식들을 모두 밖으로 내가고 밖에 있던 농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고 있었다.
이명윤과 유계춘등은 이사건 3 일만에 백낙신을 죽이지는 않고 풀어 주면서
"백병사, 농민들에게 병사를 맡겨 두면 폭도화 되어 죽일 까봐 우리가 백병사를 보호하고 있던것이오. 이번 사건을 가지고 병사가 그동안 행적이 정당 하다면 얼마든지 보고하오 .대신 서울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묻는 다면 내가 당당히 사건 전말을 대답 하리다"
하고 백낙신을 풀어주고 뿔뿔이흩어지었다.

백낙신은 나라일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병영을 부수고 아전들을 죽였다고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
물론 상소문에는 자기의 그동안 자기 비행은 쏙빼고.......
조정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소식을 접하고 있다가 상소문을 보고 곧 조사관을 진주로 내려 보내 진상을 조사시켰다 .
조사결과 백낙신이 1 년동안 1 만냥을 가로채 받아 먹었다는 비행이 들어났다 .
조정에서는 백낙신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었다.
이어 조정에서는 주모자 유계춘을 잡아 죽이고, 이명윤은 귀양 보내는것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 진주 민란을 계기로 전국각지에서 과중한 세금에 항의하는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 재산을 빼앗기고 굶주린 농민들이 오랬동안 참았던 분노가 폭발한것이다.

철종은 그제서야 민심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흥분된 백성을 달래는 선무사와 관리의 비행을 조사하는 암행어사를 각도에 풀었다 .그러나 뿌리깊은 양반들의 세금수탈이 제도화 된이상 임시 방편적인 대책으로는 해결 될수가 없었다.
부패한 외척과 양반사회와 과중한 세금 문제가 해결 되기전에는 문제 해결은 요원했다.
철종이 디렘마에 빠진것도 바로 이 부패한 양반사회와 과중한 세금과, 외척이었다 .

안동 김씨 세도정치로 완전히 물든 뿌리는 하도 깊어서 철종의 힘으로서는 어찌할수 없이 구조화 되어 있었다.
나라가 망할려면 재정낭비가 심하여 돈이 많이 필요하고 돈을 마련하는 방법중 제일 쉬운 방법은 백성들로 부터 세금을 마구 잡이로 올려서 뜯어 내는 방법 같이 쉬운 방법이 없다 .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도 자기들은 굶어죽을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의 민란으로 나라의 천주교 감시에 소흘해진 기회를 틈타 천주교는 교세 확장에 좋은 기회로 보았다. 그사이에 조선에는 외국 신부들이 줄줄이 들어 왔다.특히 황해도와 평안도에 천주교인이 수만명에 이르렀다.

영호남 지역에서는 과중한 세금에 대한 실망으로 조선 왕조 대신 인간 존중과 인간 평등 사상을 제시한 동학이 나타 나자 급속도로 퍼저나가기 시작 했다.
동학은 철종 11 년 4 월에 최제우가 창건한 종교로서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였다 동학이라는 명칭은 최제우가 서교인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방의 도를 일으킨다는 붙인이름이다 .
동학은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과 적서 차별을 반대한 서민들이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의 내용을 보아서 백성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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