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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재위 기간은 나라백성들의 경제 상태가 엉망인데도 조정에서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동인과 서인으로 파를 이루어 정권욕에만 눈이어두워
있었다.
반면 유명한 인물들도 많이 나타 났었지만 선조는 이들의 당파 대립에 휩싸여 정치 다운 정치를 못하였다.
동인과 서인측은
자기네 들이 추진하는 정책에 반영이 않되면 무조건 서로가 서로의 정책을 반대하였다.
임금에게는 양쪽에서 거의 매일 같이 서로 자기들이
옳다고 왕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학문을 가지고도 서로 논쟁을 일 삼았다.퇴계 이황은 이기 이원론이라는 학설을 주장해 제자들이 구름 처럼 모여
들었었다. 이들을 영남 학파라 부른다.주로 동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선조는 이황을 불러 대제학이라는 벼슬을 주어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보려
하였지만 이황은 이를 사양하고 고향의 도산 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가 70 세에 사망한다 .
반대로 율곡 이이가 주장하는 학파를
기호 학파라 하고 주로 서인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율곡은 1536 년 외가인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그는 이황 못지 않은 학문을 갖고
있었다.그의 학풍은 중종시절 불교의 여향을 받아 이기설과 원리 기를 주장하였다.
율곡은 서인 이었지 만 동서인간의 불화를 개탄하고 두
조직간의 화해를 모색하다가 오히려 동인과 서인측에서 서로 배척을 당하였다.
율곡 이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서인을 떠나 동인편에 붙어
버렸다.
율곡 이이에게는 정여립 이라는 후학이 있었다. 정여립은 율곡이 몹시 아끼는 제자였다 . 학문이 뛰어 날 뿐만 아니라
무예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
율곡이이가 죽자 얼마 않되어서였다.
안악군수 이축이 어느날 조정에 나타나 임금께 아뢰었다
"정여립이 역모를 하고 있나이다"
"뭣이 ? 정여립이라면 율곡의 제자가 아니더냐?"
"그렇사옵니다.정여립은 조유식,
신여성등과 작당하여 대동계라는것을 조직 몰래 군사 훈련 까지 시켜 놓고 정씨 왕국을 만든다고 호언하고있다 하옵니다 "
임금은 이말을 듣고
두말 없이 즉시 정여립을 잡아오라 명 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서인 편 대신들측에서 정여립이 불만을 품고 율곡이 죽은 후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정여립 일당 체포작전으로 뒤숭숭한 사이에 정여립은 전라도 죽도 로 도망 갔다가 목슴을 부지할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살하고 만다
이 사건을 기화로 서인들은 힘을 입어 더 큰소리치기 시작 했다.서인측 유생 양천회가 상소를 올렸다
"정여립 단독 행동이 아닙니다.분명히 동인편에서 꾸민 역모가 분명합니다.전하옵께서는 이기회에 정여립과 평소 내통있는 사람들을 모두
소탕해야 합니다"
서인측 대신들이 왕에게 충동질을 했다.
우의정 정언신이 동인이면서 정여립과 친히 지냈다는이유로 갑산에 유배되었고
부제학 이발도 동인으로서 관련이 있다하여 여러명이 잡혀 죽었다.
동인과 서인이 대립하고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조야가 시끄러웠을때 왜국이
침략 본성을 들어 내고 내어 1592년 4 월 13일 15 만 대군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7
년에 걸쳐 왜군의 말발굽에 유린되어 백성들은 살길이 막연하여 방황하고 있을때도 조정의 신하들은 언제 무슨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동서인간의 권력
다툼은 날이 샐줄 몰랐다.
자기 파들의 세력 확장을 위하여 상대방의 약점을 물고 늘어 지기가 일수였다.동인 서인은 북인 남인으로 북인은
다시 소북과 대북으로 갈라저 권력 다툼은 계속된다
이런 와중에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1608 년에 광해군이 대를 잇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