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이야기(27)--梨峙戰鬪-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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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금산 군수 권종은 왜군이 황간에 주둔 하면서 금산을 친다는 보고가 들어와 있었다.
당시 금산에는 군수 권종이 지키고 있었는데 금산을
경비 하고 있는 병력 이래야 지방 유생과 의병100 여명 뿐이었다 ,전라 감사가있는 전주부로 구원병 요청을 하였다
.당시 전라 감사 였던
이광은 용인 패전과 수원 광교산 패전 책임을 물어 파직 하였기때문에 광주 목사 권율이 전라 감사겸 순찰사로 임명을 받은 상태 였으나 파직
발령장이 전주 이광에게 전달후 임명장은 광주 까지 전달이 않된 상태였기 때문에 전주는 완전히 공백 상태나 다름 없었다 .

권율은
전라감사로 발령난 사실도 모르고 군사들을 이끌고 서울 수복을 목표로 상경중이었다.
금산 동헌에서 전주부 전라 감사에게 보낸 병사가 회답을
가져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군수는 병사가 어서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과연 급히 달려온 병사가 말에서 내리기도 바쁘게
"삿도 큰
일이옵니다 ."
"무슨 소식이냐 , 감사의 원병 요청이 어찌되었느냐?"
병사는 권종이 써서 보낸 서신을 품속에서 꺼내더니

"전라감사가 파직 되었다 하옵니다"
"그렇다면 후임이 누구더란 말이냐?"
"광주목사 권율 장군이라 하옵니다 "
"그래
권감사에게 그편지를 전하지 않고 왜 도루 가져 왔느냐?"
"삿도 ,전주부 동헌에 도착했는데 전라감사가 아직 부임 않했다고 하여 되
돌아왔습니다 "
"그러면 신임 감사는 아직도 광주에 계시다더냐?"
"아닙니다 광주를 출발 순창까지 도착했다 하옵는데 전주 까지 도착
하려면 하루 더 걸릴것이라 합니다 "
"알았다, 그러면 내 다시 서신을 써줄것이니 급히 전주에 도착할 신임 감사에게 전하라"
전주로
올라 오고있는 권율군과 합세 하려면 아무리 하루 반나절을 벋히어야 한다. 금산군수 권종은 급히 지방 유생들과 의병을 모아놓고 권율군이 상경중이니
왜군을 그때 까지 벋히기를 간곡히 부탁 하였다 .
그날밤 유생들과 의병들은 무주 쪽에서 서낭 고개를 넘어 올것을 대비하여 관천리에 집중
배치하고 있었다 . 그이유는 양산면 쪽은 금강 줄기인 봉황천이 흘러 왜군이 개천쪽으로 오지 않으리 라는 판단 때문 이었다 .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왜군 소조천 융경군은 위험한 산악지를 피해 금강 줄기를 타고 금산 성내로 무혈 입성하고 말았다 .늙은 왜장 소조천 융경의 작전이 잘
맞아든것이었다 .
소조천 융경은 입성 하자 마자 잡은 조선병을 앞장 세워 서낭당 고개를 포위하고 금산군수 권종이거느리는 100 여명의
의병과 유생들의 주둔지를 급습 한다 이에 권종과 의병들은 왜군 2000명의 대 병력 앞에 중과 부적으로 장렬히 모두 전사 하고 만다
.
이에 금산성은 왜군들에게 점령 당하고 왜장 소조천 융경은 금산에 거점을 두고 전주부 점령의 계획을세우게 되었다 .

왜군들은
경상도 의령에서 홍의 장군인 곽재우에게 패한 분풀이를 할겸 전라도 점령의 큰 계획을 성취 하려고 전주로 처 들어 가려는 계획을 세워 두개
군사들로 나누어 하나는 용담, 진안을 거쳐 웅치(雄峙)로, 다른 군사들은 진산, 이치(梨峙)를 거처 전주로 처들어가는 계획을 세웠다
.

광주목사 권율은 격문을 띄워 병사들을 추가 모집한 결과 1500 명이나되어 이들을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가 북상 하기
시작한것이다.
이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를 삼아 왜군을 몰아내고 서울을 수복해 줄것을 하교하였다.
권율이 전주성에 도착
하자 그때서야 전라 감사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금산군수의 사망소식과 그가 살았을때 보낸 서신을 뒤 늦게 받고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며 권율자신은
직접 이치를 맡기로하고 김제군수 정담에게는 웅치를 맡게하였다 .전주성 수비는 전적 이정란에게 맡기되 파직된 전 전라감사 이광도 백의종군케
하도록하였다

권율군의 구성은 김제군수 정담,해남현감 변응정, 나주판관 이복남,의병장 황박 등이었고 왜군장수는 소조천융경과 그의
부장 안국사호혜로 양쪽 이 모두 정예군으로 편성된 강군이었다
.
7월7일 적들은 웅치를 공격 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이에 못지
않게 황복과 이복남이 쏘아 댄 화살에 못이겨 고개 위조차 올라와 보지 못하고 물러났다.
다음날 새벽에 왜군은 또 전 병력을 동원 죽을
힘으로 공격하여 왔다 계곡이 왜군의 함성으로 가득차고 총칼이번득이었다.황박이 지키고있던 제1선이 무너지고 제 2선에있던 이복남진으로 적이 몰려
들기시작했다 이복남의 진이 또 무너지고 왜군들은 고개위 까지 치닫자 정담이 제일 높은곳에서 시위를 당겨 적장을 맞추어 죽게 하니왜 군들이
섬뜩하여 주춤하는데 저쪽에서 화살이 떨어 지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말에서 뛰어내려 왜군들 속에 뛰어 들어 백병전이 벌어지었다. 해남 현감
변응정은 부상을 당하여 전주부로 후송되었고 나주 판관 이복남이 겁을 먹고 말을 돌려 고개 밑에있는 안덕원으로 도망하였다.
정담은 이복남을
바라보며
"나주 판관 어디로 도망 가는거냐?,도망 가려거든 화살이나 던지고 도망가라 "
하고 고함을 쳤다.
이때 정담의 비장인
강운과 박형길도 정담의 비장한 말에 감동되어 왜군과 싸우다 적 수십명을 쏘아죽이고 장열히 전사한다 .정담도 왜군의 칼에 맞아 죽고만다 .왜군들은
조선군이 전쟁이래 과감한 항거에 처음으로 놀랐다.
왜군부장 안국사호혜가
"놀랍다 , 조선군이 모두 도망이나 치는 겁장이들로 알았더니
이렇게 용감 하다니 조선 전쟁이래 처음이로다 "
하고 감탄 하더니 조선군의 시체를 끌어 모으라하여 큰 무덤을 만들고 표목을 다음과같이 써서
세워주었다 .
"弔 朝鮮軍 忠肝義膽"(조선의 충신과 의사들의 혼령을 조상하노라)

7월9 일왜군들은 웅치를 넘어 전주성 밖에
까지 진출하였다 .날이 어둑 어둑 해지자 왜군들도 지쳐서 늘어저있었다.성 안에 있던 이광은 어느새 어디론가 도망가고 권율로부터 오직 전주성을
지키라고 지시 받은 이정란(李廷鸞)이 이치에 나가기 전에 권율과 약속한 대로 적으로 하여금 의심 하게끔 만든 가짜 군인 옷을 입혀 성위에 곳곳에
세워 놓고 성안에는 불을 피워 환하게 해 놓는동시에 성문을 열고 기마병으로 습격하는등 유격술을 쓰자 왜군은 다음날 이치령 을 공격 나간
1000명과 합쳐 전주성을 치기로하고일단 다시 금산으로 돌아갔다

이치(梨峙)를 향하여 공격 하려고 진군 하던 또 다른 왜군
1000 명은 7 월8 일 새벽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공격을 시작하였다 .
가지 각색의 투구와 창과 칼과 조총을 든 왜군이 장수는 말을
타고 나왔다 .그들이상대를 위압 하기위한 알록 달록한 깃발을 수백개를 흔들며 권율군을 현란 시키려 들었다 소리가 너 무요란하고 깃발이 산야를
덮어 산새들이 놀라 도망가고 노루 멧돼지들이 이리뛰고 저리뛰고 난리가 났다.

피아간의 인마의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며 왜군은
권율군을 향하여 비오듯이 화살과 총을 쏘아댔다
광교산 전투때 유일하게 매복 공격 당했던 권율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소조천 융경은
이곳에 강한 정예병을 투입 시켰던것이다.
적들이 언덕을 기어 오르자 그때까지 조용히있 던 조선군에게 일제히 공격령이 떨어지고 조선군의
화살이 비오듯이 적의 가슴팍을 명중시킨다

동복 현감 황진이 쏘는 화살에 추풍 낙엽 처럼 나둥그래 지었다 .적장이 말에서 떨어지자
주인 잃은 전투마가 이리뛰고 저리 뛰고 적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권율이 만들도록지시한 말이 뛰어 넘지 못하게 하는 거마, 말이 걸리게끔 나무
가지를 사슴 처럼 배치한 녹채, 말이나 적들이 전투 중 빠지게 하는 풀 덮은 함정,쇳줄을 중간 중간 매어놓아 걸리게하는 철질여 .....이들이
나무와 나무사이 수풀속에 설치 해놓아 왜군들은 총을 가지고도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가꾸러지었다.
편장 위대기는 복병으로 숨어있다가 왜군
후방을 공격하였고 편장 공시억은 1차 공격 후 물러가면 2차공격 등 공격을 늦추지않았다.

권율은 붉은색 금빛나는 비늘 이 빛나는
갑옷을 입고 검은색의 쇠와 붉은 구리 투구를 쓰고 직접 진두 지휘하니 조선군사들이 이를 보고 그 위용에 힘 입어 더욱 단검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찔러 죽이었다.
황진이 적장 한명을 활로 쏘아 맞치니 그 뒤를 따르던 소총수가 발악을 하며 죽기 아니면 살기로 뛰어 나와 황진에게 조총을
쏘아 쓸어 뜨렸다.
이를 본 편장 위대기가 분함을 못이기고 그 조총수에게 달려가 단칼에 목을 자른다.
왜군들은 황진이 부상 한것을
보자 사기 등등하여 목책안 까지 처들어왔다 .
조선군들이 놀라 도망치려는 기미가 보이자 이에 권율이 북을 치게하고 목책으로 들어온 적들에게
집중 화살 공격을 가하여 격퇴시킨다.
저녁이되자 조선군이 피로해보이며 사기가 저하 되었다. 이를 눈치챈 왜군 돌격대가 조선군 진지로 뛰어
들었다. 조선군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권율이 크게 노하여 긴칼을 뽑아 들고 적장을 내리쳐 죽이니 조선군사들이 힘을 얻어 일제히 반격에
들어갔다.
왜군은 이에 패색이짙어지고 부상한 왜군은 살려달고 하는가하면 부처님께 살려다라고 비는자들도있었다. 왜군 도망자들도 속출하기
시작하였는데 활과 칼과 총을 내던지고 도망치기시작하였다.
기고만장하던 왜군은 썰물과 같이 밀려나가고 곳곳에 왜군 시체가 즐비하게 깔리었다


왜군은 다시 금산성으로 도망가서 마침내 전라도 침공을 포기하고 퇴각한다
조선에 나와서 조선군에게 패하기는 이번이처음이었다
.
권율은 이 싸움이 끝나고서야 비로서 전라도 관찰사과 순찰사 된보람을 느끼었다..

권율은 서울서 태어낳았다 .정확히 지금의
인왕산 밑에있는 행촌동이다 .아버지는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권철이었다 .

그는 벼슬은 하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 처사 생활로
일관했다 아버지 권철이 돌아 가신후로는 생각을 달리하여 나이 40 에 뒤늦게 과거에 급제 벼슬길에 올랐으나 신통치않다가 .전라도 광주 목사가
된다.

전쟁이 터지고 왜군은 파죽지세로 서울을 점령하고 지금의 평안북도 신의주 까지 치기위하여 평양 까지 점령한다 함경도 방면도
마찬가지.
선조 임금은 궂은비를 맞으며 북쪽으로 피난 하다가 의주에서 몸을 풀고 행재소라는 임시 거소를 만들고 남쪽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나 경상도와 경기도 전국의 장수들은 싸우다 죽거나 도망치기일수였다 .

다행히 전라감사 이광이 이끄는 연합군이 서울
수복을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용인 근방까지 왔으나 왜군들에게 전멸당하고 만다 .이때 권율군만이 살아 남아 후일을 기하기위하여 광주로 일시
후퇴한다

의주에 피난 가있던 조정에서는 전라감사 이광의 패망 소식을 듣고 실망을 느끼고있던차에 윤두수가 왕에 아뢰기를 광주 목사
권율이야 말로 훌륭한 장수라는 것을 설명하여 권율을 전라도 순찰사로 임명한다

권율은 조정이 원하고있는 서울 수복을 위하여 권율은
서울에 모여있는 왜군을 치기로 결심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