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8-2011 (토)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追憶)은 나의 운명(運命)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 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希望)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 님의 침묵(沈默) (한용운)
아무것도 모르고 가자는데로 따라만 가는데 다음엔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올라가서
만해 한용운 (滿海 韓龍雲)의 집, 심우장 (尋牛莊)이라는 곳으로 들어갔다.
현판을 오세창씨가 쓰셨다는데 글씨가 동글동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하고 너무 예쁘다.
통통하니 깜찍하게 예쁜 글씨는 아주 매력적으로 여자 글씨 같기도 하고, 보면 볼수록 내 마음을 사로 잡는다.
그 옛날에 글씨를 요렇게 예쁘게 쓰신 분이 바로 오숙정의 할아버님이라니...
내 노트를 저런 글씨로 가득 채우고 싶다.
독립운동 33인 중의 한분인것은 옛날에 알았지만 서예가 이신것은 조금 전에 간송 미술관에 가면서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 예쁜 글씨를 쓰시는 분인것은 이제 처음 알았다.
다른 서예 작품을 혹시 볼수있을까 해서 Internet 에서 오세창씨를 찾아 보았다.
Look what I found! 내 눈은 아직 꽤 쓸만하다.
"오세창의 아버지는 바로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1831∼1879)으로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의 제자였다.
집안이 대대로 역관이였는데 오경석은 중국을 드나들며 많은 그림과 글씨를 수집했다.
추사의 감식안 (鑑識眼)은 오세창을 통해 이어졌고
민족주의적 Collector 의 기질은 아버지에게서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
“근래 조선에는 전래의 진적 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여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 오세창씨 같은 고미술 애호가가 있음은 경하할 일이다. 씨는 10여년 이래로 고래의 유명한 서화가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음을 개탄하여 자력을 아끼지 않고 동구서매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1175점에 달하였네.
그중 11125점은 글씨요, 105점은 그림이다.” (1915년 1월 15일자 매일신보)
(셈이 맞지 않는다. 아마 총 1175점에서 1070점은 글씨, 105점은 그림일듯하다.)
"오세창은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잘 썼을뿐더러 전서와 예서를 혼합하여 독특한 서체로 작품을 만들었다.
자신의 가학(家學)으로 배운 서예를 바탕으로 전서와 예서를 혼합한 오세창의 서체를 흔히 위창체(葦滄體)라고 부른다."
"오세창은 전각(篆刻)을 수집, 정리했고. 스스로 전각을 깎는 데도 조예가 깊었다.
오세창은 특히 전서에 집착하여 서예와 전각(篆刻)의 작품으로 많이 남겼다.
한국의 전각사에서 오세창은 전통 전각을 이어 받아 현대 전각의 맥을 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현대에 와서 그에 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서예사에서 그의 위치를 새롭게 조명하여 정립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각을 배웠으나 본격적으로 전각을 시작한 것은 3.1 운동 이후에 잠시 일본에 머물었을 때였다.
오세창의 각풍(刻風)은 편도각에서 오는 예리함과 깔끔한 처리를*** 하는 것이라고 한다.
완벽하게 하려는 긴밀성과 방각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것도 하나의 특징으로 꼽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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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篆刻)이란

- 전각은 동양 특히 중국권 문화의 독특한 순수예술이다.
- 전각은 한자의 전서체(篆書體)를 새겨 조각하는 것, 즉 인장 (印章 )을 조각하는 것이다.
- 전서체를 쓰는 것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흐름이다.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 전서의 자형 (字形),획 등이 갖는 조형성이 돌이라는 작은 공간에서
- 가장 아름다운 효과를 주기 때문이다.
- 그러나 전각(篆刻)을 한다해서 반드시 전서체만을 써야 되는 것은 아니다.
- 다른 서체(書體)를 쓰기도 한다.
- 전각은 반드시 돌에만 새기는 것은 아니며 금, 은, 동, 옥, 상아, 나무, 대나무 뿌리 등도
- 재료로 사용한다.
- 전각은 서(書),화(畵) 등의 작품을 완성했을 때 찍는다. 대개 서화의 한 구석 공간에 한다.
- 거기엔 간단하게 작품을 완성한 시기와 서명을 하기도 하고, 상세하게는 시구(詩句),
- 그 작품을 만든 장소,
- 작품을 만든 이유 등을 써 넣기도 한다. 이렇게 쓴 후 전각한 인장을 찍는다.
- 이러한 과정을 '落成款識(낙성관지)' 또는 줄여서 '落款(낙관)한다'고 한다.
- 결국 낙관을 했다는 것은 작품을 완성했다는 의미가 된다.

한용운(韓龍雲,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호는 만해(滿海).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시인, 불교 승려, 작가이자 독립 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시인, 불교 승려, 작가이자 독립 운동가로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다.
원래 성북동은 성(城)밖 마을 북장골로서 송림이 우거진 한적한 동네였다.
이 터는 만해 선사를 따르던 안국동 선학원의 벽산 김적음 스님께서 자기 초당을 지으려고
북장골 송림중에 52평을 마련하여 두었다가
만해 선사의 만년을 위하여 내어드린 것이 발전하여 심우장을 짓게 되었다.
후학 동지들도 나중에 협찬을 하여 후일 52평의 땅도 더 보태게 되어 지금의 100여평의 땅에 심우장을 짓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청사를 마주보기 싫어 북향집이 되었다는 일화를 간직한 집이다.
"심우장(尋牛莊)" 이란 무상대도(無常大道)를 깨치기 위한 집이란 뜻이란다.
찾을 심(尋), 소 우(牛)를 쓰는 심우(尋牛)는 소를 사람의 마음에 비유하여 잃어버린 나를 찾자는,
즉 수행을 통해 자기 본성(本性)을 깨닫는다는 의미가 있다.
한용운 선생의 일생이 그러했던것 처럼 심우장은 "늘 공부하는 집, 즉 불성(佛性)을 찾기에 전념하는 곳"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일제시대에 조국의 강토가 짓밟히는 뼈 아픈 역사속에서도 민족 자존(民族 自存)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 심우장이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날의 심우장은 송림에 숨은 산방으로 매우 한적했다.
마당에는 나무를 심었고, 생활은 청빈했다.
마당에는 나무를 심었고, 생활은 청빈했다.
만해가 손수 심은 향나무 한그루가 만해의 기상을 닮아 늘 푸르게 오늘도 잘 자라고 있다.
심우장에서 만해는 유마경(維摩經) 원고를 번역하였고, 신문, 잡지 등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했다.
찾아오는 많은 방문객들에게 언제나 호의로 대했으며,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는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를 순환함이네.
"조금도 실망하지 말게. 우주 만유에는 무상의 법칙이 있네. 절대 진리를 순환함이네.
다만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일세.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사람의 본분을 잘 지키면 자연히 다른 세상이 올것일세."
자상하게 타이르시던 삶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 심우장이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行人)
당신은 행인 (行人)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이런 역사를 전혀 모르고 다녀왔으니 뜰의 향나무는 찾아볼 생각도 못했고 따라서 사진도 없다.
한 겨울에 저런 툇 마루를 젖은 걸레로 닦으려면 그대로 마루에 쩍쩍 얼어 붙던 일이 생각난다.
나는 지금도 노오란 장판 방이 따스하고 좋다.


끝으로 최순우 옛집에 갔다.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며, 미술사 학자인 혜곡 최순우 (兮谷 崔淳雨)(1916년 ~1984년)가
1976년부터 1984년까지 거처하였던 한옥이다.
한국미에 빼어난 안목을 가졌던 그가 이 집에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담아 넣으려 했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한국식 가옥에 우리 고유한 아름다움을 지켜보려했다.
한가지 눈에 뜨이는것은 비가 오면 진흙탕으로 변해버리는 마당에 온통 씨멘트를 바르는 대신
경복궁 처럼 얇고 넓적한 돌을 깔아 실용적인 아름다움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두문 즉시 심산 (杜門卽是深山)" 문을 닫으면 깊은 산속이라는 뜻. How true! And how nice!





한옥도 이렇게 잘 가꾸고 장독대 옆에 나무도, 화초도 몇 그루 있으면 무척 정취있고 아름답다는 것을 나는 잘 안다.
옛날에 26년간 살아 보면서 느꼈던 일이다.
이 사람의 집이 더 특별히 아름답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한옥이 자취를 감추어 가는 요즈음, 아마 일반에게 공개하는 Sample 로 뽑혔을꺼다.
집 건물 사진을 찍으려니 모르는 다른 손님들을 피하기 어려웠고 옆의 높은 벽돌집이 들어가서 흉했다.
다행스럽게도 위의 몇 안되는 사진들에서 충분히 한국 집의 아름다움을 본다.

하루, 그것도 겨우 반나절 동안에 간송 미술관, 이태준씨, 한용운씨, 최순우씨 집 등
네 군데나 되는 굵직한 문화 탐방을 날씨도 좋아 잘 끝냈다.
오늘이 토요일이니 문수회(文水會) 가 아니라 문토회(文土會)다.
점심을 먹으러 근처 음식점을 찾아갔다.
순옥이 아는 집인데 작은 골목에 지붕도 낮고 허름하게 보였다. 이북 사람이 하는 음식점이란다.
처음 보는 메밀로 만든 칼 국수와 만두 전골이 나오는데 특이하고 맛이 있다.
또 입이 아파 약 한알 먹고, 조심 조심 겨우 먹었다.
덕순이는 자기 직원 결혼식이 있다고 먼저 가고 순옥과 준영 셋이서
혜화동 로타리 근처의 Coffe Shop 에 들어갔다.
Coffee와 달디단 Chocolate cake을 하나 시켜 한입씩 떼어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
툭하면 다방에서 만나 신나게 떠들던 그 오래전 옛날 같았다.
달라진것이 있다면 주위에는 아주 젊은 아이들 뿐이고
cake 하나에 세 사람 folk 가 들락날락 하는것이 아뭏치도 않았다는 것이다.
_____ 끝 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