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11 (토)
아침엔 숲 사우나, 오후에는 소리내의 일정이다.
흐린 날씨, 오전의 산행은 한 세시간쯤 걸린단다.
가는 길이 좀 멀고 복잡하다고해서 정세네 집으로 가서 차편을 얻어 타고 갔다.
인근의 손근씨네서 준비했다는 커피와 릿츠 크랙커가 나와 있고 사람들도 벌써 많이 와 있었다.
오늘 비가 오면 어쩌나 걱정해서 손근씨네 집이 가깝다니 그리로 가면 되겠다고 내가 놀렸다.
손근씨는 그래도 되고 또 옆에 노인정도 있으니까 문제없다고.
노인정은 싫고 손근씨네 집에 가야한다고 자꾸 우겼는데 다행히 비는 안 온다.
청계산 끝자락이라는데 고요한 산속의 숲길이 공기 좋고.
해도 나지 않아 춥지도 덥지도 않으니 걸어 올라가는 길이 아주 쾌적하다.
"숲 사우나"라니까 자꾸 목욕탕의 싸우나가 연상되는데 이 숲속은 공기까지 좋으니 一石二鳥.
신상만씨 앞에서 천천히 걸으며 계속 죠크한다.
"저 아래 언덕길로 떼굴떼굴 굴러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의사님이 물으니 혹 무슨 큰 다른 뜻이 있나 조심스러워 대답이 빨리 안 나오자
"죽습니다, 네." ㅎㅎㅎ.
조성철씨, 큰 이순자가 자기가 나오기도 전부터 산에 다녔단다.
"아하~ 산신령님 나타나기도 전부터 다녔네요." 내 대답.
산신령이 아니라 "조 신령님"이 나타나기도 전부터 다녔다고 정정한다.
여기저기 참호를 파 놓은것이 옥에 티.
경관을 해치는것은 물론 잊고있던 차거운 현실을 깨닫게 한다.
조금 힘이 들기 시작해서 권금자의 지팽이까지 빌렸다.
뒤쳐지지 않으려고 또 열심히 따라갔다.
언젠가 유정세가 길을 잃어 "유정세 Boulevard" 로
명명되었다는 갈림길을 지나고, 잠간 쉬는 곳도 지나 드디어 산 꼭대기에 닿았다.
우리 13회의 유명짜한 찍사들
벤취에 앉아 정규현씨의 키타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했다.
"오솔길" 잔잔한 노래가 잘 만들어 졌는데 정용우씨가
나중에 지어서 넣었다는 3절, 눈온 풍경 노래가 너무 멋있다.
눈 구경 못하는 곳에서 수십년 살아온 나는 그저 눈 (Snow)이라면 홀딱 빠져버린다.
오솔길
우리는 걸었지 숲속의 오솔길 향긋한 흙냄새와
갈잎의 노래소리 이름모를 산새들이 화답하며
노래하고 손을 잡고서 걷는 오솔길
영원한 사랑의 길 마주 보는 잔잔한 미소
우리는 걸었지 맑은 시냇물따라 갈잎하나 떨어져
물위에 맴도네 거울같은 맑은물에 고기들이
뛰어 놀고 손을 잡고서 걷는 오솔길
영원한 사랑의 길 속삭여 들리는 그대의 목소리
남학생들은 아직도 노래가 참 듣기 좋다.
지금 보면 학교때 남학생들의 음악 성적이 우리 여학생들보다 훨씬 좋았을꺼라 생각한다.
남도여행 할때 뒷자리에서 들리는 송아지 노래가 꼭 삼십대 쯤의 청년들의 목소리 같았다.
남자들은 늙어보이고 싶지않다면 열심히 노래를 부를일이다.
산 아래서 만난 Baby Lilac
노래도 후다닥 몇개 하는둥 마는둥 하더니 산을 또 허겁지겁 내려와 "소머리 국밥집"으로 간다.
이 메뉴가 또 걱정스러운데 놀랍게도 먼저 나온 매운 갈비찜 위에 큼직하게 썰어 넣은 하얀 가래떡들 !!!
너무 반갑다.
정말로 이게 웬떡이냐? 떡볶이 狂이 횡재했다.
I can have that with no problem.
예상대로 소머리 국밥은 뽀얀 국물에 훅 끼치는 냄새가 역했다.
소고기 국이 몸에 좋다는 광고가 벽에 붙어있지만 그건 옛날 이야기다. 요즘은 이런것을 될수록 피하려고 한다.
떡볶이가 내 점심이 되었는데 양념이 워낙 맛있어서 훌륭했다.
다만 갈비때문에 느끼하니까 그집 깍뚜기를 내가 거의 다 비웠다.
옛날에 보면 우리 아버지랑 남자 형제들은 떡을 덜 좋아했다.
같이 앉은 이태길씨가 국밥을 한그릇 들기에 떡은 안 좋아하는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였다.
혼자서 떡을 거의 다 집어 먹은것이 너무 미안해서 떡 좀 빨리 더 가져오라고 수선을 떨었다.
점심을 끝내고 나오니 부슬부슬 비가 온다.
우리 행사를 시작한후 처음 오는 비다. 그래도 산행을 다 마친후에 오니 무척 다행이였다.
앉을 자리도 없고, 곧 소리내로 가느라 손근씨랑 거기 모인 숲사우나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특히 수술하고 처음 나왔다는 송경희씨도, 이정우씨 부부랑,
또 이제껏 이야기도 잘 안해보아서 서먹한 동창들이 많이 있었는데 ....
소리내 모임은 최근에 새로 장만했다는, 쓸때마다 한사람 앞에 3000원씩 내야한다는 동창회관에서 있었다.
방도, 책상도, 의자도 말쑥하게 새것으로 깨끗했다.
정광자, 전원자, 김인자등, Wine, orange, cracker 같은 snack 도 준비해 왔다.
언제나 처럼 윤상열 교수의 Teaching은 아마츄어도 금방 푸로 처럼 달라질 정도로 능숙했다.
"아~ 아~ 아~ 아~ 아 ~ 아~ 아~ "
아침에 숲사우나에서 생략했던 발성 연습을 이제야 하고, 노래 가사로, 또 humming 으로 연습을 했다.
오년만에 다시 온 나는 목 말랐던 사람처럼 열심히 듣고, 행여 잊을까 노트하고.
Elvis의 "Love me tender" 같은 노래까지도 윤교수와 하면 그저 불러 볼만할 정도로 쉬워진다.
나는 노래를 아주 좋아하는데 그냥 웬만큼이라도 부르지 못하는것이 탈이다.
좋건 나쁘건간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사실은 십년도 더 전에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윤교수는 그냥 쉬운
동요 같은것부터 자꾸 불러보는 습관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나의 생활은 아무 노래나 불러 보는것 하고는 거리가 멀다.
지금은 대부분의 미국 사람들처럼 춤은 출망정 노래는 어색하다는 그런식이다.
남편도 고등학교때는 노래자랑에 나가서 "꿈속의 고향"으로 일등도 했다는데 하도 안하니까 지금은 나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거기가 시골이니까 그렇지 서울이였다면 어림도 없었을꺼라고 진담반 농담반 꼬집어 주었던 내가 벌을 받는것 같다.
노래 몇곡을 뽑아 노란 겉장을 씌어 책으로 만들어 선물로 준것을 다 같이 불러 보기 시작했다.
"청라 언덕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
청라 언덕이 무슨 뜻이지? 푸른 언덕?
갑자기 것 잡을수 없이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뒤엣 사람들이 눈치챌까봐 닦지도 못하니 눈물, 콧물 다 섞어 내려 억망이 되었다.
옛날에는 그 뜻도 모르면서 아무 생각없이 마구 불러보던 노래 가사가 오늘은 왜 이렇게 탁 걸려버렸는지 모르겠다.
곧 하나 하나 일어나서 자기 소개를 하라고 해서 어떻게 일어서긴 했으나 말을 할수가 없었다.
할수없이 윤교수가 대신 내 이야기를 했고 내가 시작하니까 뒤에 앉은 몇몇 친구들도 같이 울었단다.
우는 것도 젊은 여자가 해야 예쁘지, 다 늙은 여자가 우는것은 추하다.
결코 눈물은 보이지 않으려고 온갖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지나간 5년이라는 긴세월은 생각지 않고, 못한다는 말도 믿지않고
"어여쁜 장미"를 또 쏠로를 해보라고 윤교수는 강권했다.
다시 또 분위기 생각해서 억지로 시작은 했으나 억망으로 끝을 냈다.
목소리는 그야말로 칠순 노파처럼 쉬어버린데다 울기까지 했으니...
그런 사람보고 자꾸 노래 해보라고 고집하는 윤교수가 틀렸다. 오늘 나는 여러가지로 망신이다.
그런데 지금도 못내 유감스러운 것은 지난 45주년에도 이번 50주년에도 윤교수가 우리 뻐쓰를 탔는데 노래 한번 못해보고 끝난것이다.
먼길 가며 노래도 배우고 연습 할수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놓쳐버렸다.
나는 서울 친구들의 이런 노래 연습, 미술, 오페라 교양 강좌, 사진전 등의 취미생활이 무척 부럽다.
서로 합심하여 적어도 앞으로 10년간은 이 소리내 모임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저녁은 또 다섯번째로 걱정스럽던 한방 삼계탕이였다.
한 다섯살이나 되었을까? 아주 어렸을때 언니와 사촌 언니와 아범이 닭 잡는것을
쫒아다니며 쭈그리고 앉아서 보았다. 조금전까지 살아서 막 걸어 다니던 닭이 죽어서 털이 다 빠지고
뱃속을 가르니 해처럼 빨간 알이 나왔다.
조금 있더니 큰 엄마가 닭을 잘게 썰어 볶아서 들고 나왔다.
우리들에게 몇 점씩 나누어 주는데 나는 기겁을 하고 도망 갔다.
그때부터 수십년 동안 나는 닭을 먹지 못했다.
그런데 미국에 처음 왔을때 한국 사람 어느 집에 초대되어 가니 음식이라고는 튀긴 닭과 쌜러드 뿐이였다.
저녁때라 배는 고프고, 별 볼일 없는 나같은 유학생까지 초대해준것이 너무 고마워서 먹는 척이라도 해야했다.
조심스레 한입 먹어보니 Not Bad. 잘 먹고 나서 닭고기 먹었다고 뼈를 싸서 서울로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다음부터 닭이나 칠면조도 먹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국물보다는 마르게 요리한것이 더 낫다.
그래서 명동의 칼국수도 닭 국물이라고 하면 조금 주저한다.
미국에도 chicken rice soup, chicken noodle soup이 있으나
나는 cellery, okra, tomato 등 들어간 chicken gumbo soup을 좋아한다. 야채들이 닭 냄새를 좀 없애고 특이한 맛을 내기 때문이다.
삼계탕이라고 나온것은 검은 뚝배기에 아주 작은, 어른 주먹만한 닭 한마리를
껍질채 넣은 밤 반쪽, 찹쌀 죽, 인삼 쪼각도 들었나? 커다란 대추와 함께 끓인것이였다.
조금 떠 먹어보니 닭 냄새도 안 나고 그냥 괜찮다.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전혀 역하지 않고 김치와 같이 나오니 먹을만 했다.
일본 관광객들에게 왜 인기인지 이해할것 같다.
금방 따끈한 파전을 두어 쪼각 먹고 났음에도 불구하고 국물까지 한 그릇을 거의 다 비웠다.
닭 한마리를 먹었으니 올 여름 몸보신을 한셈이다.
지명이 차를 타고 몇몇 친구들이 같이 집에 오는데 어디 내려줄까 묻는다.
"반포 7호선 지하철역" 싸인이 나오는데 어디서 이름을 들어 본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잘못 내렸다가는 어두운 길 거리에서 집도 못찾고 혼자 헤메겠다.
무조건 고속 터미날 앞에 내려주라.
거기서 사평역 가는 차를 타면 찾아갈수 있다.
바로 그때 지명이 소리쳤다. " 자이 (Xi Apt) 아파트다."
과연 자이 아파트가 바로 큰길 건너 왼쪽에 있었다.
아파트를 바로 앞에 두고 저기 터미날까지 한참 갔다가 다시
지하철 타고 돌아 올뻔했다. ㅎㅎㅎ
숲속의 젖은 나무들
집에 와서 찾아보니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쓴다.
담쟁이 넝쿨이 덮여 있는 언덕 이란 뜻이란다
언덕은 모르겠으나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있던 사대부고, 빨간 벽돌 건물이 생각난다.
지금 보면 담을 기어 올라간다고 이름을 "담쟁이" 라고 지은 우리말이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