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2011 (수)
오늘은 2박 3일로 남도 여행을 가는 날, 출발시간인 아침 8시가 다 되어 현대 백화점 앞 압구정역에 닿았다.
병한이 자기 차로 우리 간식들을 싣고 왔는데 늦어져서 또 거의 맨꽁찌다.
정세네 집에 묵던 미국 사람들 몇명이 나보다 늦었을뿐 다들 벌써 뻐쓰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3호차에는 굵직한 사람들, 최덕순 부회장, 이원호 총무님,
조지명, 염준영 같은 역대 부회장님들... 그리고 나. ㅎㅎ
나는 서경자와 같이 앉았고 건너편엔 유화자, 또 그 옆에는 조지명, 그 앞줄에 준영이가 이희자와 앉았다.
덕순씨는 한참 앞쪽에 임경자와 앉았고,
맨 앞줄에는 전수신씨와 그 부인이 그 뒤엔 박초미와 이경희가 앉았다.
목소리가 멋있게 낮은 베이스, 이 원호씨가 팀장으로 주의 사항도 전하고, entertain 도 한다.
아침 식사로 전수신씨 부부가 마련했다는 찰떡이 나왔다.
물도 마시고 떡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오렌지도 먹고.
오랫만에 만난 수다도 잔뜩 떨면서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가 점심때쯤 나주에 닿았다.
첫번째 난관인 나주 곰탕집, "하얀집" 에 들어갔다.
나는 냄새나는 뿌연 고기국인줄 알고 혼자 속으로 걱정을 했다.
곰탕이라는 말만 들어도 몇십리 도망가는 사람이라 다들 맛있다고 먹는데 혼자 초치고 있을것이 걱정이였다.
그런데 막상 이 곰탕을 대하고 보니 맑은 고깃국이 담백한 맛이다.
옆에 있는 김치, 깍뚜기와 함께 먹어보니 맛이 있다.
이런 고깃국은 몇 십년만에 처음이다.
삼십여년전 Michigan 에서 큰 아이를 가지고 입덧을 할때였다.
옆에서 나의 붕~ 들떠버린 비위를 음식으로 도와주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딱히 무엇을 먹어야 이 비위가 좀 진정될지 몰라 쩔쩔맸다.
그런데 동네 어느 부인이 지나가는 말끝에
"어제밤 우린 갈비탕을 끓여 먹었는데..." 하는것이였다.
옳커니! 바로 그거다. 내가 그렇게 찾던것이 갈비탕이였구나.
얼른 무우도 숭덩숭덩 썰어넣고 갈비탕을 잘 끓여서 먹었다.
그러나 갈비탕도 그때뿐,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늘 생각나던것은 약간 매운 파란 고추 (long hot pepper) 볶음이였다.
밤늦게 일을 끝내고 오는 찻속에서 부터 고추 볶음 향기가 나는것 같았다.
집에 오자마자 얼른 고추를 볶아서 물에 말은 밥과 한술 떴다.
왝왝 토하지는 않았으나 은근히 속이 느글거리는 증세가 임신 내내 계속되어 나를 괴롭혔다.
결혼 초에는 나도 이렇게 고깃국을 가끔 끓였는데
남편이 속 끌끌하다고 싫어해서 또 red meat 좋지도 않다니까 몇십년을 딱 끊어 버렸다.
그런데 나이들자 식성이 변하는지 남편은 요즈음 이런 갈비탕, 곰탕, 설렁탕 ...
탕이라면 홀딱 반하는 사람으로 변해서 지금은 식당에 가면 언제나 이런 탕 종류만 주문한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하다는 나주의 곰탕을 혼자 먹자니 집에 있는 남편이 마음에 걸린다.
점심을 든든하게 잘 먹고, 붐비는 식당을 나와보니 바로 코앞에 옛날 관아였다는 망화루 (望華樓), 유적이 있다.
그뒤에도 몇개 옛날 건물들이 보이는데 하도 가까이 있으니 세월을 거슬러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는듯 이상스런 느낌이다.
마냥 쳐다보며 상념에 잠겨 있는데 후식으로 참외가 나온다는 소식.
그러나 마땅히 씻을 곳이 없다고 참외 상자는 다시 뻐쓰 짐칸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곧 떠났다.
점심은 잘 먹었겠다, 노곤한데 그냥 짝끼리 수다만 떨고 가자니 좀 지루했다.
준영이 나서서 들어본 가락으로 변형 "송아지" 노래를 공부시킨다.
송아지, 소 자손, 소 자식, 소 새끼... 핑계낌에 욕을 막해본다.
그래도 심심하자 간식은 언제 주느냐고 마침내 입을 열었다.
순진한 덕순씨 대답하기를 금방 밥 잔뜩 먹고 왔는데 무슨 간식이냐?
준영이, 밥 먹는 배 따로, 과자 먹는 배 따로, 과일 먹는배 따로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느냐?
그냥 있는 간식 다 봉지에 담아서 나누어주면 각자 알아서 먹을것이고 집행부 신세도 덜 고달플 꺼다.
노래도 않고, 주전부리도 않고 먼길 가자니 입이 궁금해서 그런다. 이런 입씨름이라도 해야지. ㅎㅎㅎ
등쌀에 과자가 배달 되었다.
조그만 과자 세개가 한 pack에 담은것을 하나씩 나누어 준다.
준영이 "우리 여행은 사흘간이니 하루 한개씩 먹으라는 말이네."
옆에서 한술 더 거들어서 한개를 세 조각 내어 매일 아침, 점심, 저녁때 한 조각씩 먹도록 하랜다.
마침내 어느 휴계소에서 참외를 씻어 한개씩 나누어 받았다.
조금 큰 사과만한데 껍질채 먹을수있는 신종 참외란다.
거의 오후 4시가 가까운 시각, 이 참외는 지금 먹고 요깡을
또 하나씩 줄터이니 5시에 먹고... 지시가 나왔다. ㅎㅎㅎ
"팀장님, 그럼 이건 언제 먹나요?"
그때부터 우리 3호차에는 간식 먹는 시간이 지정되었고 모두들 이 지령을 엄수하느라 계속 질문이 쏟아지고, 깔깔대고.
그런데 지명이 갑자기 큰 소리로 말했다.
"내짝 유화자는 아까부터 주는것은 다 먹고 있다.
이런 사람이 있으니까 집행부에서 모든 간식을 한번에 나누어 주지 못하는거다." ㅎㅎㅎ
나도 옆에서 유화자가 줄창 먹고 있는것을 눈치는 챘다.
살도 찌지 않은 사람이 복스럽게 잘 먹고 있어 나와 의기상통하는 귀여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다음에 식당에 들어갈때는 얘 옆에 앉아 실컷 먹어야겠다.
1. 김영랑 생가에 도착했다.
언젠가 웹싸이트에서 본대로 수수한 시골 초가집이다.
뒤에는 대나무 숲, 그앞에 커다란 동백나무들.
마치 소꼽 장난 하듯 자연스럽고, 소박하게 아름다운 우리네 옛날집이다.
옆에 난간 마루있는 별채도 있어 운치있고, 시를 쓰기에 딱 맞는 아담한 집이다.
마당에 모란꽃은 졌으나 잎새는 무성하고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돌 詩碑가 있다.
문화 유적으로 남기면서 마당 구석구석에 시비를 세웠는데 서정적인 시들. 그 인품을 알수있다.
Simple and peaceful life.
이런 집에서 세상 근심 모르고 평화롭게 살았다면 저절로 그런 시가 나올법하다.
하지만 일제 치하의 격동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그런 시를 쓸수있었을까?
Internet을 찾아 보면서 의문이 좀 풀렸다.
"金永郞(1903-1950)의 본명은 金允植으로 1903년 전라남도 강진에서 출생했다.
강진 보통 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휘문 의숙을 다녔다.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도 거사를 계획하다가 들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휘문 의숙을 중퇴한 김영랑은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부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다시 학업을 중단하고 강진의 자택으로 돌아오게 된다.
강진에서 무료한 생활을 하고 있던 영랑에게 송정리의 벗 박용철이 찾아와 시 전문지를 같이 내자고 제안했다.
박용철은 오랜 숙의 끝에 사재를 털어 [시문학] 창간호를 1930년에 발간하게 된다.
1930년은 김영랑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그 해 3월에 간행된 [시문학] 창간호에 13편의 시를 한꺼번에 발표하며 시단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나온 [시문학] 2호에 9편의 시를 발표했다.
말하자면 그는 20편이 넘는 작품을 1930년 두달 동안에 한꺼번에 발표한것이다.
김영랑의 시는 당시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에 쓰여진 경향시는 주로 생경한 사상성과
경직된 목적 의식을 담고있어서 당시의 시단은 서정시의 진수를 보여 주는 김영랑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암울한 현실속에서 일체의 사회성을 배제하고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려 섬세한 시적 표현을 시도한 그의 시는
Wordsworth 나 Shelley 같은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사려된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 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2. 강진 청자 박물관
Ohio 에서 대학 다닐때 한국 사람들이 선택 과목으로 "요강 만들기" course를
택했다고 까불던 생각이 난다.
나는 옛날 식으로 이상하게 치장 잔뜩한 고려 청자에는 별 관심없다.
차라리 이조때의 simple design 이 더 좋다.
단순 소박하고 너무 치장않은 청자를 찾는데 그 배경의 그림들이 눈에 뜨인다.
마음에 드는것을 골라 사진을 찍고 있으니 신상만씨, 옆에 와서 말한다.
내가 항상 예쁜것만 찾아 사진 찍는다고. Nothing wrong with that, but how did he know? ㅎㅎ
오늘도 엄청 비싸다는 청자에는 별 관심없고 그뒤의 박만영(?)의 예쁜 그림에 눈이 간다.
옛날식 소반에 차린 수수한 모양의 청자 그릇들, 뒤의 묵화와 어울려서 더욱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3, 다산 초당
나무 등치가 쭉쭉 높이 뻗은 두충나무 숲을 지나 다산 초당으로 간다.
저녁 햇살에 비치는 숲이 멋있다.
언젠가 두충차라고 해서 둥글레처럼 맛있는 차인줄 알고 하나 샀었다.
뜻밖에도 맛이 비릿하고, 영 고약해서 그대로 다 버렸다.
두충나무라고 내가 아는것은 그게 전부다.
마침 같이 걷던 해설사가 듣고 웃는다.
날은 저물어 가는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숲속이라 더 어둡고
돌로 쌓은 계단 길은 험해서 죽을둥 살둥 걸어 올라갔다.
이런 산길만 보면 행여 쳐질까, 돌계단에 걸려 넘어질까, 초긴장하게 된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길을 늘 오르고 내렸는지?
이 산 이름이 茶山인데 정약용이 이 작은 집을 짓고 다산 초당이라 이름 지었단다.
여기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實學을 集成했다는 것이다.
현판 하나 사진 찍고, 해설사 이야기는 너무 기초지식이 없으니 들어도 그때뿐, 남는것이 없다.
거기서 찻물 한잔 마셔보는것도 모르고 내려오는것이 또 걱정이라 허둥지둥 부지런히 내려와버렸다.
집에 가서 찾아 보아야지 하며 그때 그때 증명사진 한장씩만 찍어 둔다.
다산 유물 전시관에 들어가 오직 한가지 아는것, "목민심서" 사진만 하나 찍었다.
하도 볼것이 많아 무얼 먼저 했는지 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리는 때문이다.
실학자 답게 그 옛날에 안경을 쓰신 다산님
이제껏 말로만 들어보던 목민심서
부자가 된후의 흥부네 밥상처럼 반찬이 잔뜩 올라있는 해남의 맛집이라는 "천일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숯불 불고기와 떡갈비가 나오는 한정식이라는데 우리 외국 사람들은 이 "떡갈비"라는 단어에 익숙치 않다.
갈비에 떡이 같이 나오는줄 알았더니 햄버거처럼 갈비살을 뜯어 모아 불고기 양념해서 반대기 지어 구운것이다.
그런데 비싼 고기를 내놓느라 그런지 몰라도 전라도 음식치곤 다른 반찬들이 너무 볼품없다.
꼽재기, 꼽재기, 가짓수만 많고... 내게는 낮의 곰탕이 훨씬 낫다.
해남 땅끝 마을의 콘도에 들었다.
노을채, 사랑채, 또 하나가 더 있던것 같은데.. 바깥채인가?
홀에 모여 간단하게 50주년 파티를 했다.
노래 잘하는 사람들은 앞에 나와 십팔번 노래도 하고, 카나다 사람들은 춤도 추고, 맥주도 마시고...
내가 슬쩍 사회자, 지명에게 特請을 넣어 정 장노님의 "영영" 도 오랫만에 다시 들어보았다.
겨우 두어 시간이나 놀았나? 그냥 듣고 보는것만도 한참 재미있는데 벌써 시간이 다되어 끝이 났다.
뜻밖에 맹월씨와 방짝을 하게되어 노을채로 갔다.
침대 두개가 있는 넓직하고 깨끗하고, 멋있는 방에 들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방안이 한증막처럼 더워 정신이 없다.
더운것 또 못 참는 나는 얼른 Front 에 전화하고 Heater 다 꺼달라고 했다.
새벽녘엔 써늘할꺼란다. 바닷가이니 그럴법도 하지만 지금 같아서는 어림도 없다.
괜찮으니 다 끄라고 해놓고 창문을 아예 열어 놓았다.
맹월씨는 지금 자정이 가까운데 새벽 4시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간다고.
얼른 샤워하고 이 닦더니 치약 튜브도 열어 놓은채 곧 바로 침대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어린 아이처럼 옆으로 누어 "코" 하고 잠을 청하는 포즈인데 그런다고 잠이 오나?
서울 사람들 행동이 무지 빠른데 특히 이애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어떻게 이야기 한번 해볼 틈이 없다.
나는 그때부터 샤워, 양치, 거의 한시간 걸려 다 끝내고 나니 와야할 잠은 간데없고 말똥말똥...
밤을 꼬박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