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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에는 성종의 총애를 받는 후궁 들이 한 두명이 아니었는데 12 명의 부인 사이에 12 명의 자녀를 두었다 .공혜 왕후가 자식도 없이 17 세 나이에 죽자 판봉 상서사 윤기견의 딸 윤씨가 후궁으로 있다가 공혜 왕후가 죽자 두번째 부인으로 왕비가 정식으로 된다 .
세째 부인은 우의정 윤호의 딸로서 후궁으로 들어와 숙의로 있었는데 1남1녀 .그외에 넷째 부인으로 명빈 김씨가 1남,귀인 정씨가 2 남1 녀, 귀인 권씨가 1 남,귀인 엄씨가 1 녀,숙의 하씨가 1 남,숙의 홍씨가 7 남3 녀,숙의 김씨가 3 녀,숙용 tl심씨가 2 남2 녀,숙용 권씨가 1 녀를 낳은 것이다
성종은 이렇듯 정치는 별탈 없이 해 왔지만 밤이면 많은 여자들과의 정사를 일삼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너무 지나치는것은 미치지 못 함과 같다는 말이니 지나치거나 모자른 것은 둘다 좋지 않다는 얘기다.이말은 성종을 두고 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확실히 성종은 여자들과 접촉이 너무 지나치었다 .아무리 임금이란 자리가 절대 권력자이고 당시의 여인들은 남자들의 일방적인 순종을 강요 받는 시절이었다 했었어도 궁중의 12 명의 여자들도 역시 인간임에는 틀림 없었다
여자들은 절대 권력자인 성종에게 가진 교태를 다 부리며 사랑을 독차지하려 했다 .자연히 여인들간의 질투의 싹이 돋기 시작했다.
후궁들은 왕비 윤씨에 아랑곳 하지 않고 제 각각 왕에게 애교를 떨고 있었다 .후궁들이 속속 자식들을 낳자 그녀들도 처음과 달리 그리 호락 호락한 여자들로 남아 있지 않았다 .
왕비는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는 질투의 마음을 억제 할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히 왕비는 사랑을 다른 후궁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지 않을수 없었다.
왕비는 날이 갈수록 왕이 후궁들 방만 드나드는데 대한 슬픔이 스며 들기시작했다.반면 후궁들은 왕비의 체면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왕의 환심 사기에만 급급하였다
성종은 여인들을 편력하며 왕비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
이 여인들은 오히려 시 어머니인 인수 대비에게 아양을 떨며 왕비를 왕따 시키게 까지 이르렀다
왕비는 가슴이 부글 부글 끌어 올랐다
(모든것이 상감 때문이야)
임금이 오래간만에 왕비 방에 드는날이왔다
왕이 어의를 벗고 눕자 왕비도 옷을 벗고 이불로 파고 들었다
"마마 ,어찌 이렇게 뜸 하십니까? 오늘은 마마께 꼭 들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따라 왕은 왕비가 심각한 말투로 말하자 자격 지심으로 조금 미안감도 들었다
"말하시오"
왕비는 전과 달리 당돌하게 왕에게 말을 하였다
"마마. 왕비인 제가 마마를 후궁들에게 빼앗기고 허울 좋은 이름만의 왕비로 만 있으라는 말씀이옵니까?"
이 말에 왕은 정신이 번쩍들었다 .지금 까지 왕비가 그런 말을 한 일이 없이 오로지 순종만하는 정숙한 왕비로 보아 왔는데 이렇게 나올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음 , 이여자가 이제는 왕비로서 체통도 잊고 투기를 하고 있구나 )
유학공부를 누구 보다도 많이 공부한 성종은 금방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투거(妬去)를 연상하였다 .투거란 다시 말해 남편이 첩 얻는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며 공연히 남편하는 일에 강짜를 부리는 여자는 돌려보내도 좋다는 유교 윤리관이다 .
(아니야, 왕비가 오늘 괜히 그러겠지)
왕은 그렇게 하룻밤을 왕비의 마음을 달래는 뜻에서 다른 후궁들과는 달리 정을 쏟아 주었다 .
이런일이 있는후에도 왕비의 궁중생활은 나아진게 없었다 .후궁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왕비가 있는 강녕전을 염탐하며 무슨 트집감이라도 있으면 시어니인 인수대비에게 꼬아 받쳤다 .
성종은 여러 여자들을 거늘였지만 아들에 대한 관심은 대단 했다 .아아들을 동궁이라고 불렀는데 형조 판서인 강희맹의 집에 관례에 의히여 맡기었다. 지체 있는 집안에서 경험을 얻게 하기 위함 이었다.
강희맹은 글솜씨가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 안씨는 정숙한 아내로서 부덕을 가진 훌륭한 여자였다.아들 조차 형조판서 집안에 보내놓고 윤비는 무슨 재미로 사는지 통 알수가 없었다
성종 13년 째 되는 해이었다 .강희맹의 집에 맡겨저 있던 동궁 융은 어머니가 폐위 되었는지도 모르고 궁중으로 데려왔다 .
왕비가 무슨 사유로 폐비가 되었는지 어머니와 만나게 해주지않으니 알턱이없었다.
한편 궁중에서는 폐비 융씨의 행적을 감시 하라는 시 어머니 인수대비의 지시에 의해 내시가 윤비의 주위를 염탐해 보고 하였다.
인수대비는 임금이 문안차 들리면 폐비의 사정을 누구 보다도 잘 알면서도 시침이를 떼고윤비를 내려 깎았다.
" 알아 보니 폐비가 아직도 반성 못하고 있지요"
임금은 윤비에게 오래간 만에 같이 잠자리에 들려고 가던날 일을 다시 떠올랐다 .이상한것이 왕비 방에 있어 무어냐고 물었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왕비의 제지를 무릅 쓰고 열어 보니 비상 이라는 독약 이었다 .왕은 그때서야 여러 후궁들을 죽이려는 음모라고 생각하고 그녀를 미워하던 인수대비의 부축임에 겻들여 결국 폐위라는 엄청난 결정을 내린것었다
그만큼 성종은 밤마다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여인들을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윤비와 후궁 문제로 잠자리에서 얘기하다 어쩌다 실수로 임금의 얼굴에 상처 난것을 가지고 윤비가 임금의 얼굴까지 할퀴었다고 몰아 부치어 왕비를 꼼짝 못하게 폐위 까지 몰아 붙이게 하였다
후궁들은 왕에게 더 아양을 떨었다 .특히 유난히 정귀인이 왕에게 갖은 아양을 떨었다
"전하 , 아직도 폐비가 정신을 못차린다 하옵는데요...."
"어떻게 하고 있다던고..."
"전하를 원망하고 있다합니다"
"자기가 잘못 한것은 생각 못하고 나를 원망해?"
"저이들이 한버트면 모두 몰살당할뻔 했습니다"
"하긴 그때 내가 비상을 발견 못했더라면 큰일을 저지를뻔 했지...그런데 그비상 독약이 어디서 났는고?"
"궁중에 폐비에게 자주 접촉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친정 어머니인 부대 부인인 신씨 밖에요 .신씨를 폐비가 있는 자수정에도 출입 못하게 하옵소서"
"흠. 그렇게 해야지"
임금은 자의반 타의반 윤비를 폐위 시키기는 했어도 미련은 버리지못하였다.
"뉘우치고 근신 하면 다시 불러 들일까 했거늘 원망 까지 한다고?"
임금은 인수대비와 후궁들에 매수된 내시들이 보고가 심상치 않게 계속 보고가 들어 오자 그말을 믿게 되었다 .성종의 마음을 돌려 놓은 인수대비와 후궁들은 때를 놓질세라 임금을 들볶았다.
임금은 마침내 결심을 내렸다..
"폐비 에게 사약을 내리도록하라"
친정에 나가있던 윤비에게 어명이 떨어지었다 .
친정 어머니 신씨의 통곡 아래 폐비 윤씨는 오른손에 찢은 옷을 입에 대고 약 사발을 받아 들고 마셨다.
폐비 윤씨의 입에서는 금새 붉은 피가 흘러 나와 가지고 있던 옷조각에 물 들었다.입에서는 계속 피가 쏟아저 나왔다.윤씨는 옷 조각에 묻은피를 바라 보며 옷조각을 어머니 신씨에게 주었다
"어머니 이옷 조각을 동궁에게 ...."
이 말을 마지막으로 윤비는 이세상을 하직했다 이 피묻은 옷조각이 뒷날 조선 왕조 역사상 큰 사건이의 씨앗이 될줄은 아무도 몰랐다 .
그 피묻은 옷은 윤비의 어머니 신씨가 한을맺고 옷장속 깊이 감추어었다.폐비윤씨에 대한 말은 그후 아무도 거론 못하게 하도록 성종은 엄명을 내렸고 언제 그런일이있었느냐는듯이 궁궐은 조용하기만 하였다
성종은 1494년 임금이된지 26년만에 38세 나이로 서거한다 .
사약을 마시고 죽은 폐비윤씨의 아들 세자 융이 조선의 10대 임금으로 오르니 그가 연산군이다 .역사는 연산군이라고 부르며 그를 조(祖)나 종(宗)을 붙여 부르지는 않고 있으나 엄연히 취임당시에는 임금이 었다.
조(祖)와(宗)은 삼국시대에서 부터라고는 하나 실제 붙이기시작한것은 고려시대 왕건이 태조라는 말을 사용하고 나서 부터이다 .조선시대는 연산군과 광해군을 빼고는 모두 붙었다.
연산군과 광해군 얘기는 다음부터 기술하겠지만 반정으로 인하여 왕의 자리를 내 놓았기때문에 "군"자를 떼지 못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왕자격이 못된다고 하는뜻일것이다
그런데 실제는 왕이 아니었었는데 조(祖)나 종(宗)을 붙인사람이 있으니 성종의 생부인 덕종, 인조의 생부인 원종, 정조의 양부 진종, 정조의 아버지 장조, 헌종의 생부 익종, 등은 생전에 왕이 아니었었는데도도 조(祖)와 종(宗)을 써주었다.
말하자면 생전에는 왕의 자리를 누리지못하다가 아들 잘 둔 덕분에 왕 대우를 받아본 셈이었다 .
조(祖)가 높으냐 (宗)이 높으냐는 의미가 없다.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붙였기때문이었다.연산군도 반정으로 살아생전에 쫓겨 나게 되므로 "군(君)"자를 떼지 못하는 신세가 되지못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인 지금에야 누구나 대통령을 할수 있지만 왕조사회에서는 아무나 왕이 될수가 없다.
왕이라면 감히입에 담을수 없는 사회였는데도 조(祖) 나 종(宗)자 하나 붙이지못하고 왕을 한 사람이있다는것은 성종의 아들 융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런 대접을 못받고 있는것일까?
그러면 연산군 얘기좀 시작하자 (33)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