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s_00008.jpg
정희 왕후는 본명은 윤번이다.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폐하게 만들고 많은 신하를 죽이게 한것은 세조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지만 권력에 대한 야심을 가진 세조의 부인 정희 왕후 가 뒤에서 적극적으로 부축인데도 영향이 컸다
윤비는 세조가 죽자 대비가 되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자 때 맞추어 차남 해성대군을 임금으로 만들었다.임금이 된 예종은 왕 다웁게 행동을 못하고 항상 나이가 들어도 어미인 정희대비의 눈치만 살피었다. 그는 왕이 된후 이렇다할 일을 해 놓은게 없었다 .오히려 남이 장군 같은 훌륭한 인재를 주위의 모함을 막지 못하고 죽이는 어리 석까지 행하였다
그는 결국 왕이된지 1년도 못 되어 이유 모를 병으로 죽고 만다 .
세상에서는 이것도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 왕후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힌 탓이라고 소문이 나돌았다 .
예종이 죽자 임금 노릇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예종의 장남 인성대군은 이미 어렸을때 죽었고 두째 아들 제안 대군은 너무 어리다는 핑게로 제외 시켰다 .
대왕 대비 윤씨가 권력을 휘두르기 좋은 기회가 온것이다. 손자인 예종의 아들로 왕을 세우지 않고 자기의 장남 이었다가 이미 죽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율산군을 왕으로 만들었다 .
자기의 장손이었던 월산대군은 이미 유배되어 사사 한일이 있었고
13살짜리 손자 자율산군은 철도 안들은 어린애였다
(음, 손자 자율산군을 왕으로 세워 놓아야 내 마음 놓고 마음 대로 권력을 주물를수 있지....)
정희 왕후는 자기를 따르는 신하를 시켜 13 살짜리 어린 손자 사내 애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바로 9 대 성종(成宗)이다.
성종은 이름 만 왕 이었지 정희왕후의 치마폭에서 벗어 나지를 못하였다 정희왕후는 이제 마음놓고 국가 권력을 휘둘러 대었다 .나라의 운명이 한 여자의 치마 폭에 좌우 되게 세상은 변해 있었다 .
모든 정치는 정희왕후가 생각하는대로 움직여 주었고 자기의 영화만 챙기었을뿐 피 지배층인 농민들의 어려운 삶 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정치가 문란 해지기 시작 하자 관료의 기강이 문란 해지고 농촌 사회는 피폐 할대로 피폐 해지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는 어느새 정희왕후의 독재의 그늘 아래서 그녀를 따르는 몇몇 사람을 제하고는 모두가 불평으로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중에도 곧은 선비들인 최세호, 권맹희등이 나서서 귀성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발각되었다. 두사람은 잡혀 처형당한것은 물론이었다.귀성군도 역모에 가담했다하여 그마저 죽이고 만다
한명희 ,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등은 자신의 자리를 정희왕후의 독재에 아부하여 심복노 릇을 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늙은 권력자 정희 대비는 성종이 즉위했을때 나이 53 세였다 .수명이 낮았던 당시사회로 볼때는 할머니로 정치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 였지만 조금도 정치에 관여에서 물러날것 같지 않았다 .권력이란 그래서 마약과 같다고 했나 보다 .
다행히 임금이된 성종은 총명하고 착하였다. 그래서 이 할머니 대비의 마음에는 쏙들었다. 그는 사서 삼경 맹자,춘추니 책을 않읽은것이없었다.성종은 글 읽기에만 전념했지 부인과의 가깝게 지내지 않았다 .한명희의 딸인 왕비는 11살에 결혼하여 왕이된 이후에도 여자로서 서로 가까이 하는것을 꺼리었던 것이다.여자로서의 정이 없었던 것이다.정희 왕후가 걱정하는것은 바로 이점이었다 .
(쯧쯧 여자를 가까이 해야 후사를 잇지.....저러고 책과 씨름만 해서야...쯧 쯧 어디 예쁜 애가 없을고....)
정희 대비는 왕이 여자로서의 정을 쏟을 만한 여인을 골라 후궁으로 만들어 주어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자기가 믿을 만한 심복 중 영리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물색하고 있었다 .
정희대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때 성종은 나이가 좀들더니 제법 어른스러운 말을 하며 대비를 졸랐다
"어마 마마, 돌아가신 아버님을 왕으로 추존 하심이어떻겠사옵니까?
하고 엉뚱한 간청을 대비에게 하는것이었다
"아니 주상께서는 느닷 없이 돌아가신 아버지는 ....."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종의 아버지라면 왕이 되기전에 죽은 의경 세자를 일컫기 때문이었다 .성종에게는 아버지이지만 정희왕후에게는 아들이니 손자인 성종이 한편으로는 효도스러운 마음에 은근히 대견한 마음도 생기었다.
"그러면 어떻게 아버지를 추존하러 하오?"
"생전에 많은 덕을 쌓으셨다고 하여 덕종(德宗)이라고 추존 할까 하옵는데요"
"허, 주상 생각도 매우 깊으시구료, 주상께서 생각 하신 것입니까?"
"실은 한명회 대감이 먼저 안을 꺼냈기에 생각을 거듭항결과..."
한명회라는 말에 정희왕후는 외에 라는 듯이 야간 미간을 찌푸렸다 .한명회라면 정희왕후을 따르는 심복중에 심복이었으나 마음 한구석에는 경계심이 조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명회는 정희 왕후도 무시 못할 인물로 왕실에 깊이 침투되어 있었다
한명회에게는 원래 딸이 둘있었다 .언니는 죽은 예종 의 부인이 었었다 ,둘째 딸은 성종이 왕이 되기전 2 년전인 11 살때 성종과 결혼하였다 .
그러다 보니 한명회는 두 딸 때문에 왕실의 외척으로서 떠날라야 떠날수 없는 존재 까지 된것이다. 정희왕후는 한명회의 딸들이 둘씩이나 왕궁에 들어 와 있었으나 별로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었다
결국 정희대비는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존되는 안에 허락하고 말았다 .그까짓 죽은 아들에게 임금으로 추존하는것 쯤이야 무어 대수로운 일이야 하는 뜻에서이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정희왕후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 했을때는 이미 상황이 많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사건이 발생 되었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 되고 보니 의경 세자가 덕종이된 의경세자 부인의 호칭문제였다
궁중에 대비가 둘이 생기고 만것이었다 .지금 까지 대비라면 막강한 권력을 가진 정희왕후 였지만 이제는 덕종의 부인 소혜왕후도 엄연히 대비의 호칭을 받게 된것이다.이제는 소혜왕후가 아니라 인수대비(仁粹大妃)라는 새로운 호칭을 받게 되었다.인수대비는 한씨이기는 하지만 한명회의 딸이 아니고 영의정 이었던 한확의 딸이다 ,새로 대비가된 인수대비의 "내 아들이 상감"이라는 인수대비와 "상감은 내 덕에 임금"이되었다는 정희대비 사이에 눈에 띄지 않는 암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정희대비와 인수대비 간에 본격적인 암투가 노출 된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전혀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는점을 두고 정희왕후가 자기 심복중에서 예쁜 계집애를 후궁으로 맞이 하려는데서 발생되었다
"아니 대비께서 후사를 걱정하여 후궁을 맞이 한다고?"
인수대비가 정희대비의 후궁 간택의 소식을 두고 속으로 은근히 화가 났다
(내 아들인데 어미를 무시하고 할머니가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후궁을 일방적으로 정한다고? 안되지...)
인수대비는 그날로 윤기무의 딸 윤씨를 간택 성종에게 바치도록했다 .
며누리인 인수대비의 반기였다.
성종이 보니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뽑아 보낸 윤씨야말로 빼어난 미모의 예쁜 여자였다 .할머니인 정희 왕후가 정략적으로 아무나 자기 심복중에서 뽑아 올린 소녀와는 비교가 않되었다
성종은 이 아름다운 윤기무의 딸 윤씨에게 푹 빠저 들었다
한확의 딸인 인수대비는 이에 뒤질세라 이번에는 자기의 남편 덕종을 종묘에 왕으로서 위패를 모시라고 성종에게 주문하였다 .
막상 덕종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려다 보니 덕종이 엄연히 예종의 형이니 예종 위에다 모시자는 파와 예종이 먼저 왕이었으니 그뒤에모셔야 한다고 갑론 을박하며 대신들이 세월을 보내고있었다.
성종이 당황 할수 밖에 없었다 .자기 아버지를 작은 아버지 밑에 두려니 그렇고 또 작은 아버지 예종이 엄연히 임금으로 있었으니 그도 그렇고 서로 눈치가 보고 있었는데 결국은 권력에 아부 하는파인 무신인 민발이라는 자의 건의를 시발로 대신들이 아부성 발언에 모르는척하고 자기 아버지 덕종을 예종위에다 모시기로 하였다 .
이로써 성종 아버지 추존 문제의 논쟁은 끝났다
결국 이렇게되니 궁중 상황은 변해가고 있었다.
정희대비로서는 예견치 못한 사건이었다 .성종이 간택한 윤기무의 딸이 성종의 총애를 독차지 하자 세상은 바뀌어 가기시작했다 .
게다가 절에 잘다니던 정희대비가 스님들을 궁중에 까지 끌어 들였는데 스님들이 심산 유곡 절까지는 교통관계로 궁중에 머무는 예가 많아지자 궁중의 여인들과 관계에 대한 좋지않은 소문이 퍼지었다 .
인수대비가 이를 기회로 가만히 있지않았다
"아니 중 들을 궁중에 유숙시키더니 결국은 좋지않은 소문만 내고...."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에게 반발 하였다.
인수대비는 여자들의 품행을 단정히 하여야 한다는"내훈(內訓)"이라는 책까지 만들어 궁중의 여인들에게 돌리고 암암리에 정희대비를 압박하여 들어갔다.그리고 대사헌 서거정과 대사간 정염등에게 성종에게 스님과 여인들간의 좋지 못한일들 발생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
조정 대신들도 대세가 인수 대비에게 기우는것을 보자 대신들도 인수 대비에게 기울기시작했다 .이에 스님들도 함부로 궁중 출입을 못하게 되었다 .
한편 궁중에는 사건이 벌어 지었다. 한명회 딸인 공혜왕후 한씨가 19세 나이로 이유 없이 죽고 만것이었다 .성종의 나이는 이때 한살 아래인 18세 때이었다.
그런데 성종 7 년 인수대비가 추천하여 숙의가 되었던 윤씨에게서 아들이 탄생되었다.
축하 할일 이었다.이로 인해 윤씨를 들여왔던 인수대비의 어깨가 올라가고 정희대비의 어깨는 축 처지었다.
그와중에 대신들은 아직도 두 대비를 자기편으로 하는 두파로 갈라지게 되었고 인수대비파가 더 강했다.
"정치에 손을 떼시라"
대신들 중에는 공공연히 정희왕후를 몰아 부치는 발언 까지 서슴치않았다.
정희대비파는 늙은 공신들 이었기에 거의 늙어 거동을 못하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도 많았다 .정희대비도 이제 60을 넘기었다.
그녀는 아직도 권력에대한 미련은 있었지만 권력을 성종에게 넘기기로 작정했다
성종은 13살에 왕이된지 겨우 7년만인 20세의 나이로 실권을 잡게 된다 .
숙의 윤씨로 왕비를 삼고 그녀가 낳은 융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왕비가 된 윤씨는 완전히 대우가 달라지었다 .친정 어머니는 부부인 칭호를 받고 죽은 친정 아버지 윤기무는 영의정으로 추존 되었다.
그러나 궁중에는 많은 여인들이 성종의 후궁으로 계속 발탁 되었다 .자그만치 성종의 재임중 성종의 여인 숫자가 12명이었으니 임금치고는 무척이나 여복(?)이 많은 임금이었다
18세의 죽은 공혜왕후 가 자식이없는것을 빼고는 자식들이 줄줄이 탄생하였다 .
궁중에는 성종이 밤마다 여인방을 바꿔 가며 사랑을 속삭였다 (30)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