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유정(母校有情) / 7회 손필영

by revhokim1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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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인생은 만남이라고 하였다. 살아온 순간 순간이 만남의 연속이다. 평생을 배우면서 살아온 덕분에 종횡으로 얽힌 동문모임도 많다. 그러나 그 흔한 모임 중에 중고교동창의 모임만큼은 다른 모임과 다르다. 누구에게나 그 시절은 청춘이 싹트고 자란 인생의 고향 같은 시절이며, 젊은 날의 향수가 깃든 모교가 있기 때문이다.

1949년 우리는 용두동 옛 선농단에 자리잡은 “천하부중”에 입학하였다. 다음해 6.25가 일어나, 부산 보수동으로, 다시 용두동으로 그리고 을지로로 유전하면서 서울대 수석합격과 최고 합격률의 영광을 모교에 바치고 “천하부고”를 떠났다.

모교의 추억들은 추상적이 아니라 언제나 구체적이다. 이상하게도 작고 하찮은 일들까지 오랜 세월의 벽을 넘어 바로 어제의 일들처럼 생생하다.

모난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머리통을 깐 K음악선생, 고사리 손으로 기름 묻은 원지를 긁으면서 만든 학급뉴스, “프로필”을 건방지게 썼다고 야단치던 L화학선생, 하모니카를 기막히게 잘 불던 N, '의'와 '으'를 따로 발음할줄 몰랐던 W.

지난 겨울 모처럼 부고동창회의 송년모임에 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스승과 제자, 옛 사람 새 사람 정다운 얼굴들이 함께 어울린 마냥 흥겹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헤어지면서 다 같이 일어나 교가를 불렀다. 용두동학생도 보수동학생도 을지로학생도 그리고 훨씬 많은 종암동학생도 한 목소리로 우렁차게 불렀다.

성동에 터를 잡은 배움의 동산, 기리자 기리리라 우리부고 기리리라”
그렇다. 그곳에는 청량대라는 석비가 선 아담한 동산이 있다. 그 무덥던 여름 자유를 사랑한 그 스승이 사상을 달리한 무정한 제자의 총탄에 한많은 인생을 마친 슬픈 역사가 있다.

철 따라 꽃피는 넓은 화단이 있고 교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긴 회로에는 나이든 수양버들이 늘어저 있다. 그 “성동의 배움의 동산”, 지금은 아득한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오늘 교가를 합창하는 우리의 가슴속에 오랜 세월의 벽을 넘어 영원하다.

글쓴이: 손필영(7회)      작성일: 2002-10-24

추이: 우리 7회는 1955년도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최고득점자(이세영)를 배출하였고 최고의 합격율을 기록하였다. 그 이후 태상근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서는 후배들에게 7회 졸업생들을 본받으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편집자 주: 위의 글은 모교 동창회보/선농춘추에서 전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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