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손자 보러 가는 길 /15준 함청자

by revhokim1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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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저것 음식을 만들다보니 자정을 훨씬 넘어 아예 한 시 쪽에 가깝다. 큰 솥에 끓여 놓은 국을 집안에 두면 밤새 맛이 갈까 싶어 마음이 개운치 않다. “아무래도 한겨울 ‘자연 냉장고’로 쓰는 뒷 마당으로 옮기는 게 안전하지!" 생각하고 남편을 깨울까 하여 침실에 가니 깊은 잠이 들어 한 밤중이다. 내일 먼 길 갈 준비를 한다고 일찍 잠자리에 든 남편이 곤히 자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작은 통을 여럿 놓고 옮겨 담아 하나씩 들어 나르고 보니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공연히 자는 사람을 깨우려 했던 생각이 속으로 부끄러웠다. 들락 날락하며 밤 공기를 쐬어 차가와진 몸으로 이불 속에 들어 갔는데도 곁에 누운 남편은 전혀 모른 채 잠이 깊이 들었고, 어쩐 일인가 내 몸은 심히 고단한데 머리속은 자꾸 맑아지고 잠은 점점 멀리 달아난다. 이제 수면제 먹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일할 땐 몰랐는데 허리가 무척 아프다. 남편 말대로 한국 식품점에서 사 왔으면 간단할 걸 그랬나 보다. 며느리가 아기를 모유로 기른다기에 혹시라도 방부제 많은 음식을 갖다 먹이면 모유를 통해서 아기가 먹게될 것 같아서 음식을 “깨끗하게” 정성껏 준비했는데, 몸은 아프고 잠은 안 오니, 유난스럽게 계획한 값을 톡톡히 치룬다는 마음이 든다. 스스로 생각해도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다.

잠간 눈을 붙이고 나니 어느 새 아침이 되었다. 남편은 벌써 일어나 여행갈 차비가 다 되어 있다. 가져 갈 음식을 말해주고 남편이 챙겨서 차에 싣는 동안 부지런히 준비를 하여 아들 며느리 손자를 보러 두 시간 여행길을 나선다.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빠뜨린 것 있는가 이것 저것 남편에게 물으니 빙긋 웃으며 대답한다. “이젠 늦었소. 있는 것만 가지고 해 봅시다.” 다행히 필요한 것은 다 있었다.

가다가 찻길이 가끔 막혀서 도착시간이 예정보다 반시간 늦어졌다. 중간에 아들 며느리와 몇번 전화를 주고 받은 끝에 마지막으로 아들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링컨 터널을 나서면서 전화를 걸었더니 아들이 어디 어디로 오라 해서 예정대로 그를 만나 집앞의 더 없이 좋은 자리에 주차를 하고 가져 온 음식을 차에서 내린다. 음식상자를 여럿 포개어 들고 가는 남편과 아들의 뒷 모습이 마치 피자 델리버리 일군들 같다.

집에 들어가 서로 껴안고 반가워하며 아기를 보니 깊은 잠이 들어 있다. 자는 옆 모습이 영락없이 남편과 아들의 얼굴이다. 이제 열하루 된 아이의 이목구비가 여간 또렷하지 않다. 자리에 편히 앉아 며느리 손을 잡고 이 얘기 저 얘기 시작하는데, 남편은 아기 곁에 붙어 서 있고 아들은 음식을 챙겨 넣으며 좋아서 연방 웃으며 싱글벙글한다. 잠시 후에 부엌과 거실을 갈라 놓는 밥상대(臺) 위에 점심을 차렸다.

아들 보러 오면서 마음 급한 우리 내외가 조반을 걸렀는데, 아들 며느리는 여태 안 먹고 엄마 음식을 기다렸다기에 “아기 엄마가 어째 그리 몸관리에 소홀하냐?” 잠간 꾸짖고 네 식구가 달게 점심을 먹었다. 먹자 마자 남편은 아기 곁으로 다시 달려 가고, 나는 며느리와 하던 얘기를 계속 나누는데, 아들은 싱크대에 붙어서 깨끗이 설겆이를 한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설겆이의 선수다.

아들이 설겆이를 마칠 즈음에 남편이 아기방에서 나오더니 집에 가자고 서두른다. “여보, 나 힘 들어요. 커피 한 잔 하고 숨 좀 돌린 후에 갑시다”하며 버티는데, “나중에 다시 오고, 오늘은 그냥 가야 돼” 말하는 남편의 태도가 의외로 강경하다. 아쉬운 발걸음으로 아들 집을 나서서 톨부쓰(Toll Booth)를 지나 찻길이 편안해지길래 남편에게 물었다 “아들이 설겆이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남편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거야 아주 좋은 일이지. 저희들 평생 행복하게 사는 비결인데! 그렇게 안 하면 오히려 걱정이지.“
“그럼, 왜 가자고 그렇게 서둘렀어요?”
“응, 아들 스케쥴을 보니까 오늘 오후 4시에 중요한 발표가 예정되어 있더군. 더 지체하면 그 애가 어려울 것 같아서...”
아기 곁에만 줄창 붙어 있었던 사람이 그건 또 언제 보았을까? 남편은 잠도 잘 자고 걱정도 안 하는데, 잠 안자고 밤낮 걱정하는 나보다 결국에는 매사에 더욱 능률적이다.

얼핏 보니 고속도로 옆으로 휴계소 푯말이 “쉬었다 가세요” 손짓하는 것 같다.
“여보, 커피 한 잔 하고 가요.”
“그럽시다. 나도 방금 그 생각 했소.”
이번 여행길은 고단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이 내용상 내 몸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