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이야기(11)-태종시대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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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조는 마침 세자와 식혜를 들던 참이었다
헐레 벌떡 내시가 밖에서 아뢰었다
"전하 큰일이 났사옵니다"
"무슨 일인데 밤중인데 그러느냐?"
"전하 지금 광화문을 열고 군사들이 궁궐로 몰려 들어오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정안대군과 능지기 이숙번이 거느리는 군사 들이 궁궐로 뛰어 들어 와 궁궐의 군사들과 접전이 벌어 지었습니다"
"뭐라 ..방원이가?"
"이런 , 때려 죽일놈이"
이성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둔 칼과 창을 잡았다



"전하, 형님이 설마 아바 마마를 해치겠사옵니까? 혹시 형님이 궁궐로 들어 오려는데 형님을 해치려고 하는자들과 싸우는 것이나 아니온지..."
세자가 임금을 말리었다
태조는 화를 잠간 진정시키고
"누가 방원이를 입궐하라고 했더냐?"
하고 내시에게 물었다



"부른 일이 없사옵니다"
순간 태조는 칼을 다시 칼을 집어 들고 눈을 부릅뜨며
"이놈을 ..."
하고 침전을 나서려 하였다
내시와 세자가 임금을 다시 붙들어 말리었다.
"전하 전후 사정이 불확실 하오니 소인이 좀더 알아 보겠나이다 .고정하시옵소서 "
임금은 내시에게
"네가 나가서 다시 알아 오도록 하거라"
하고 지시하였다



내시가 나가 보니 이상 하게도 궁궐이 조용하였다
강녕전 쪽으로 나가 아래 내시를 불러 물어보니 군사들이 도로 궁성밖으로 나갔다는 것이었다
내시는 다시 임금앞으로 나아가
"군사들이 궁궐 밖으로 물러났다 하옵니다"
"아니 궁궐 경비가 이렇게 허술 해서야 당장 금위장을 불러 들이라"
금위장이 불리어 왔다



"입직 병력은 무엇하고 이리 소란 스러우냐"
"정안대군과 능지기 이숙번이 궁궐로 들이 닥치기에 금군이 일제히 대항하여 밖으로 몰아 내었습니다, 광화문을 닫고 철저히 경비하고 있사오니 안심하시옵소서"
이말을 듣고 태조의 화가좀 풀리는듯했으나 무엇인지 께림직했다
"방원이는 지금 어디있느냐"



"한밤중이라 사정을 모르겠습니다 안심하고 주무시옵소서"
태조는 밖이 조용하다는 말을 듣고 침전에 들어갔다
방원은 궁궐에서 소란 피우기 이전에 우선 핵심 인물인 정도전이 어디있는가가 궁금했 다 .방원이 조준에게 정도전이 궁궐에 없음을 확인하고 그의 행방을 물었다
조준에게 물어 보니 정도전이 군사릉 거병 한지를 새까맣게 모르고 송현동에 있는 남은의 집에서 남은과 술한잔을 하고 있다는것을 알아 냈다.



방원은 이숙번에게 먼저 정도전을 잡아 죽이라고 명령 부터 내렸다 .
이숙번의 군사가 송현동의 남은의 집 주위를 외워쌌다 .
"정도전을 잡아라"
이숙번의 고함이 터지자 군사들이 술을 먹고 있던 안방을 들이닥 쳤다 .
졸지에 변을 당한 정도전은 들이 닥친 방원 군사들 에게 붓들리고 말았다 .
남은은 집뒤문을 몰래 빠저 나가 미륵당 건물속에 숨어 있다가 이숙번의 칼에 맞아 죽었다.
이숙번이 방원에게 정도전을 체포 하였다고 보고 하였다 이숙번은 방원의 의중을 알아보기 위하여 보고 한것이다



방원은 이숙번이 자기에게 와서 정도전을 체포 했다는 보고에 기분이 매우 얺잔았다. 알아서 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
대꾸를 않고 있는 방원의 심중을 읽고 있던 이숙번은 알았다는 듯이 부하 장수에게 눈짓을 했다.
소리 안나게 죽이라는 뜻이었다

정도전 , 그는 누구인가? 개국 일등 공신이 아닌가? 또 태조의 오른팔이 아닌가? 정도전은 어이없게 이숙번의 부하가 내려친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
고려 충신 점몽주를 개경 선죽교에서 때려 죽인 이래 방원은 어마 어마한 거물 한 사람을 또 무자비하게 죽인 것이다.



방원과 이숙번은 군사들을 이끌고 광화문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한밤중에 반대 세력인 정도전과 남은을 죽인 방원은 눈에 살기의 빛이 역력했다 .
방원은 광화문에서 문을 지키고 서있는 금위장을 바라 보며
"금위장은 듣거라 , 아바 마마를 뵙고자 하니 문을 열라"
"지금 취침중이십니다"



"문을 열라는데 무슨 이유가 그리 많으냐?"
"어명이 없이는 불가 하옵니다"
금위장이 문을 열 생각을 않고 있자 방원이 순간 이숙번에게 눈짓을 하였다 .
순간 이숙번의 군사 네명이 금위장을 둘러싸고 칼을 겨누자 마자 순식간에 금위장을 포박하여 꿇어 앉쳤다
"궁내로 진입 하라"



방원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졸들이 문을 박차고 몰려 들어갔다 . 순시간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방원은 이숙번에게
"잠간 , 아바 마마가 아직 주무신 다니 일단 멈추어라, 그리고 조준과 김사형을 부르라"
조준과 김사형은 정도전과 남은이 살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대세에 맞추어 방원을 돕지 않을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

방원에게 불려간 조준과 김사형은 무슨 지시인지 방원의 지시를 열심히 듣고 있다가 두 사람만 먼저 임금이 계신 침전으로 들어갔다 .
그들은 임금의 침전 장지 밖에 무릎을 꿇고 임금이 깨어 나기를 기다렸다 .
내시가 임금에게 조준과 김사형이 부복하고 있다는 말을 듣자 예감이 좋지않았다



"무슨 일인고?"
"아뢸 말씀이 있다 하옵니다"
왕은 내시의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이성계가 침전 장지밖에 나와보니 조준과 김사형이 부복해 있었다.
"왜 아침 부터 이렇게 나왔소?"
임금은 못 마땅한 얼굴로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전하 지금 정도전과 남은이 반란을 이르키어 정안 대군이 광화문앞에서 대치중에 있사옵니다"
"무엇이라고? 삼봉이 반란을 이르켜 ....말도 안되는 소리를 ..?"
이성계는 귀를 의심했다 . 삼봉은 정도전의 호였다
"사실이옵니다 정안 대군이 ...."
"........"



임금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래 삼봉의 반란군이 정말 궁성이라도 포위했단 말이야?\"
"사실이옵니다"
"경들의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내 용서 않으리라, 삼봉이 그럴리가 없어"
조준과 김사형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조준과 김사형은 태조의 행동이 심상치 않자
"전하 신들이 다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하고 꼬리를 빼고 황급히 이사실을 알리려고 물러나갔다



이숙번은 조준과 김사형이 얼굴이 새파랗게 되어 나오는것을 보자 지례 짐작하고 방원에게
" 나으리 급한 것은 방석과 방번 두 대군을 빨리 조치해야 합니다, 명령만 내리십시요"
하고 다그쳤다
"궐내를 샅샅이 뒤저 두 대군을 찾아내라"
방원의 명령이 떨어지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전 군사들이 노도와 같이 궐내로 진입하였다
대궐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열일곱살의 방석과 열여덟살의 방번이 궁궐에서 잡히어 무참히 죽임을 당하였다 . 경순 공주만은 여자이라 살려두고 그녀의 남편 이제(李濟)는 죽이었다 .
이렇게하여 신덕왕후의 두왕자와 사위는 무참하게 방원의손에 의하여 살해 된것이다. 피비린내나는 골육 상쟁이었다

태조는뒤늦게 이사실을 내시 에게서 듣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방원이 이놈이!"
칼을 빼어들더니
"내 이놈을 단칼에...."
하고 밖으로 뛰어 나갔다 .태조가 방원의 군사들을 보자 닥치는대로 목을첬다



이숙번은 태조가 휘두르는 칼에 군사들의 목이 파리 목슴 처럼 날아가는것을 보고 기가 막혔다
이성계는 내금위 군사들이 싸우는 현장에 나타나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청룡도를 종횡무진 휘둘러대며 이숙번 군사들을 파리 목슴 날리듯 하자 방원이 거느린 군사들은 이성계의 서슬에 놀라 궁성 밖 구리개 까지 밀리었다.



싸움은 소강 상태로 접어 들었다.
방원은 멀리서 부왕이 백마 위에서 종횡무진 자기 사병들에 대하여 파리 목슴 날리듯 목을 치는 장면을 바라보고 소름이 끼첬다
"숙번이... 아버님이 매우 노하신 모양 이야..이를 어쩌지..."



방원은 부왕이 이렇게 까지 강하게 나올줄은 몰랐다 .
그의 예측 보다 강도가 높게 나오는데 적지 않게 놀란것이다.
이숙번도 방원의 결심이 혼란이 오는 듯 태도에 내심 당황 하였다.



"나으리 왜 마음이 어찌 흔들리십니까? 밀리면 않됩니다. 우리군사가 상감의 위세에 눌려 잠간 후퇴 했을뿐입니다.어서 진격 해야 합니다.상감만 해치지 않으면 됩니다"
방원의 반격 명령이 다시 떨어지자 이번에는 숫적으로 우세한 이숙번 군사들에게 밀려 내금위군사가 밀리기 시작 했다



이성계는 군사들이 미리기 시작하자 일단 내금위 군사들을 궁성으로 끌여 들이고 대궐문을 닫도록 했다.
"여보게 숙번이 ,아무래도 부왕이 저렇게 버티고 계신데 궁성 안까지무리하게 진입 하긴 그러네...."
"나으리 , 상감만 해치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이숙번은 만일 이작전이 실패로 끝나는 경우 태조로 부터 반역죄로 정죄 당할까 매우 두려웠다.다행히 방원이 우선 방패 역활은 해줄것이지만 그래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방원은 이 싸움이더 이상 부왕을 닥달 해서는 실익이 없다고 생각 했다.성공 하더라도 대의 명분을 쌓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이었다.
(일단 싸움을 멈추자)
방원은 군사들을 물리고자기 집으로 돌아왔다

이성계는 방원이 돌아 가고 난다음 혼자 가슴 앓이 만 하고 있었다
"이놈 방원이 네가 아무리 그런다 해도 내눈에 흙이 들어 기전 까지너를 세자로 책봉 할까 부냐?"
그는 애써 방원을 무시 했다

왕은 즉시 조준을 비롯한 대신들을 불러
"방과를 세자로 책봉 토록 하고 과인의 모든일을 세자에게 처리토록 하라"
하고 전격적으로 대신들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세자 책봉을 일방적으로 명령 하였다. 이성계는 골육 상쟁으로 얼룩진 왕자들일에 더 이상 연연 하고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성계는 왕자리를 방과에게 물려 주었다.
개국한지 7 년만에 왕의 자리를 떠난것이다.
태조는 대신 임금의 국새(國璽..임금의 직인)는 상서원(尙瑞院)에 명하여 태조가 기거 하고 있는 내전으로 가져 오라 하여 내놓지 않았다

조선 2 대 왕이된 정종은 태조가 국새를 내놓지 않자 국사를 처리하는데 애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정종은 임시로 옥새를 다시 새로 만들고 사후에 결재키로 하였다. 그는 조준을 좌의정,김사형을 우의정,하륜을 정당문학에 임명하고 이숙번을 우부승지 벼슬을 주어 신료들의 동요를 달래었다.
또 형제들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하여 방의에게는 중군 절도사,방간은 좌군 절도사, 방원에게는 우군 절도사를 주었다.



형제들 간에 군사권을 나누어 주어 서로 견제 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실권은 방원이 모두 군사권을 갖고 있었다.
정종은 방원의 군사 위력을 적지 않이 두려워 했다
(방원이란 놈이 형인 나 까지 해치지 않을까?)
정종은 마음이 불안 하였다



 


1399년 봄 정종은 방원의 위협을 몸에 느끼고 있던 참에 이상한 소문까지 들려 오자 한양에서 다시 개성으로 천도 할것을 결심 했다
이상한 소문이란것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한양은 정종에게는 운이 좋지 않으므로 계속 나쁜 일이 생길 것이 분명한 반면 방원에게는 한없이 운이좋은 곳이라는 소문이었다. 또다른 소문은 한양은 지형이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할 땅이기 때문에 계속 골육 상쟁이 일어날것이니 흉지라는 것이었다)



"개성으로 다시 천도 하리라"
정종은 대신들에게 강력히 주장 명령을 내렸다
이태조는 처음에 정종의 말을 듣고 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정종의 간곡한 설득으로 마지 못해 개성으로 쫓아는 갔으나 그에게는 개성은 가고싶지 않은 곳인지라 계속 못 마땅한 표정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방원에게는 많은 문객들이 드나들었다.
실세중의 실세인 방원을 문객들은 그냥 두고 있지 않았던것이다.
좌군 절도사 방간은 방원의 바로 윗 형이다. 공식 명칭은 회안대군 ,
그는 야심이 정안 대군 방원 못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동생인 방원이 많은 식솔 들을 데리고 궁성을 공격 했던일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다.
그러나 정종에게는 아직 왕자가 없다는 점과 정종이 항상 시름 시름 앓고 있는점을 유심히 관찰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방간은 임금 자리에 대한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걸림 돌은 방원이라는것은 누구 보다도 더잘알고 있었다.
(방원이를 없애지 않으면 나는 영원히 대군 신세를 면치 못한다)

하루는 방간에게 지중추 부사를 지냈던 박포라는 인물이 찾아왔다
박포는 한 때 방원에게 충성을 다 하던 인 물이었다. 방원이 주위를 딸아 다니며 충성을 다했지만 벼슬 한자리 변 변히 받은게 없을뿐만 아니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오히려 죽주(지금의 영동) 로 귀양가 있었다 .그는 방간의 야심을 간파하고 그를 찾아 온것이었다



"나으리 지금 이나라의 형국을 어떻게 보십니까?"
방간은 방원 주위를 맴돌던 인물이 찾아 온것이 고기가 물 만난것 처럼 반가웠다,
"부사께서는 방원이나 잘 돌봐 주시지 웬 일이시오"



"나으리 솔직히 말씀 드려서 정안 대군은 불효 막급 할 뿐 만 아니라매우 난 폭한 사람입니다. 제가 그동안 따라다니다 보니 그런 부도덕 한 대군을 따라 다닌것이 후회되어 대군을 모시려고 이렇게 찾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진심이라면...."
"나으리 소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절대 배신 않을 것이오니 받아 주십시요"
"원 별말씀을 ..."
방간 은 주안상을 차리라 하고 그의 말에 귀를기울였다
"그런데 아까 하신 지금의 형국이 어떠냐는 말씀은 무슨 뜻이오이까?"
"지금의 형국이야 말로 방흘지세(蚌鷸之勢)라 할수 있지요"



"무슨 뜻이 오이까?"
"말씀 드리자면 지금의 정국은 해오라기가 방합 조개를 잡아 먹으려고 입부리를 넣었다가 방합이 부리를 물고 놓지 않으므로 서로 다투는 사이에 둘다 어부에게 잡히고 말았다는 옛 일과 딲 맞아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방합은 누구고 해오라기는 누구란 말 씀이오?"
방간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짐짓 다시 물어 보았다
"외람된 말씀 이오나 이를테면 해오라기는 나으리 라면 방합 조개는 정안 대군이옵죠"
"그러면 어부는 ?"



"상감이라 보면 틀림 없습니다"
"그러면 부사께서는 정안대군과 내가 대결 하면 안된다는 얘기가 아니요?
"그게 아니옵고...."
"지금 상감 께서 개경에 천도 해 온지가 얼마 않된 상태로 나라 안이 온통 모든 질서가 안정 되지 않은 어수선 한 틈을 이용 하여 차제에 정안 대군을 제거 하면 대군께서 나라 권력을 잡을 좋은 기회가 왔다는 말씀 입니다"
"........"
방간은 박포의 말을 듣고 나니 자기속을 유리알처럼 꿰 뚫어보고 있는 인물이 있다는데 저윽히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방원에게는 수많은 문객들이 드나 들었다.
개성에서 고려의 상징인 수정궁 근방이 이방원의 집이었다.



박포는 방간에게 계속 방원을 칠것을 종용했다
"나으리 .좌군 절도사로서 군사들도 정안대군 못지 않으니 아쉬울것이 있습니까?. "
"하지만 정면 대결은 좀...."



방간은 저번 때에 방원이 궁성 까지 점령해들어갔던 기억을 되뇌었다.
"나으리 옛말에 하는 일이 아무리 옳아도 시기를 놓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지금이 때입니다."
"그러면 방원의 집을 급습하자는 말이오?"
"그 말씀이 아니옵니다 . 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여러가지방법중 몇가지를 선택해 치면 됩니다"
"그 방법이란?"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 큰일을 하자면 마음이 먼저 흔들려서는 않됩니다 . 우선 거사전에 마음 가짐을 먼저 말씀드리면 대의멸친 (大義滅親)하시겠다는 확고한 정신 부터 가다듬어야 합니다.이말은 국가의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고 형제고 연연해서는 성공 하기 힘듭니다"
방간은 이말에 얼마전 궁성안에서 생겼던 형제들간의 사건이 떠올랐다.
"무슨 뜻인지 알겠소"
"그러시다면 방법을 말씀 드리지요. 정안 대군을 초대하여 복병을 숨겨 두었다가 단 칼에 처치 하면 됩니다"
"음....."
방간은 좋은 계교라고 생각 하였다

다음날 즉시 실행하기로 마음먹고 방간은 조카되는 이래를 불렀다 .
"자네가 정안 대군에게 찾아가 오늘저녁 내가 술한잔 내겠다고 알리고 오너라"
하고 일렀다



이래는 최근 살벌한 분위기에 두 대군이 같이 앉아 술자리를 나눈다니 그보다 더좋은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정안 대군집을 찾아갔다.
방원은 집에 없고 방원의 부인 민씨가 있었다
"오늘저녁 희안 대군께서 술한잔 하시자는 말씀이있어 전합니다"
하고 방간에게 돌아 왔다.



이래가 방간에게 보고 하고 자 돌아와보니 방간의 집안에서는 잔치는 커녕 곳곳에 창과 칼이 번득이고 분위기가 술자리 준비하는 분위기와는 상반된 분위기에 놀랐다
( 아, 일이 심상치않구나 정안대군을 죽이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는것을 모르고.....)
그는 이미 말을 전해 놓았으니 어쩌나 하는 겁이 더럭났다.
이래는 자기의 스승인 우현보에게 찾아가 이사실을 털어 놓고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우현보는 방원과 절친한 사이였다. 방원은 웬많한 학자들까지 자기 편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우현보는 형제들간에 직접적인 충돌을 막기위하여 방원을 자기집으로 오게 하여 예정된 시간을 비끼게끔 술상을 벌리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방간에게 방원이 나타날리가 없었다
우현보는 이자리에서 방간을 경계할것을 직간접적으로 역설하였다.물론 방간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자극적인 말은 피하고.....

방원이 초대에 응하지 않자 방간은 이날밤 수정궁 주변에 있던 방원의 집을 급습했으나 막강한 사병을 가지고 있던 방원에게 오히려 고전하고 있었다. 이시간에 방원은 우현보와 술잔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방원에게 급보가 들어 오자 방원은 올것이 왔구나 생각하고 칼을 빼들고 자기 사저로 내달리었다.
방원이 내 휘드르는 칼에 방간의 사병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이때였다
"어명이요.."
하고 일단의 군사들이 중간에 들여 닥쳤다
정종이 이사실을 보고 받고 금위군을 보내 나타난것이었다.
"대군들은 싸움을 중단 하라."
임금의 추상같은 어명에 모두 주춤하였다.

싸움은 일단 끝났으나 사건 전말을 보고 받은 임금은 바원의 눈치를 보며 방간을 토산으로 귀양보내고 주동자인 박포는 사형을 하였다

이사건으로 방원은 오히려 힘이 더 강해 지었다 .임금 정종도 방간을 이용한 방원의 견제도 이제는 물건너간 정책이 되어 버렸다고 체념하게 되었다 .
이사건으로 방원의 집에는 권력에 아부하는 문객들이 더욱 문전 성시를 이루었다.
정종은 기가 막혔다
(내가 무슨 임금이란 말이냐? 실권이 없는 임금....)
정종은 이사건이후 부쩍 술상을 가까이 하였다 . 권력의 상징인 왕의 자리에 대하여 도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연히 심신이 허약해질수 밖에 없었다.
(형제간의싸움 , 부왕의 진로,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기에 이와 같은 육친간에 진흙바닥에서 싸우며 날을 지새는고?.....차라리 방원에게 왕 자리를 물려주고 편히 한세상 살까?..)



정종의 몸은 날로 쇠약해져갔다.
더구나 정종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정종은 정사에는 관심이없고 왕궁에서 격구라는 오락를 탐닉하고 방원의 눈치만 살피는 신세가 되었다.일종의 몸 보신책으로 보아야 했다.

1400년 11월 정종은 결심을 하고 왕자리를 방원에게 양보 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기로 했다.
이롷게 결심한것도 왕후인 정안 왕후의 간곡한 권유에서였다 , 야심많은 방원이 언제 반란을 꾀할지 모르기떼문이었다.그렇게 하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모르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정종은 왕의 자리를 물러난후 유유자적하며 사냥 낙씨 온천등지를 돌며 편안히 살다가 세종때 죽었다.



그는 권력이라는 진흙바닥을 피해서 조용히 살다간 무능(?)한 임금으로 후세에 남겼으니 그는 세종조에 63세로 죽기까지 놀이로 세월을 보냈는데 죽은후에도 묘호없이 지내다가 숙종때 이르러 비로서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그의 묘는 지금 휴전선 근방 판문점 가까이 있다.



어쨋든 그는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나 임금으로 대우 받지 못하고 살았던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만큼 그는 방원이라는 인물의 살벌한 눈초리속에서 왕위를 노리는 죽엄이라는 공포에서 한시도 떠나지 못고 살았던 사람이었다.정안왕후도 한시라도 방원의 감시의 눈초리를 의식하며 불안을 떨구지 못하고
남편인 정종을 설득했던것이다.
실세가 못된 임금....대군보다 못한 왕...정종과 정안 왕후의 비참한 삶이 어떻겠는가는 독자 상상에 맡길수 밖에 없다 방원은 임금으로 즉위하자 우선 이성계를 설득하려 했다 .
그러나 이성계는 닫힌 마음의 문을열지않았다.
태종 방원은 임금답게 행동하여야 한다고 생각 했다.



태종은 평소에 마음에 묻어두었던 각종 시책을 연달아 발표하고 실천에 힘썼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위하여 어굴한 일이 있으면 북을 두드려 신고하면 신문고라는 큰북을대궐 문루에 달아아무나 호소하게 하였다.
노비문제도 노비 변정도감 이라는것을 두어 노비들의 말도 귀담아 들어주었다. 지금까지의 권력층에대한 위협이었다.



호패법이라고 지금의 주민등록 비슷한 법을 만들어 인구 동태도 파악하게하였다.
태조는 함흥에서 방원이 정치를 그런대로 잘이끌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나 그는 죽어도 개경은 다시 가기는 싫었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무학대사였다.
무학대사는 태종 방원이 예상밖으로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다.
태조 이성계는 듣고 있다가 무학대사의 간곡한 권유에 개경으로 가기로 하였다.
(임금되기를 바라던 못된 놈에게 다시 가다니.....)
태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으나 무학대사의 권유에 한번 가보기로 하였다.
세상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가는길에 민심 동태를 들어보니 생각보다는 방원의 정치를 나쁘게 말하지않고 있었다.
(흠.형제간의 골육상쟁을 일삼기만 하는 불한당으로 알았더니 그래도
임금이라고 앉더니 구실을 하는 구먼.....)
태조는 혼자말로 지꺼리며 개경에 이르렀다.
태조는 개경에 이르자 마중나온 방원의 인사를 형식적으로 받고 숙소로 돌아가 두문 불출하였다.
그후 이성계는 가지고 있던 옥새도 방원에게 넘기고 아예 나타나지도 않고 74세 나이로 죽기 까지 상왕으로 만 남아 있게 되었다.

태종의 시대가 도래한것이다
태종은 고려의 때가 묻은 개경이 싫었다.
왕자의 난을 겪은 정종은 등극하자 마자 상왕 이성계를 모시고 개경으로 환도 한것 자체가 싫었었다.
방원은 지척에 있는 한양성의 동태를 알아오라 명하였다. 아버지 이성계가 의욕적으로 세웠던 한양이아니었던가? 방원은 그날을 잊지못한다.아버지가 궁궐 완공을 기념하여 문무 백관을 모아 놓고 큰잔치를 베풀던 때를...
그러나 이태조가 들어가 산지 3 년도 채 못되어 왕자들 간의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이 일어났고 급기야 정종은 다시 개성으로 환도 해버린것이다.
한양 동태를 알아온 도승지가 아뢰었다



"그동안 비워 놓은 탓인지 밤이면 인왕산 호랑이가 어슬렁거릴 뿐만아니라 도깨비라도 나올듯이 쓸쓸하기가 짝이 없다 하옵니다"
"그 넓은 궁궐을 4년이나 되었으니 그럴 법도 하지..."
방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뜨며
"다시 한양으로 환도하도록 추진하라"
"조야의 반대가 있을것 같사옵니다.."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이전 하라는 얘기가 아니지 ...2 년정도 기간을 두고 옮기는 방향으로 하라는 얘기야"
태종의 신념에 도승지는 어리둥절 할뿐이었다.

태종은 한양을 개경보다 더 낳은 도읍지라고 생각했다.
예전 부터 양주골이라 불리우는 한양은 경치가 수려하여 북쪽으로는 삼각산 남쪽 으로는 한강이 굽이처 흐르니 새로 정할 서울은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번영으로 이끌 새도읍이 될것이라고 평소 생각 해왔기 때문이었다.



방원은 서울을 수도로 삼음에 있어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었다
우선 서울은 위치적으로 보아 많은 백성들이 모여서 생업을 이룩하기 좋은 위치로 주위 환경과 외적으로 부터 막아 낼수있다는 중요 지형을 갖추었다는 점이었다.
한나라의 수도란 그나라의 심장부로서 수도의 안전이 곧 나라의 운명 즉 왕실이 망하느냐 흥하느냐에 직결되기때문이었다.



한양은 삼국시대부터 명당중의 명당으로 손꼽아오는 땅이다.
중신들중의 일부가 개성에 남을것을 주장했으나 태종의 신념은 꺾을수 없었다.
여하튼 태종의 신념은 오랜 대군 시절부터의 신념에서 신도읍에대한 철학이 형성 되었던것이지 즉흥적인 정치 도피는 아니었다.
그의 지론은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한양은 백두대간의 정기를 타고 구불 구불 뻗어 내려와 삼각산에 집결하는 형국으로 흠 잡을데 없는 조선의 중심지이다.
두째, 한양은 지형으로 보아 북악산이 한양의 주산으로서 북쪽의 현무요,동쪽의 낙타산은 풍수 지리학상에 좌청룡이고,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우백호가 된다.



남쪽의 남산(옛날에는 목멱산이라 불렀다)은 안산(案山)으로남주작이 된다
이들산들이 한양을 막아주는 명당이 되는것이다
태종은 이러한 산을 연결 성을 쌓고 문을 설치하면 훌륭한 도성이될것이라고 생각 해왔다.
특히 한양은 분지로서 성안을 외적이 침입 하려면 남쪽을 뺀 북쪽과서쪽은 좁은 고개를 거처야 함으로 천연의 요새지라고 생각했다



넷째, 한양은 북쪽에 명산 북한산이 있고 남쪽은 한양의 조산인 관악산이 있다.동쪽에는 용마산이 이중 삼중으로 한양을 보호하고 있는것이었다.
다섯째로는 한양이 신 도읍지로 되기 위해서는 조건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우선 백성들이 살아나갈 조건이라는것은 물이라고 생각했다
태종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건중에 조건이었다.
즉,도성의 중심을 흐르는청계천(당시에는 개천이라 불렀다)과 한양 남쪽을 흘러가는 거대한 한강이었다.
특히 태종은 서울의 중심부를 흐르는 청계천은 내 명당수로서 이상하리만치 조선의 동출 서류형이아닌 서출 동류형의 특수한 하천이 수태극형을 이루는 점에 관심을 갖었다.



풍수지리상에는 서출동류 ,다시 말하면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것이 명당수라고하는 점이었다.청계천이 명당수라는것은 서울의 서쪽 높은 지형에서 동쪽 낮은 지역으로 물이 흘러야 좋다는점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나라가 겨울철이면 차가운 서북 계절풍을 막아내는 높은곳이 서쪽에 있다는점과 일맥상통하는 이론인점도 간과 할수 없다



더섯째로 한양은 외명당수인 한강이 동쪽에서 흘러와서울을 한번 휘감아주고 서쪽으로 빠지는데 동출서류형으로서 동출서류형의 한강과 서출 동류형의 청계천이 만나 결과적으로 한양 성내의 홍수를 미연에 방지 해준다는점이었다



더구나 한강주변의 풍부한 수량은 주변 농경지를 살찌게 할것이며 해상수송과 여주이천등지와 연결되는내륙수로와의 요충지로서 군사적방어에 큰 몫을 한다고 생각하였다.

어쨋든 태종이 명당조건과 지리적 여건이 월등이 났다고 주장함으로서 천도를 반대하는 중신들보다 압도하는 지론을 가고 있었으나 조준,성석린등의 중신들은 강력히 천도를 반대 하였다
태조때부터 한양으로 천도를 주장해왔던 남양군 홍길문과 하륜은 태종으로서는 큰 힘이 되었지만 중신들은 한사코 반대 하였다.
그래서 태종은 2 년간이라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예나 지금이나 한나라의 수도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것은 보통문제가 아니었다.
개경에서의 한양 환도 계획은 수차의 어전 회의를 가젔으나 너무나 완강하였다.
"그러면 개경도 서울로 하고 한양도 서울로 하면 어떻습니까?..."
성석린이 궁여지책으로 소위 한나라에 두개의 수도를 갖자는 수정안 까지 내어 놓았다.
이소식을 들은 태조가 발끈 했다.
"아니 한나라의 서울이 한양이면 한양이지 서울이 둘이라니....그러면 임금도 두명 둔다는 말이냐?...."
결국 이안은 태조의 분노로 묵살되었다

태종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안되겠소,여러대신들과 과인 종묘에나가 과인이 분향하고 조상께
천도여부를 물을것이니 과인의 뜻에 따르시오...."
"어떤 방식으로 하시려는지..."



"옛부터 어려운 결론이 나지않을때는 종묘사직에 고하고 조상으로 부터 해답을 받는 예가 있었소. 우선 종묘에나가 중신 여러분과 같이 분향하고 그 자리에서 천도에 대한 길흉 화복 점을 친다음 정하도록 하겠소 "
소위 옛부터 전해오는 척전법(擲錢法)이라는 점괘로 결정짓는 결정법이었다.
태종은 그길로 여러중신들과 같이 종묘에 나가 배례하고 완산군 이천우,좌의정 조준,대사헌 김희선,지신사 박석명,사간 조휴만을 차출하여 종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위패앞에서 태종이 배례후
"소반과 동전을 가저오거라"
하고 시종에게 명령하여 소반과 동전 한개를 갖다 놓게 하였다.
태종은 완산군 이천우에게 명하여 동전을 소반위에 던지게 하였다
동전을 세번던저 동전 앞면이 나오는 수에따라 그 경우에는 한양천도
뒷면은 개경으로 하기로 하였다



동전을 던진 결과는 개경정도는 2흉(凶)1길(吉), 한양천도는 2길(吉) 1흉(凶)이었다
태종의 의지대로 한양환도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점으로 팽팽한 의견을 결정한것이었다.
태종 즉위후 무려 5 년이나 끌던 한양천도 계획이 동전 하나의점괘로 해결된것이었다.말도 많던 천도 차반론은 점괘에 나타난 신(神)의 위력(?)앞에 모두 입을 다물고 말았다



1405년 10월 8일



태종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하여 명당중의 명당인 한양으로 6년 7개월만에 환도 한것이다.
이는 이나라의 심장부인 수도가 이룩되는 역사적 순간이기도 했다

태종은 서울을 한양으로 정하고 난 다음 부터 새로운 정책을 내놓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군비를 강화 하여 병력을 29만 3600명으로 정하고 함경도 경성과 청주를 거점으로 하여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태종은 우선 한양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인 지형 인점을 감안 배수로에 신경을 쓰지않을수 없었다.
더구나 한양 환도 이후 인구가 급등 하자 생활 하수가 청계천으로 흘러들어 청계천을 개수 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태종은 1411년 개천 도감이라는 관청을 만들고 한양 가운데로 흐르는 청계천을 관리 하도록 하였다.
청계천은 태종이래 임금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 중국이 황하를 잘다스려야 나라가 융성 했듯이 조선 이라는 나라는 역대 왕들이 청계천 개보수에 관심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태종은 군사들을 동원 광화문에서 부터 창덕궁 까지 큰 길을 만들고 길가에 민가 앞쪽 맞은쪽에 8백여 칸의 방이 붙어 있는 행랑도 지었다.
태종은 4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두었다
맏 아들인 이제 (양녕 대군)를 세자로 세워 두었다 .



그러면서도 태종은 왕자들 중 가장 총명 하고 영특한 셋째 왕자인 이도(충녕대군)를 더 마음에두었다.
충녕대군은 마음이 넓은 도량과 모나지 않는 마음을 가진 아들 이었다.
누구에게나 공손 할 뿐만 아니라 외모도 항상 뛰어 났다.
맏 아들인 양녕은 이러한 상황을 누구 보다도 잘알고 있었다.
양녕 대군은 골육 상쟁의 싸움을 누구 보다도 잘알고 있어 구태어 형제간의 갈등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부러 세자로서의 몸가짐을 함부로 하였다. 괴상한 행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공부도 별안간 소흘히 하기도 하였다.
그를 가르치던 이래라는 선생도 양녕 대군의 행동에 당황 하였다.



나라 안팍으로 양녕에 대한 비평이 높아 갔다.
(세자가 약간 돌았다)
(임금이 세자를 폐할것이다)
여러가지 소문이 돌았다.
두째아들 효령대군이 이 눈치도 모르고 세자 자리를 자기에게 줄줄알고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 세자 자리 자기에게 돌아 오리라 마음먹었다.

어느날 효령대군이 형 양녕을 만났다. 효령은 양녕의 눈치를 살피었다.
겉 행색은 거지 모양으로 지저분 했으나 양녕과 눈이 마주치자 소름이끼치었다.



양녕대군은 미치광이가 아니었다. 빛나는 눈초리에 효령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형은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하고있구나....)
효령은 그제야 양녕 대군의 뜻을 알아 채리고 세자 될것을 단념하였다.
때 마쳐 막내 아들인 성녕 대군도 뒤늦은 홍역으로 20살에 죽었다.

태종은 황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의정 한상경과 영돈녕 류정현을 내세워 3째 아들인 충녕 대군을 세자로 바꿀것을 건의케 하여 충녕을 세자로 발표하였다
효령은 머리를 깎고 스님이되었고 양녕은 계속 이상한 짓을 다니었다.

드디어 조선의꽃인 세종 시대가 온것이다.
세종은 자기 조상이 무(武)를 너무 숭상한 반면 문(文)을 숭상한 임금이었다. 그의 밑에는 빼어난 학자들이 줄을 이었다.
뒤에 한글을 만든 것도 그의 위대한 업적의 하나였다.
충녕 대군이 세자가 된뒤 51세로 왕의 자리를 내주었다. 그는 상왕으로 물러나 앉아서도 군사권을 쥐고 충녕의 뒤를 살피었다.

태종은 1422년 5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재위18년 ,상왕 재위 4년 ,56세였다.
세종은 조선의 북쪽 땅을 넓히어 6진과 4군을 개척 하였으니 지금의 압록강과 두만강 경계가 이때 이루어 지었다. 국토를 넓히고 백성을 보호하며 민족의 영광인 한글을 만들었다.



1446년 세종 28년 9월 훈민정음이 반포 된것이다.
1450년 2월 17일 이나라의 큰별 세종은 재위32년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태평 성대의 정치는 어느 누구도 따르지 못할 대업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