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

by hyounglee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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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를 돌아다니다가 등대를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면서 한편으로 감상적인 느낌을 갖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찾아가곤 하는 Pigeon Point 의 등대는 나에게 특별한 느낌을 준다.


주변의 풍경과 함께 녹슨 물이 흘러내린 등대는 오늘보다는 지난날을 느끼게 해 준다.


이 등대에 갈 때면 대부분 흐린 날이거나 늦은 오후이어서 인지 마음이 가라 앉고 감상에 젖게 되면서


오래 전 학교 다닐 때 즐겨 들었던 박 인희가 낭송한 박 인환 시인의 '얼굴' 과 '목마와 숙녀' 가 생각 나곤


한다.


그 중에서도 "... 등대 ..." 라는 구절은 촉촉하게 마음을 적신다.


등대 앞에 서서 다시 그 시를 마음 속으로 읖조려 본다.


 


              얼굴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기를 꽂고 산들 무얼 하나


꽃이 내가 아니듯


내가 꽃이 될 수 없는 지금


물 빛 몸매를 감은


한 마리 외로운 학으로 산들 무얼 하나


 


사랑하기 이전부터


기다림을 배워버린 습성으로 인해


온 밤 내 비가 내리고


이젠 내 얼굴에도 강물이 흐르는 데


가슴에 돌 단을 쌓고


손 흔들던 기억보다 간절한 것은


보고 싶다는 단 한 마디


 


먼지 나는 골목을 돌아서다가


언뜻 만나서 스쳐간 바람처럼


쉽게 헤어져버린 얼굴이 아닌 다음에야


신기루의 이야기도 아니고


하늘을 돌아 떨어진 병의 이야기도 아니고


우리 모두 잊혀진 얼굴들처럼 모르고 살아가는


남이 되기 싫은 까닭이다.


 


          목마와 숙녀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 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볍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람의 사랑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 보아야 한다.


 


등대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던 죽던


그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