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 이야기(3)-두문동72인-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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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는 무학 대사와 정도전, 하륜을 불러 들였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게 한것은 아직까지 고려 왕조를 잊지 못하고 반대 세력 들이 많은 이 곳에서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것은 불가능 하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왕이 왕으로서 대접 받기에는 이곳 개경이 불가능하니 반드시 다른 곳으로 천도하여 백성들이 따르도록 하여야 하겠소"
세사람은 이성계가 이렇게 나올줄 벌써 예상 하고 있었던 터라
"전하 옳은 말씀이옵니다, 한 나라의 수도를 옮긴다는것은 그리 쉽지않사오나 제반 여건으로 보아 수도 이전만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서도
시급히 서둘러야 함이 옳은줄로 아옵니다"
정도전이 맞장구를 첬다
"신의 생각으로는 좋은곳이 있기는 있사옵니다만 "
무학대사가 말을 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
"그게 어디오 , 대사?"
이성계가 무학 대사를 바라 보며 다그쳤다
"좀 남쪽으로 치우쳐서......"
"말씀 해보시오 대사..."
이성계는 더욱 더 궁금하였다
"실은 도참설에 의하면 산천의 모양이 나라의 운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듯이 충청도 계룡땅에 아주 적합한 땅이 있기는 있사옵니다 "
"계룡이라면 저도 책에서 보았습니다만 신도읍지로 적합하다는 말이 있기는 있사옵니다"
정도전이 거들었다
"계룡이라면 과인도 왜구를 치러 전라도로 가다가 자나친적이 있소
산이 험하지요"
이성계의 말을 받아 무학대사가
"전하, 계룡은 소승이 자주 들린 곳입니다 . 계룡산을 멀리 보면 산 모습이 제(帝)자형으로 임금을 상징하는 한자형 산으로 자세히보면 상제봉을 가운데로 하여 좌측으로는 금계산(金鷄山) 이 있어 좌청룡을 이루고 우측으로는 일용산(日龍山)이 우백호를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상제봉을 모시는 좌청룡 우백호의 이름을 따 계룡산 이라 하옵니다 .

그 밑에는 야산이 둘 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동쪽 산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이고 서쪽 야산이 일용농주(日龍弄珠)형이라 하옵니다
"
"그래요? 과인이 장수 시절 여러번 그쪽을 지나치긴 했지만 그런 산세 인줄 몰랐지요 ...한번 답사할 채비를 갖추시오 "
이성계는 계룡산이 남쪽으로 치우처 좀 꺼림직하긴 했으나 두문동 에 들어가 두문 불출하는 고려 유신들이나 개경 백성들이 자기를 멸시하는듯한 태도를 생각 하면 차라리 충청도 먼곳으로 떠나 있고 싶었다
이성계는 개성이 바늘방석이나 마찬가지였다.그는 구 고려 세력을 감쌓안기위하여 교서에 까지 나라이름을 그대로 고려라하고 모든 제도도 고려의것을 계승하겠노라 했고 고려 왕족들도 우대한다고 까지 해보았다
하지만 고려 유신들은 이성계를 왕으로 인정않고 궁성에 얼씬도 하지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성계와 무학대사는 정도전과 하륜에게 은밀히 왕의 출타를 비밀히 하여 개경 경비를 삼엄히하라 지시하고 몰래 계룡산 답사에 나섰다

이성계는 권중화를 불러 계룡산 지형도를 작성 해오라 지시했다
과연 무학대사 말대로 계룡산은 주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15개 봉우리와 7개 계곡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지형을 갖고 있었다 .
흠이라면 너무 남쪽에 치우쳐있고 큰강이 없는데다가 바다가 멀어 개성과 같이 중국이나 일본과 교류하기에는 부적합하긴 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풍수지리설에 쏙 빠저 있었다 이성계는 인근 유성 온천에서 5일간을 머무르면서 계룡산 일대를 여러번 말을 타고 답사하였다
"대사 ,이곳에 와보니 글자 그대로 금닭이 알을 품은 형국이구료 ,"
하고 이성계가 감탄 하자
"닭머리 형상의 산 릉은 곧 으뜸을 나타내는것이옵니다, 이곳이야 말로 풍수지리설이나 도참설에 나오는 제일의 명당입니다 .산과 물이 태극을 이루는데 중앙의 산 태극과 수태극은 천하의 대길지입니다"
하고 무학대사가 극찬을 하자 이성계는 아주 이말에 도취해 있었다

결국 개성으로 5 일만에 돌아온 이성계는 풍수지리설 대로 계룡산 밑에다 신도안 이라는 지명을 내리고 궁성 축조를 시작 하라 지시 했다
지긋 지긋한 고려 유신들 꼴도 보기싫었던 이성계는 만면의 미소가 흘렀다

이성계는 개성을 떠날것을 기정 사실화 하자 두문동 72인들의 고려 선비 유신들과 무신 48명에 대하여 다시 한번 여러모로 자기에게 협조 할것을 요구 하였으나 그러나 끝내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으나 꾹 참으며 어마 어마한 궁리를 생각해 냈다
이튿날 두문동 주변에 볏짚들을 모아 동네를 둘러치었다
그리고 중간 중간 빠저 나올수 있게 칸을 비워 두었다 .
그리고 불을 질렀다
두문동 전체가 화염에 쌓였다
이성계는 만면의 미소를 띄우고
<이래도 두문동을 빠저 나오지않겠나? 저희들이 아무리 고려의 충신들이라도......>
그러나 이성계의 속셈은 빗나갔다
120명의 두문동 고려 충신 들은 끝내 한 사람도 튀어 나오는 사람이없었다. 모두 충절을 지키기 위해 불타 죽은것다고 얘기가 전한다 .
이 이야기는 전해 내려 오는 얘기에 불과 하지만 그만 큼 고려 유신들의 저항이 심했었다는 얘기 였을 것이다

어쨋든 이성계는 수시로 계룡산 신도안에 짓고 있는 궁궐 기초작업의 진행 상황을 매일 확인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