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과 온양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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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0578917.jpg얼마전 오래간만에 고향 방문을 한 일이있었다.
고향에도 어김 없이 불어 닥친 아파트 붐으로 우후 죽순 처럼 솟은 상가 건물이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들어선 아파트단지가 쌍벽을 이루어 개성을 잃어버린 회색도시로 변화 있었던 것이다 .
어릴 때 본 99 칸이라고 일컫는 전통 조선 가옥들 이 6.25이전 까지도만 해도 좀 있었으나 지금은 씻은 듯이 보이지 않고 6.25 이후 급조된 낡은 주택이 그대오 남아 있는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다가구 주택들과 연립 주택들 만이 무질서하게 건립 되어 있었다.
그 많던 유기 공장도 눈을 씻고서도 찾을 수가 없다 .
어디를 가도 천편 일률적인 상가와 무수한 간판 들을 보고 지나치다보면 그도시 도시 마다의 특색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이곳 아산 지방에 정착 한지도 몇해 되고 보니 처음에는 여느 도시와 무엇이 다르랴 하고 무심코 지냈던 날들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온양"에 가끔 들리거나 가 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산"이라면 잘 모르지만 " 온양 온천"이라면 알아 듣는다.그래서 기차 역명도 온양 온천역이다 . 온양이라는 곳에 대한 온천 이라는 이메지가 너무 강한 탓이리라 .
아산에 온천이 유명 한것은 세상이 다 아는 것이니 더 할말은 없다 .다만 아산이라는 곳은 온천만 있지 않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어서 이다

아산은 온천 말고도 또 한가지 손 꼽으라면 이순신 장군의 생가가 있고 그의 묘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에는 현충사가 지어서 있는데 관리 상태가 전국에서 손 꼽으라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관리상태가 양호하여 사시 사철 변하는 경내의 조경은 가히 일품이다

이 두가지 를 빼고 ,아산 이라는 곳은 우리가 그냥 지나처서는 않될 여러 가지 또 다른 얼굴이 있으니 그것은 옛 가옥 모습이 고히 간직 한채로 남아있는 고택(古宅)들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맹사성 고택을 예를 들자면 .맹사성은 흔히 고불(古佛) 이라고 호가 알려진 맹정승으로 이름나있는 인물이다 전설에는 고려말 충신인 최영 장군이 살다가 이웃에 살던 맹사성 이란 사람의 인물 됨됨이 예사롭지 않아 자기 손자 사위로 삼은 뒤 그 집을 그에게 물려 주었다는 전설이 있는 고택이 그것이다.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민가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아산시 배방면 중리 설화산 북쪽 골짜기에 있는데 좁은 골목을 들어 가니 오래된 전통 가옥이 나온다 , 집은 과히 크지않아 보존 상태는 그리 좋은것은 아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로 보였다 .은행나무 하나가 일품일뿐...오래 묵은 은행나무가 있어 행단 고택(杏壇古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건물에 사람이 살고 있어 좀 어수선 한감이 들었다 .당국이 관리 않고 개인이 관리하는 탓인지 좀 어수선 했다.

이집에서 다시 온양 시내 쪽으로 가다가 공주 쪽으로 방향을 돌려 조금 가다 보면 외암 민속 마을 이란 간판이 보이고 인터첸지를 돌아 들어 가면 넓은 주차장이 보인다 .눈을 들어 눈에 확 들어 오는 산을 바라보니 옹기종기 옛마을 모습이 들어 온다 .
소위 외암 민속 마을 이라는 곳이다 .
마을 입구에 돌 다리가 놓여 있는 데 외부 차량 통행 금지이다.우선 마을 전경을 바라 보니 뒤에 설화산을 배경으로 기와집 초가집이 옹기 종기 모여 있어 과연 민속 냄새가 물씬 나는 마을 답다
아파트 , 연립주택 , 다가구 주택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 물론 공장 같은 건물은 이곳에 구경 할래야 구경 할수도 없다 .

얼마전 겨울에 공주에 볼 일이 있어 갔다 오다가 멀찍암치 차안에서 하이얗게 눈덮인 동네 전경을 본일이있었다 .
전국 어디를 가나 아파트 숲 만을 바라 보다가 이 외암 마을의 설경을 보고 금새 마음이 확 트이는같았다 . 글재주가 별로 없어 글로는 표현하기어려우나 대충 표현 하자면 마을 입구에 큰 느티나무가 있고 바로 앞에 큰 초가집이 시야에 들어오고 그뒤에 조선 기와집들이 나란히 보인다

입구에 들어서니 안내문이 나와 있다 .이곳은 조선 시대 이루어진 마을로 충청도 지방의 고유한 격식의 반가의 고택과 초가집, 집집마다 둘러쳐진 돌담 , 다른곳에서 볼수 없는 정원등이 있다는 설명이 있고 외암리이 내력이 기재 되어있다
조선 숙종때 이 마을에서 태어나 충청도사를 역임했고 1707 년도 경에 이 외암 마을 앞을 흐르는 강당골 계곡 중간에 있는 관선제라는 건물에서 유학을 강론 하였다는 외암 이간 이라는 분의 설명이있다.

마을 입구를 들어 서니 그 보기 흔한 아스팔트 길이며 콩크리트 길을 구경할수 없다 ,보도 블럭도 없다 .다만 초가집 기와집 할것 없이 늘어선 돌담만 시야에 들어온다 .꼭 제주도 민가에 돌 담길을 걷고 있다는 착각을 할정도이다.그렇게 모든 집이 돌로만 둘려 쌓여 있다.
어디서 이 많은 돌이 났을까? 제주도에 갔었을 때는 섬 자체가 화신 폭발로 암반 만으로 이루어진 섬이니 당연히 돌이 많은 섬이라고 단정지을수 있지만 이곳 아산이란 곳은 모두가 어디를 보나 저수지와 논밭이었고 이렇게 돌담집을 본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외암리를 나오다가 길옆에 설화상에서 내려오는 개천에 지천으로 깔린 돌이 그 이유일것라는 의문은 풀렸지만 어쨋든 이마을의 돌담길은 제주도에서 보던 돌담 못지 않게 새롭다 .
서울의 덕수궁 돌담 길과는 판이하게 자연석을 씨멘트 하나 없이 차곡 차곡 싸아 놓은 돌담 길이니 그 길을 걸어본 사람아니고는 그 운치를 모르리라.
외암리 안내 설명서에는 그 돌담길이 5,300 미터나 된다고 하니 아무렇게나 생긴 막돌을 쌓은 돌담길을 생각해보라

초가집 옆에는 물레 방아가 군데 군데 보인다 .얼마전 까지 만해도 전국 마을 어구에는 다 찌글어진 방앗간이 볼품 없게 있었다 . 그러나 이곳에는 물레 방아간 이외에는 방앗간이 없다.이 외암 마을은 뒤에 서있는 설화산과 거리도 멀다 .아마 설화산과 마을이 십리 정도는 떨어진 구릉지대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마을 가운데는 도랑 물이 맑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떻게 마을 한가운데 곳곳에 도랑 물이 흘러갈수 있을까?

역시 도랑물은 설화산에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이 모두 마을 중간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물레방아 물도 이 도랑 물 탓이다 .
그동안 우리는 초가집을 보려면 용인 민속마을로 비싼 입장료를 물고 들어가 구경하는것이 우리의 향수를 달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그러나 이마을은 입장료가 없다 . 주차장도 넓다.또 사람들 복장이야 현대복장이 좀 흠이기는 하지만 각 건물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것이 용인 민속 마을과 다르다

용인 민속 마을이야 급조된 민속 마을 이지만 이곳은 자연 발생적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쉬고있는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기도 하다 .
물레방아, 초가집,기와집이 뒤 어울려진 시골 마을의 설경,따뜻한 마을 인심이 풍기는 초가집,돌담, 싸릿문 ,연자방아,마을 입구에 늘어선 장승, 이런것들이 우리네 옛조상의 서민의 숨결이었다면 이곳에는 조선시대를 지배 했던 양반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중간 중간 마다 지어놓은 기와집들이다.참판댁, 병사댁, 감찰댁, 교수댁, 참봉댁 ,종손댁, 송화댁, 영암댁 , 신창댁 등 안내문을 따라 기와집을 찾노라면 또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양반들이 모여 살았다는 종로 안국동 고가(古家)가 있는 거리를 걷고 있다는 착각이 들정도이다 .
돌담 넘어로 이들 가옥의 정원을 훔쳐(?)보니 정원을 잘도 꾸며 놓았다 .넓직한 정원에는 연못이있고 못 가운데는 정자가 지워저 있어 거기에 노송이어울어저 일품이다.

참판댁이라는 집은 규장각 직학사와 참판을 지냈다는 퇴호 이정열의 집인데 잘 보존 되어 있다 .큰 대문 과 안채의 고가는 옛 양반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수백채의 초가집과 기와집을 모두 보려면 너댓 시간을 소모한다 .마을 입구에 있는 설명서에 의하면 당초에는 강씨와 목씨의 집성 촌이었으나 조선 명종시대 벼슬을 하고 있다가 당파 싸움에 실망 낙향한 예안 이씨 이정이 자리를 잡아 그 후손들이 번창 하였다고 기록 하고 있다 .

어쨋든 이마을은 뒤에는 설화산,앞에는 강당골 개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한국의 옛 마을로 그대로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곳이다 .풍수 지리설과 이마을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들어 보지 않아 모르지만 이곳도 그러한 설에 예외 일수는 아닌것 같다.
영암댁 ,감찰댁등, 반가들과 50여채의 초가집등은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어 우리에게는 귀중한 존재이다 ,함부로 집을 뜯어 고치지 못한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 살고있는 주민들의 긍지도 높이 살만하다.
우려되는것은 이곳도 점점 밀려드는 아파트숲의 유혹을 어떻게 막아내느냐에있다 .물론 당국에서 보존 책으로 유지비를 대준다고 하지만 얼마안되는 모양이다. 정부 차원의 대책이 더 중요할것 같다

양반 집이라하면 조선시대의 상류 사회의 주택을 말하지만 이런 집을 보기란 슆지 않다 우리는 곳곳에 사라저가는 옛 조상들이 단절되어가고 있는모습에 당황하지않을 수없다 .넓은 마당, 전통적 정원, 등이 그예이다.

고택(古宅)이라면 흔히 추사 고택을 일컫는다 .추사 김정호의 옛집이다.이곳은 아산은 아니고 예산 땅이기는 하나 아산에서는 지척지간이다 .
추사 고택은 집 규모로 보아서는 너무 잘 알려저 있다 .현재 까지 남아있는 외암마을 양반집들에 비하면 규모가 별로 크지않지만 더 알려저 있는것은 무슨 까닭일까? 추사고택은 당국에서 했는지모르지만 주변 조경을 깔끔히 놓은 탓이리라 .
추사고택은 김정호의 이름도 있겠지만 건물을 당국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는듯하다 .건물 관리도 잘되어 있어 고택 치고는 깨끗하나 덩그러니 집한채 뿐이니 구경거리가 너무 단순하다는것이 흠이다
어쨋든 외암마을의 고택은 볼거리도 많거니와 충분히 하루를 소일할만 하다

고택(古宅)얘기가 나왔으니 아산시 둔포면에 있는 전 윤보선 대통령의 생가를 그냥 지나칠수 없다 .
추사 고택에서 짧은 구경을 마치고 지도상에 나타나 있는 해위(海葦)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가 있다는 둔포로 향하였다 .예산에서 아산시 쪽으로 향하여 가다가 평택 쪽으로 차를 몰았다 . 둔포는 아산만에 위치하는 지역으로 경기도와 접해 있다 .
벌판 길을 접어 들었으나 외암리나 추사 고택경우에는 큰 안내판이 보였으나 윤보선 전 대통령 생가의 안내판은 전혀 안 보인다 .
길가는 촌로(村老)에게 물어 보니 한참 말문을 열지 않고 빤히 처다가
"윤대통령 생가를 찾습니까?"
촌로는 옛 대통령의 생가를 왜 찾느냐는 투였다
"길을 잘 몰라서요"
얼버무리자 그는 잘못 왔다고 하면서 뒤를 돌아서 오던 길을 돌아 가다가 잘 모르면 행인에게 다시 물어 보라고 하며 어디론가 바쁜걸음으로 사라진다. 관심도 없다는 듯이...
대통령이라면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 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촌로의 행동을 보니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수가 없다 .하기야 해위(海葦)윤보선 대통령은 당시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로 실권은 장면 총리가 쥐고 있던 시절의 대통령이었으니 그후의 막강했던 던 대통령 권한과 비교보면서 당시의 정치 구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더니 윤보선 전 대통령의 이야기도 우리의 역사에서 멀어저 가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없다. 해위(海葦)윤보선 전 대통령의 의 옛 집을 찾는것이 힘든것은 길 안내판을 찾을수 없다는데 있다 .아직도 해위는 이세상 사람이 아니면서도 그는 정치인들의 영향력의 범주를 아직도 맴돌고 있기 때문에 조심성있는 당국의 무관심(?)탓이 아닌가도 생각하게 된다.

가진 고생 끝에 해위의 고택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집으로 가려고 차를 돌렸는데 공교롭게도 큰 간판이 눈앞에 나타났다 .
"윤보선 전 대통령생가"유일하게 4차선 국도에 이정표가 눈에 들어온다
이정표대로 가는 길을 차다보니 2 차선이아닌 1차선 좁은 길이 나타난다 . 좁은 도로다 .대통령 쯤 했었으면 생가 진입로 쯤은 탄탄 대로로 넓혀저 있을것이라고 상상했었으나 예상 밖이었다 초라한 진입로 ...보잘것 없는 마을 ...높은 산도 없고 앞의 내도 안보인다 .주변 산들은 낮고 완만한 구릉지 일뿐 거창한 풍수 지리설은 내세울것이 없는 평범한 마을이었다
마을은 북쪽 아산만 쪽으로 넓은 평야가 펼처저 있다.
평야가 넓은것을 보니 비옥한 농토에서 쌀 생산은 많아 풍족한 생활은 했을것 같다.
꼬불 꼬불 좁은길을 차를 몰고 들어가니 작은 보잘 것 없는 동네가 나오고 길이 갈린다 .어느쪽으로 가야 하는지 이정표도 없다 . 뒤차가 빨리 가라고 빵빵거린다 .문득 바른 쪽을 보니 들어온길 보다도 더 좁은 차가 한대 지나가야 할지 말지 모를 길이 시야에 들어 오고 멀리 도로 끝을 보니 조선식 건물에 큰 대문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런곳에 저런 건물이있다는것은 필히 해위의 고택이 분명하겠다)생각하고 그쪽으로 무턱대고 차를 몰았다

길이 막히고 큰 조선 건물의 가옥이 앞을 가로 막는다
"여기가 맞을것 같네..."
아내가 짐작으로 내리라는 시늉이다 .내려 보니 작은 안내판이 있다 ..
"충청남도 민속자료 15호 ,소재지 ;아산시둔포면 신항리,건물소 3동, "
등이 기록 되어 있다
해위의 생가는 첫 인상 부터 개수 흔적이 전혀 없이 낡아 있었다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농기구며 몇년이 묵었는지 집을 고친 흔적은 전혀 없다 .대문이 활짝 열리려 있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또 다른 대문하나가 또 가로 막는다 .이른바 솟을 대문이라는 것이다.첫 대문에 붙은 건물에는 사랑채 인것 같은데 방이3 개나 있고 다음 중문을 지나니 중문에 붙어 있는 방 인듯한 것이 4개가 있다 .
중문에서는 안채가 잘 안보이도록 해 놓았다
안 마당으로 들어서니 대청 마루가 있고 오른쪽에 방이 하나 있고 왼쪽으로 방이 두개가 있다,안방앞에 부엌이 있다.왼쪽에는 4칸짜리 집이 별채로 붙어 있다.말하자면 이집은 3 개의 계층 구조로 되어 있다 . 대문채, 중문채, 안채, 가있다.
동쪽에는 담이 허물어저 있고 건물과 어울리지 않게 돼지를사육했었는지 돼지우리가 10칸정도 있었는데 돼지는 키우지않고 있었다
집주위에는 잡초를 뽑지 않아 풀이 여기저기 자라고 집은 수리 하지 않아 곳곳에 무너진 흔적이 사람사는 집같지 않다 .

보통 큰집이 아니다.해위는 서울 종로 안국동에 있는 99 칸짜리집에서 주로 자랐다고 한다 , 왜정시대 영국에 유학하여 에딘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있다가 귀국해서는 1948년 제4대 서울시장,상공장관, 대한 적십자 총재,3,4,5대 국회원을 거쳐 1960년 내각 책임제에 제 4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그는 신민당 총재로 있다가 1990년 서거했다
그렇다면 해위가 태어 났다는 이 집에서는 얼마나 살았는가?
인근 촌로에게 물어보니
10살 까지 이집에서 살았다 한다 .

이집은 2개의 대 문을 통과 해야 한다. 이런 시골에 대문이 두개씩이나 되는 집이있었다니....우리 나라의 반가의 특징은 대문이 여러개 있는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라 할수 있다 .고택에 흔히 발견되는 대문이 우리에게는 어떤 뜻이있을까?
방랑 시인 김삿갓이 열두 대문을 두드리며 주인을 찾는다는 가사는 좀 과장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대문 안과 대문 밖을 갈라놓고 우리의 민속의 뒤안길을 더듬어 본다면 우리 생활속에 그동안 젖어 있는 불교문화를 생각하지않을수 없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바 세계, 즉 티끌 세상 이라면 대문안은 고결한 공간이라는 구도이다.밖에서 대문을 통과 한다는것은 티끌에 묻은 먼지를 털고 고결한 지역으로 들어 간다는 의미가 될것이다 .

우리가 명산 대찰에 가끔 들릴때 마다 느끼는 것은 보통문을 지나 사천왕문을 통과하고 다음 불이문, 금강문,등 차례로 여러문을 통하여야 고결한 대웅전에 들어갈수 있다.
인간세계의 속세를 떠나 고결한 지역으로 들어간다는 뜻일것이다.
임금이 사는 대궐도 마찬가지다 구중 궁궐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말은 임금이 있는 9개의 문을 통과 한다는 말이니 불교 문화권이었던 우리도 문이란 속세와 고결한 내부와의 통과 의례로 보아도 무난할것이다.하기야 6.25사변후에 사회가 혼란할때는 대문이란 도둑을 방어의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었고 지금도 아파트 문은 경계의 대상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해위가 살던 시절만해도 문이란 상징적 존재면에서 볼때 지금과 같은 단순한 도둑 경계용 만은 아닐것이다

아무튼 해위의 고택은 일반 가정과 다르게 바깥 행랑채,큰 사랑채, 뜰 아래채, 곳간, 문간채, 안채, 작은 사랑채 갖출것은 모두 갖춘채로 있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돼지 우리간, 잡초 쓰러질듯한 기둥등 대조적으로 쌍벽을 이룬고 있는것은 무슨 까닭일까?

우리가 마당을 기웃거릴때 안방에서 70대 여자한사람이 나왔다 .
우리는 이렇게 다허물어지는 집에 사람이살던가 하는 의아심을 갖고 질문을 던젔다
"이곳 관리인이 신가요?"
하고 묻자 그 늙은여자는 우리를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뉘신가요?"
하고 반문한다
"아 이곳이 전 대통령생가라고 하기에 관광차 왔습니다"
"그러세요? 구경하고 가세요"
하고 퉁명스럽게 답변한다
"그런데 주변 이모두 허물어저 볼상사납습니다"
하고 말을 던지니 그 노파는
"글쎄 말이요 ,지금 내라도 들어와 사니까 집이 묺어지지 않지 빈집으로 두면 다 묺어저요, 어느날 갑자기 윤보선 대통령 생가라고 하면서 관청에서 나와 주요 민속 자료 196호라고 표지판 만 꽂아 놓고 가더니 그만이에요"
"그럼 당국에서 보수도 해주지않습니까?"
"웬걸요, 집주인이 서울 살아요. 건물주인이 해야지 당국에서 하겠습니까?"
"집주인이 돈이없으니까 그렇겠지요"
"웬걸요, 집주인 돈이많아요"
아무리 돈이 많아도 건물 보존 상태로 보아 집주인은 이집 보수에 관심이없는듯 했다 .우선 건물을 보수하여 관광객 끌어 들일 실익이 없는한 소유주인 개인이 보수하여 낡은 건물을 새건물 같이 관광객을 불려 드린다는 것은 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
그렇다고 당국에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인 재산을 보수하여 준다는것도 쉬운 문제가 아닐수 없을것이다 .

이것 저것 생각해 보아도 이런 귀중한 전통 가옥의 운명은 얼마 남지않을 것 같으니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수 없다 .정치인이었던 윤보선 전 대통령의 생가이기 때문에 아깝다는 얘기가 아니다,전통가옥들이 점점 우리시야에서 사라저가는 안타까움 때문이다. 전통 가옥이 이렇게 없어지고 그 자리에 점점 아파트 숲으로 변한다면 우리에게 남는것은 무엇일까?

요사이 청계천 복원 공사를 하면서 개천 뚝에 나타 나는 석축 하나 가지고도 문화재 훼손이니 뭐니 하면서 복원 공사의 진행을 문제 삼으면서 정작 조선 시대의 원형 그대로의 전형적 민속 가치가 있는 건물이 다 묺어저 가는데도 민속을 연구하는 학자 한사람도 올바른 소리하나 하는 사람이 없으니 아쉬움이 앞선다.

해위의 고택 동쪽을 바라 보니 해위의 집과 비슷한 기와집 군이 3군데나 지어저 있다 .해위의 집에 못지않은 기와집들이었다 촌로보고 물어보니 해위의 사촌 형제들의 집인데 그 집주인들도 모두 서울 살고 지금은 빈집들이란다 .

그집을 들어가 보기로 하였다
촌로가 쫓아오면서 설명을 해주는데 기억 나는대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기 윤씨들은 선조때 영의정을 지낸 오음(梧陰)윤두수의 후손들이다.해위에게는 10 대조인 셈이다 .윤두수는 임진 왜란시 의주 행재소로 선조가 왜군을 피해 있을 때 의주에 있지 않고 직접 일선에나가 평양 사수를 결의하고 결국 명군과 함께 왜군의 선봉장 소서행장의 기를 꺾어 놓은 장본인이다.
윤씨들이 크게 번성 한것은 해위의 할아버지 때이다 백부 윤응열은 법무대신이 었었고, 해위의 조부 윤영열은 안성군수와 육군 참장을 지냈다 한다 .백부 윤웅열은 3아들을 두었는데 윤치호,치왕, 치창이다,윤치호는 고종의 명을 받아 신사 유람단의 명으로 받아 개화에 눈을 떳고 미국 유학을 갖고 애국가 작사가로 알려저 있다.치왕은 영국에서 의학을 공부 해가지고와 세브란스 병원장을 했다 ,치창은 초대 주영공사를 지낸 외교관이다

해위의 조부인 윤영열은 여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다 .그중 두째가 윤치소 로 윤치소는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6남 3녀를 두었는데 해위는 그의 장남이었다 ,윤영열의 형 윤치오는 일본에 유학후 돌아와 대한제국 학무국장을 지냈다.윤보선은 나이가 들자 중국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해위(海葦)라는 아호는 그가 유학을 떠날때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였던 신규식 선생이 "바닷가 갈대는 바람에 날려도 꺾이지 않는다"뜻으로 지어 주었다고 한다 .6형제 들이 모두 외국 유학하여 돌아와 큰일들을 했지만 그중 막내인 윤치영은 윤보선의 막내동생으로 일본 와세다 대학 미국 조지아 대학을 나와 초대 내무장관 서울시장을 하였고 제3공화국 공화국 의장을 지낸 인물이다.

윤씨네 집안들이 모두 훌륳한 인물들을 배출하여 서울로 올라 가고 그들이살던 가옥들은 모두가 빈집으로 남아있다 .전통적 가옥이지만 보수를 하지않아 금방 귀신이라도 나올듯 허물어저 있으나 그래도 원형은 그대로 유지되어 있어 잘 보수하면 좋은 관광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이곳은 외암 마을이나. 추사 고택 못지 않은 민속 마을로 마을을 관광자원화할 가치가 있는 곳이다
이상하리 만치 동양권 사회에서는 특정지역에서 출생하여 조금만 출세 해도 생가를 들먹이는 풍조가 있다
더구나 정치인들의 출생지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데도 아직도 곳곳에 출생지 유적이 성역화 되고 있는 실정이다 .
그러나 해위 윤보선의 생가는 그의 생가라서 그가 태어났던 건물을 성역화 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의 민속 전통 냄새가 물씬나는 건물의 가치를 잘 보존하자는 얘기이다..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당국에서도 특정 정치인의 생가를 예산을 들여 보수 해야 할수 있는 것이냐 하는 편견과 의아심을 갖기에 앞서 전통 가옥을 이렇게 방치할수 있는가 하는 가치관을 재고 해 봐야 할때이다 .
걱정이 되는것은 이대로 방치 됐다가 그나마 이 소중한 문화재들이 허물어진후 이를 핑게로 아파트촌이라도 건립 한다면 우리의 옛 숨결은 과연 어떻게 될것이가는 생각하니 숨이 막혀 답답 해진다
사라저가는 우리의 전통 문화 과연 이대로 방치 해두어도 괞찬을까?
당국도 그렇고 건물 소유주들도 곰곰히 다시 생각 해볼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