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
옥양봉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산이다 . 옥양봉은 가야산 세봉우리중 한봉우리이다 .
가야산이있는 덕산면에는 면사무소도 있고 농협도 있고 음식점도 적지 않게있다. 덕산 면 소재지에서 가야산 옥양봉을 찾아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 들어 가야 한다
그만큼 깊은 심산 유곡 이라면 심산 유곡 이라 할수 있을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충남 가야산은 경상도에 있는 가야산과 이름은 같으나 다른산이다 .
덕산면에서 외길을 타고 올라 가다가 남연군 묘 갈림 길 까지 들어 가다 보면 한 마을이 하나 나타난다
상가리.....
동네 이름 치고는 희한한 이름이다 .알아 보니 상가리를 한자로 쓰면 상가리(象加里)로 쓰이는 모양이다 .보통 우리나라 시골 동네 이름이 윗동네는 상리(上里) 아랫 동네는 (下里)로 쓰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은 코끼리 상(象)자를 쓴다
가야산과 상가리의 연관성을 잠간 음미하니 그 뜻을 알만 하다. 경상도의 합천 해인사의 가야산의 가야나 충청도의 가야산의 가야나 쓰기는 일반인데 가야라는 말은 공통성이 있으니 왜 그런 지명이 나왔을까?
문헌에는 가야(伽倻)라는 말은 원래 인도의 싼스크리트어의 gaya를 음역 한것이라고한다 .뜻은 흰 코끼리란 뜻이란다 .
석가모니가 진리를 깨달은 곳이 부다가야(BUDHAGAYA)라고 부르는것도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있다고 한다
어쨋든 우리는 남연군묘 쪽을 바라 보며 가는수 밖에 없었다 .옥양봉 가는 길이 외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남연군묘의 조산(祖山)이라면 석문봉을 지칭 하는것 같은데 묘를 기준으로 정북을 바라 보면 옥양봉이 될 것 같다 . 남연군 묘자리에 서 바라 보면 첫눈에 옥양봉의 바위 산이 보이니 말이다 .산맥을 보면 남연군 묘는 석문봉에 속한다
하기야 묘 이전에 가야사라는 절도 옥양봉을 배경으로 지었을 것 같으니 어느 것이 맞는지는 알턱이 없다
좌우간 올 때 마다 느끼는것 이지만 가야산의 각 봉우리는 신비의 쌓인 산임에는 틀림없는 산이다 .
옥양봉은 가야산, 석문봉, 셋중에서는 가장 낮은 봉우리다. 그런데도 첫눈에는 제일 높아 보이는것은 왜 그럴까? 남연군 묘 쪽으로 가면 옥양봉을 오를수 없다 .
그쪽은 가야산쪽으로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우측으로 잠간 올라 가면 계곡이 나오고 소 주차장이 나온다 등산객을 위한 최후의 주차장인 모양이다 .이곳에 주차하고 송림 사이로 꽤 넓은 인도가 풀숲 사이로 올라가면 보신탕 집이있고 조금더 올라가면 좌측으로 갈라지는 도로가 나오는데 안내도가 붙어있다 .좌측길은 석문봉으로 가는 길이고 오던길을 직진하는 곳이 옥양봉 길이다
옥양봉 등산길은 넓직하게 닦아 놓아 석문봉 올라 갈때 같은 꼬불 꼬불한 길이아니다
석문봉 등산 길은 깊은 계곡에서 흘러 내리는 물을 보고 올라 가게 되어 있어서 땀을 개울 물에 닦아 가며 올라가는 재미와 졸 졸 흘러내리는 개울 물 소리에 힘드는줄 모른다
그러나 옥양봉 등산로는 개울이 안 보인다 .우측 계곡이있는 모양인데 물 흐르는 계곡물소리만 들리지 계곡을 찾을수 없다 .아마 옥양봉 능선 등산길이라 그런 모양이다
땀을 씻으며 애꿎은 물병의 물만 들이키고 등산을 강행하였다
얼마를 넓은 등산길을 완만하게 올라 가다가 갈림길이 나온다 .관음전 가는길과 등산길 갈림길이었다 .아내는 계곡물이 없는 능선길에 지치었는지 관음전만 보고 하산하자고 했다 .나도 재미 없는 무미 건조한 등산을 포기하기로 작정하고 관음전이나 보고 내려 오자고 방향을 바꾸었다
관음전
가야산 석문봉과 옥양봉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절이다 .이 일대가 한때는 가야사를 위시하여 크고 작은 절이 많아 절골이라는 이름이었고 상가리라는 이름도 절과 관계있는곳이니 관음전에 대한 큰 기대를 걸고 유명 사찰이나 보고 정상 도전은 포기할 심산으로 관음전으로 향하였다 .
도면상으로 보면 관음전 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하산 하여 갈림 길에서 다시 등산로로 올라 가야 정상에 도착 하도록 되어 있다 .정상가는 길 옆이라면 모르되 올라 갔다가 다시 내려와 다시 등산 한다는 부담 때문에 정상 도전을 포기한 면도 없지 않았다
관음전 가는 길은 여늬 절 올라 가듯이 쉬운 길이 아니 었다 .바윗 돌로 층계를 놓았는데 거의 70도 경사의 가파른 경사길이었다 .돌로만 길을 조심 조심 올라 보니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아래 마을이 보인다
"이렇게 절이 높고 길이 험 할줄 알았으면 차라리 정상 등산로로 갈것을....."
하고 혼자 후회 하며 다시 내려가 정상 도전을 할까 마음 먹었으나 그순간 관음전 건물이 바위산 밑에 나타났다 .
"아이고 이렇게 험한 데다 절을 지어 놓고 어쩌자는거야 .."
아내도 절이 시야에 나타 나니 안도 되는 모양이었다 .
관음전은 암자만도 못한 건물만 동그라니 지어저 있었다 . 바위 사이로 터를 닦아지었으니 여늬 절처럼 큰 자리를 차지할수도 없었을 것이다 .
관음전이라는 본당과 숙소가 옆에 있는데 스님인듯한 남자가 앉아 있는데 우리가 와서 웅성거려도 내다보지도 않는다 .
"여보, 다시 내려 갔다가 정상에 갈수 없을까?"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 가? 지금 우리 위치가 정상 가까이 온것 같은데...."
다시 내려 갈려 해도 걱정이다 .바위와 바위 사이로 내려가는 사찰 진입로가 엉망이기 때문이었다 .등산은 기어 오르는것 보다 내려 가는것이 더 어렵고 위험하다
"이절 뒤로 정상에 오르는 길이 없을까?"
아내가 알아 보려고 안에 스님인듯한 남자에게 등산길을 물으니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만 감고 대답이없다 .
참선 기도중인 모양이었다 .아니면 등산 오는 사람마다 길을 물어 보는것이 귀찮아서일른지모른다 .
절뒤는 깍아지른 절벽 바위이고 아래도 돌 로된 절벽이다 .지금 상태로는 정상 가는길이없고 하산길 밖에 없었다
"하산하지...."
하고 아래로 내려 갈려고 하자 아내가 난감한 모양이다 .
혹시나하여 눈만 감고있는 스님을 무시하고 숙소 뒷쪽을 돌아보니 조그마한 길이 보인다
"등산 길인지 뒤에 길있어요"
아내를 오라하여 그길로 앞장을 섰다
조금 가니 밑에서 정상으로 직접 올라가는 길과 맞 닿았다
"그러면 그렇지..."
아래를 내려다 보니 별로 험하지 않아 정상도 그러러니하고 정상으로의 도전을 하기러 하였다
조금 올라가니 그다음 부터는 바위와 밧줄이 얽어진 등산로가 나타난다 .
바위 등산로를 오르자니 나무가 없어 주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치좀봐"
아내는 바위기 미끄러운지 올라오는데 만 정신을 쏟았지 주위 경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
위에서 내려오던 등산객이 우리모습이 딱했던지 한마디던진다
"아니 왜 가야산에서 제일 험한 곳을 택하셨습니까?'
딱하다는 표정이다
"정상이 아직 멀었어요?"
아내는 험한 바위산 기어 오르는것을 빨리 벗어 나고 싶은지 정상 부터 찾는다
먼저 추월산에 갔을때도 그랬지만 바위산을 오른다는것은 전문 등산객이 아니면 힘들다 .그런데 올라 가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굴뚝 같으나 내려 가는것이 더 무섭다 ,아니 실제로 하산이 더 어렵다고한다
아래를 내려다 보니 그야말로 장관이다 천야 만야한 바위산에서 내려다 보는 덕산뜰 ...
그러나 그것만 바라 보고만 있을수 없다 .
아내가 아래 보지 못하는 공포증이 있는 모양인지 위로만 올라 가잔다 . 바위산은 길이없고 줄을 붓잡고 올라가는 길이 특징이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은것 같은데 정상은 안 나타난다. 위에서 내려오는 젊은이가 주의하라고 충고한다
정상으로 가차워 질수록 바위산은 계단은 구경할수 없고 밧줄과 미끄러운 길 밖에 없다
정상에 도착하니 식은땀이 쭉 등을 적셨다 . 등산 치고는 추월산 등산로 다음 최고로 힘든 난 코스를 올라 온것이다
아무튼 정상을 정복 했다는 것은 상쾌하다
산아래 보이는 전경....그렇게 상쾌 할줄이야....
산을 오르는 것은 어떤 면에서 인생 같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신(神)을 믿는다 .만일 신이나 하느님이 있다면 신은 이세상을 주사위 한개로 모든 일을 결정하게 놔 두지않는다고 생각한다 .등산 같이 땀과 신념과 공포가 어울려지는 노력 없이는 정상 정복이 불가능 한것 같이 ...
산에 오르는자는 정상에 오르면 시인이된다 . 드넓은 산 아래 펄쳐진 자연의 경이로움때문이다 .정상에 선자는 산 아래 펄쳐진 산맥과 구름과 태양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본다 마치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 보듯이 ....그리고 이세상의 모든것을 사랑의 눈으로 보도록 만든다 . 어떤이가 말하기를 산악인은 인자(仁者)라고 단언 했듯이 ....
저아래 남연군의묘를 내려다 보니 한 점 같이 보일까 말까 하다 .잠시 흥선 대원군을 생각 해 본다.그도 이곳에 묘를 쓰고자 할떼 이곳에 와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정치라는 진흙 구덩이에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손에 넣느냐라는 현대적인 정치감각적 욕심을 생각 해보았을까?
아니다 . 그는 어린 시절 그런 진흙 구덩이를 빠저 나온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한을 풀기위한 그의 집념이었었는지모른다 .
만일 정상적인 가정에서 삶을 살아 왔다면 그의 생애에 있어 하나도 개혁 , 둘도 개혁이라는 험한 세상을 살았을까? 대원군은 당색과 문벌을 초월한 인재 등용 ,탐관 오리의 숙청, 양반과 토호들의 면세 특권에 대한 세금 징수,양반에게도 병역 부과, 옷의 간소화,등 여러 폐단을 과감히 개혁은 했다 .
그러나 그러한 절대 권력은 무리한 왕권 권위 회복에 집착 , 무리한 재정 투자로 국가의 존망을 걸고 경복궁 중건이라는 도박을 획책 하다가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만들었다 . 차라리 경복궁 중건에 든 엄청난 비용을 군비를 강화 하고 백성들의 빈곤문제만이라도 해결 했더라면 나라가 나중에 일본에게 넘어가는 수치는 당하지 않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뿐인가 남연군묘 도굴 사건이후 대외적 위협과 난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외세들과 갈등이 나라의 운명을 위기에 빠지게 한것이다
한국가의 민중들의 삶은 정치하는 사람의 영향력에 많이 좌우된다 . 대원군은 그의 불우했던 시절을 개혁이라는 기치로 승화 시키려고 했는지모른다
결국은 나라는 외세에 밀려 나라의 운명이 일본에게 넘어 가게 했지만 한 정치가의 결단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가져 올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옥양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올라 왔던 길로 내려 간다는것은 위험 하다고 누군가 충고한다 ,우리는 하산로로 내려 가기로 하고 석문봉 하산로로 향하였다 .
하산로로 내려 가는 길도 그리만만치않았다 줄타고 내려 가는 길이 한 두곳 있기때문이었다 .처음 줄을 타고 뒷 걸음질로 내려오니 흙으로 된 오솔길이 나타난다
이 오솔길 따라 능선길을 정신 없이 내려 오다 보니 이 길은 아까 길과는 완전히 다른길이다 .흙으로 만 된 산길이기 때문이다. 옥양봉 돌길을 오르기 싫거나 무서워 못 오르는 길은 이 길인지 많은 여자 등산객들이 눈에 뜨인다 .
어느 산이고 몇개의 보조 길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무미 건조한 하산 길만 걸어서 등산의 묘밀 느낄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하며 나도 아마튜어 평범한 등산객일 뿐인데 건방진 생각이나 아닐까하고 순간 자신을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