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공 신익희 선생을 생각함

by 5443738 posted Jan 01,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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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희의 본관은 평산이고, 자는 여구이며 호는 해공()이다.


 그는 경기도 광주()에서 출생했다. 1908년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들어가 한국 유학생들과 학우회를 조직하고 총무 ·평의회장 ·회장 등을 역임, 기관지인 학지광()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학생운동을 하였다. 


 


1913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 고향에 동명강습소를 열었으며, 서울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17년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최린,송진우 등과 독립운동의 방향을 논의,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해외와의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19년 김시학등과 함께 독립 선언서를 작성하여 민중 봉기 할 것 등을 협의 한 후 국내 동지들의 특파로서 대내외적으로  독립 운동을 계획하던 상해 방면의 독립 운동 지사들과 연락하기 위해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이미 오래 전 부터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아 온 동제사라는 조직이 신시대, 신정세에 발 맞추어 활동 하는 신한 청년 당원들의 활동이 국내외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동녕·이시영·조완구·조동호·신규식·선우 혁·한진교 등과 함께 중국 상해에 있는 불란서 조계 보창로란 거리의 허름한 집을 임시 사무소로 정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을 만들기 위한 비밀 회의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4월 10일에 상해에 모인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 의정원 회의를 열고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 헌장 등을 의결 선포 함으로써 역사적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을 맞게 된 것이다.



그는 임시 의정원의 의원이 되었고 법무 차장으로 임명 되었다.
1920 년 9 월에는 임시정부의 외무 총장이 되었다.


1932년 1월 일본이 상해 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본토 침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이 급변하는 객관적 정세에 비추어 독립운동 세력의 총집결을 절감하고 1937년 7월에 한국 광복 진선을 결성하였다.
1940 년 5 월에 광복 진선에서는 한국 독립당을 만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도와 광복군을 창건하였으며, 조선민족 의용대를 조직하였다.


 


1942년 6월에 임시정부에서는 외교 연구위원회를 설치 하기로 하고, 그는 장건상·이현수·이연호와 함께 연구 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2 월에는 박찬익·최동오·김성숙·유 림을 연구위원으로 임명하여 그 진용을 보강하니 여기서 중대시국에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도 비로소 그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이때 그는 부회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임시 정부의 초창기 부터 시작하여 임시정부의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 하였으며, 조국이 광복 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과 더불어 귀국, 김구 등 임시정부 계통과는 노선을 달리하여 정치 공작대 ·정치위원회 등을 조직하여 이승만과 접근하고, 1946년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부위원장, 자유신문사 사장, 국민대학초대학장 등을 겸하다가 그 해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대의원에 피선, 1947년 의장이 되었다.
지청천대동청년단과 합작해 대한국민당을 결성하고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이 되었다가  앞서 국회의장이던 의장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국회의장에 피선되었다 .


한편  정부수립 후 이승만과 멀어지기 시작한 한민당김성수의 제의를 받아들여 1949 년 민주국민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었는데 1948 년 5 월 10 일 실시되었다. 유권자의 95.5%가 투표에 참가하여 제주도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임기 2년의 198명 의원이 선출되었으며, 제주도에서는 1년후에 2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총선 열흘뒤인 5월 20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이 폐원되었으며, 1948년 5월 31일에는 제헌국회 개원식이 거행되었다. 초대 국회의장에 이승만, 국회 부의장에는 신익희, 김동원의원이 선출되었다.

제헌 국회에서는 무소속의원이 85 석의 의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으며, 다음으로 대한독립총성국민회(55), 한국민주당(29), 대동청년당(12), 조선민족청년단(6), 대한독립촉성농민총연맹(2), 대한노동총연맹(1), 기타(10)석으로 총 200석이다.
제헌국회는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내각책임제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7월 12일 3독회를 거쳐 의결하였다.


 7월 17일 국회의장이 서명하여 공포하였다. 국회는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7월 20일 이승만 의장을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이시영의원을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8월 2일에는 이범석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을 가결하고, 8월 4일에는 신익희 국회 부의장을 국회의장으로, 김약수의원을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하였다. 8월 5일에는 김병로대법원장 임명승인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적인 조치를 완료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이 선포 되었다 다시 그는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 최고위원이 되었다.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 되었고, 국회 의장을 역임 하였다.1955년 민주국민당을 민주당으로 확대·발전시켜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56 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이승만 대통령의 장기 집권에 대항하여 야당 에서 신익희 국회 의장이 대통령 후보에 출마를 하렸다. 

여기서  잠간 자유당 정권시절의 사회상을 집고 넘어가자 .


자유당 정권때 유행하는 말이 있었다 .
이승만  대통령  말이라면 비판도 없이  무턱대고   "찬성이요" 하고 따르는 국회의원들이나 장관들을  거수기 국회의원 또는 거수기 내각」등이라 비꼬았고 대통령 말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하고 따르는 국회의원이나 장관들에대하여 "지당한 말씀"이라고  무조건 따르는 사람은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고 불렀고 게다가  대통령 말씀(?)에 감복까지 하여 눈물 까지 흘리는 장관에게는 눈물을 글성인다는 뜻에서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


심지어는 대통령이 발언하면  비판없이 무조건 따르는 여당 국회의원들이기 때문에   아침밥먹고 손한번 들어주면 월급이나오는 국회의원이라는 뜻에서 「애보기 국회」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집에가서 아이나 돌보라는 뜻이다


이러한 말들은 당시 국회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말들이라 하겠다.
당시의  이익흥 내무부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이 낙시를 하고 있다가 무심결에  방귀를 뀌자「각하 시원 하시겠습니다」라고 아첨까지  했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퍼져 나와"각하 시원 하시겠습니다"가 당시 아부하는 장관이나 국회의원들을 비꼬아 유행어가 된일도있었다  
이때 국회의원들이란 대통령의 거수기에 불과 했었으므로  국회에 제시간에 출석하는 일도  태만히 하여 국회의원들뿐만아니라  일반사회에 까지  시간관념이 없는 사람들을 비꼬아 「코리안 타임」이라고 하는 말까지  생겼고 자조적으로 "구공탄 타임"이라고 하는 말도 생기는데, 당시 시간 관념이 정확하지 않은 것을 비꼰 말이라 하겠다.


이당시  대통령 주위에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이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어야 자기들의 자리가 유지 될것이라는 망상에서  평소 미국의 민주주의를 신봉해온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자리를 내놓을것이 두려운 나머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백성들이 바라는것(?)이니  대통령에 다시 더 출마해줄것을 간청한다.

대통령의「3선 출마」를 바라는 민의의 표시라며  소위 공무원들을 동원하여 3선 출마 해달라는  관선 데모가 유행하였는데 서울시내 소가 끄는마차꾼 까지 동원하여  청와대 앞에서  3선 출마를 해달라는  마차꾼들의 데모를하게하였다 .이때 조선일보 ,동아일보에서는  우마차(牛馬車)까지 동원되어  이승만 대통령을 3선까지  출마하여야한다고 데모하여 1950년대에 소의 뜻, 말의 뜻 이라는 의미에서 「우의마의(牛意馬意)」라는 조롱하는 말이 말이 생겨났고 대통령을 더 해먹으려는  이승만 정권은  여당 국회의원을 통하여 3선 개헌 법을  통과시켰는데    통과시킨 법이  헌법에 어긋나는 숫자로 통과 시켜 「사사오입(四捨五入)」이라는 말이 생겨  이말은 정치라는 말이 불신의 상징처럼 등장하였다 .

사사오입의 전말은 이렇다 .
이승만 대통령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위하여  대통령 임기를 내세워 개헌 발안을 한것이다
5월 20일 선거에서 자유당이 원내 절대 다수를 차지 하자, 자유당은 대통령 이승만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 한다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9월 8일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한것이었다.


11월 27일  국민들과  야당의 반발을 무시하고 국회에서는 헌법개정안을 회부시켰는데 국회에서의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헌법개정에 필요한 3분의 2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하였다.
 당연히 헌법 개정안은 부결 된것이다
따라서 국회부의장 최순주(자유당 소속)는 헌법 개헌안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가관인것은  그다음이었다
그 선포가 있은 이틀 후  자유당 정권의 사주를 받은  국회에서는 재적 의원 203명의 3 분의 2선을 사사오입()하여 135 명이면 된다고  억지논리를 주장하여 전날의 부결 선포를 번복,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하고 말았다  
그 주요 내용은 국민투표제의 가미, 순수 대통령제로의 수정, 대통령 궐위시 부통령의 승계제도,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의 철폐 등이었다.
사사오입개헌은 절차상으로도 정족수에 미달한 위헌적()인 개헌이었고, 실질적으로도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철폐한다는 점에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위헌무효()의 헌법개정이었다

이렇게 대통령이 불법을 밥먹듯이하던 시대였다.
이 사건 이후   일반 국민들 끼리  유행하는 말중에  "불법을 한다"이거나  "법으로 안되는것을 하게 한다"는 말이거나  뇌물을 써서 안 되는 일을 되게 한다는 말은  "정치한다"라는 말로 대명사 처럼 쓰이었다 .
"정치한다"는 말이 그처럼  불신의 대명사처럼 된것도 우연이 아닌것이 지금도  우리는 곳곳에서 아직도 그 자화상을 보는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신익희는  이러한 사회의 부조리를 혁파하기 위하여 분연히일어났다
1956년 대통령선거 때  신익희는  암울했던 사회에 불을 밝히고자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
이에  집권당인 자유당은  대립되는「갈아봤자 별 수 없다」라는 대꾸를 헀던가  아니면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대조되는 정국에서 신익희는  캠페인 때마다 수많은 관중을 구름처럼 몰고 다녔고, 급기야 장충단 공원에 이은, 한강 백사장에서의 30만 청중운집은 당시로는 기록적인 동원이었다.


신익희 선생은 선거유세를 할 때마다 특유의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청중을 매료했다. 그는 가끔 호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자연스런 매너를 보여 다정다감을 유도했다. 
연설도중에 액센트를 가하면서 강조하는 부분은 있어도 결코 흥분하거나 남을 헐뜯는 언행은 하지 않았다. 잔잔하면서도 확신에 찬 그의 정견 한 마디 한 마디 에 청중은 더욱 큰 박수갈채로 화답했다. 
그는 원고를 들여다보며 연설을 하는 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한강 백사장연설은  유명했다
1950년대는 암울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65달러. 젊은이들은 대학 문을 나서면 자동적으로 실업자로 굴러 떨어졌다. 청년실업자가 거리를 방황하고있는데도  자유당 정권을 자기들의밥통 지키기에만 열중하였다
그러자니 권력자들은 법을 제멋대로 개정하고 나라의 온갖 자리는 끼리끼리 나눠갖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러면서도 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는 듯이 큰소리는 해댔다.

오늘만 있고 내일이 없던 그 시절, 1956년의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들고 나온 구호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선거전의 절정은 5월 2일 민주당의 한강 백사장(지금의 용산구 동부이촌동) 유세였다. 당시 서울 인구 150만명, 유권자 수 70만명 가운데 30 만명이 한강 백사장으로 몰려들었다.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강 건너 흑석동 언덕과 한강 인도교에까지 벌통에 벌 모여 붙듯 사람들이 들러붙어 있었다.”(당시 신문 5월 3일자 보도) 그때 서울 시내버스가 모두 합해 637대였다니 대부분은 걸어서 유세장에 갔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의 연설과그당시 사회상과 맞 떨어지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내세웠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는  당시 국민들의 마음에 절실하게 와 닿는 구호였기때문이었다
1956년 5월 5일 호남지방을 유세하러 기차를 타고 가던중 강경 근방에서 화장실을 다녀 오다가 심장마비로 쓸어저 서거했다


56년에 발표한  ‘비 나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가   한때는 애절하게 불리워지었었는데 이노래와 관련,. 자유당 시절... 충격에 빠진 국민들은 마치 추도곡처럼 ‘비 나리는 호남선’을 애창했었기 때문이었을것이다 . 아마  못살겠던 시절을 구원해줄 사람이 급서했기 때문이었을까?


 노랫말은 이렇다

노래 제목;  비내리는 호남선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이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인사가 야속도 하드란다


다시못올 그날자를 믿어야 옳으냐
속는줄도 알면서 속아야 옳으냐
죄도 많은 청춘이냐
비나리는 호남선에
떠나가는 열차  마다  야속도 하드란다


신익희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