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사르의 심복으로 전권을 장악하고 있는 안토니우스, 카이사르의
유언으로 느닷없이 나타난 옥타비아누스, 이 둘은 힘을 합해
브루투스를 비롯한 암살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들을 제거하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40세 옥타비아누스는 21세 애송이였다.
이집트와 로마는 동맹관계 였는데 위 전쟁에서 브루투스 일파를 도운
클레오파트라를 최고집정자 안토니우스가 터어키 타르수스로 소환한다.
이때 질책하기는 커녕 한창 성숙한 27세 크레오파트라에게 홀라당
넘어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모른다.
아예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호화스러운 생활끝에 쌍둥이 남매가 만들어진다.
정신차리고 로마로 돌아온 안토니우스 이태리 남동부 브린디시에서
협정을 맺게된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를 포함한 동부,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를 포함한
서부, 거부 레피두스는 아프리카 북부를 나누어 통치하기로 한 것이다.
(제 2차 삼두정치)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하게
한다. 딸까지 얻은 안토니우스는 정숙한 옥타비아와 함께 2~3년간
그리스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데~ 이때 안토니우스는 43세였다.
카이사르가 인정한 옥타비아누스, 점차 세력을 확장하게 되고 이에
초조감을 느낀 안토니우스는 뭔가 공적을 쌓기위해 파르티아(지금의
이란지역) 원정을 기획하게된다.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을 받기로 한 안토니우스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옥타비아를 로마에 보내버린다.
쌍둥이 남매를 데리고 화려하게 나타난 클레오파트라, 터어키
안티오키아에서 4년만의 화려한 재회를 한다.
정식결혼을 요청받게된 안토니우스, 알렉산드리아에서 화려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중 결혼을 한 것이다. 그 당시에도 이중결혼은 용납되지
않았다. 더구나 이민족 여자와의 결혼이라니..
안토니우스는 45세 클레오파트라는 32세 였다. 카이사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과 쌍둥이 남매가 있었다.
로마는 시끄러워 졌고 당연히 파르티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클레오파트라와 결혼까지했지만 이것도 끝났다고 판단한 본부인인
옥타비아는 자비를 들여 2000명의 군사와 군자금을 갖고 그리스로 들어가
안토니우스를 만난다.
하지만 군사와 군자금을 받고 다시 옥타비아를 로마로 보내버린다.
자신의 로마군단과 클레오파트라의 도움을 받은 안토니우스는 상대적
으로 쉬운 아르메니아 원정(터어키 동북쪽, 지금의 아르메니아 그루지아
지역)에 나서게 되었고 별다른 전쟁없이 성공하게 되었다.
어린 쌍둥이 아들과 아르메니아의 공주와의 약혼등 조약을 맺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화려한 개선식을 갖게된다.
이때 안토니우스는 48세 카이사르 사이에서 낳은 13세 소년, 안토니우스
사이에서 낳은 6세 쌍둥이남매, 그 후에 낳은 2세 아이가 있었다.
엄연히 로마의 장군이고 로마의 개선식을 로마의 포로로마노에서 하지
않고 이집트에서 하다니.. 로마 시민들은 아연실색하게 된다.
곧 이어 안토니우스가 다스리는 로마의 동부지방을 클레오파트라와
그녀의 세 아이에게 넘긴다는 발표를 하기에 이르자 로마는 안토니우스
에게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이에 화가 단단히 난 옥타비아누스는 누이 옥타비아에게 이혼을 통고
하게 하고 로마를 배신한 안토니우스를 향해 진군하게 되었다.
쌍방의 대군이 맞 붙은 그리스 악티움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도망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전쟁이 아니고 로마와 이집트와의 전쟁으로
인식하게 된 안토니우스의 군사들이 옥타비아누스의 진중으로 계속 탈출
하게 되었으니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더구나 클레오파트라를 태운 화려한 선단이 악티움해전을 관람하였고
전황이 조금 불리하게 돌아가자 앞장서서 도망하였다.
생명을 걸고하는 사나이들의 참혹한전쟁에 여인이 화려한 차림으로
관람하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조금 불리하더라도 과감하게
온힘을 다해 싸워야하는 것이 전쟁인데 화려한 10단 갤리선이 돛을 펴고
화려하게 앞장서서 도망가다니.. 도대체 말이 안되는 모습이었다.
노 하나에 노잡이의 인원수에 따라 배의 마력수가 결정된다. 노 하나에
10명이 달라붙어 저어대는 오늘날의 포르쉐다.
3단 갤리선이 대부분이었고 5단 갤리선이 되어야 지휘선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알랙산드리아로 피신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시녀를 시켜 안토니우스
에게 자기가 죽었다는 통고를 하고 곧이어 다시 다른시녀를 시켜 자기가
살아있다는 통고를 한다.
그러나 첫번째 통고를 받자마자 안토니우스는 자기가슴을 찌르게 되었고
클레오파트라에게 안긴채로 행복한 죽음? 을 맞았다.
안토니우스는 51세 였다.
왜 그러한 통고를 하였는지, 또 마음이 바뀌어 다시 통고를 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여인의 마음은 바람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갈대라
하였던가~
뒤쫓아간 옥타비아누스와 비밀리에 독대를 한 후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젖가슴을 물리게하여 죽는다.
아마도 옥타비아누스도 유혹하려 하지 않았을까 ?
옥타비아누스는 31세 클레오파트라는 38세였다.
후에 클레오파트라의 아이들도 전부 죽임을 당하여~
기원전 330년에 알렉산더 대왕에의해 세워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를 마지막으로 멸망하게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후에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듣는 현명한 황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