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형제. 동생 레무스를 죽이고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자나깨나 영토 확장에 목을 멨다. 로마가 로물루스의 지도로 처음 건국되었을 때 시민들은 대부분 군인이거나 타국에서 흘러 들어온 떠돌이들이었고 여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건전한 가정을 꾸리고 다음 세대의 청소년을 길러 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로마인들은 이웃 나라에 신부감을 구하러 갔지만 로마인들의 난폭한 행동을 보아온 이웃나라 사람들은 모두 그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로물루스는 꾀를 내어 넵투누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바다의 신)의 신전이 새로 발견되어 그 신전에 바치는 축제를 연다고 하면서 로마와 가까운 사비니 사람들을 초대했다. 모두가 신전 앞에 모였을때 로물루스가 망토를 들어올리자 로마 남자들이 사비니 여자들에게 덤벼들어다.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무력으로 이름이 난 로마인들을 당할수 없어 결국 여자들을 빼앗기고 말았다. 기원전 750 년.. ![]() 다비드 [사비니 여인들] 대작.. 1799 캔버스에 유채, 385*520cm 루브르 미술관 파리 끌려간 여인들은 로마인들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 . 그리고 얼마나 흘렀을까. 사비니 남자들은 빼앗긴 아내와 딸, 여동생들을 구하기 위해 적의 영토로 쳐들어갔다. 그림은 바로 이 싸움의 한 장면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이미 사비니의 여인들은 로마병의 아내가 되어 그들의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었다. 여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싸움 이란 건 대체 의미가 없는 비극일 뿐이었다. 남자들이야 로마와 사비니라는 국경의 의미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여인들의 입장에선 남편과 전 남편, 혹은 동생과 남편, 아이 아빠와 외할아버지의 싸움 이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분노는 어쩌면 싸우고 있는 남정네들보다 여인들이 더 심했을지 모른다. 결국 싸움은 피맺힌 여인들의 절규로 일단락 지어진 모양이지만, 그 상흔과 죽어간 이들이 남긴 처절함은 두고두고 서로의 가슴을 후벼팠을 것이다. 자기 나라로 도망쳐와 몇 년의 기회를 엿보아 보복을 하러 로마로 쳐들어갔다. 그들을 물리치려 했지만 그때 이미 로마인들과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사비니 여자들이 그들 사이에 끼어 화해를 시켰다고 한다. 결국 사비니사람들이 로마로 이주해와 한 나라를 이루게 되어 결국 해피엔딩이 되었다.. ![]() 그림에 등장하는 전사들은 다비드의 제자와 친구들이고 중앙의 검은 머리를 하고 젖가슴을 드러낸 채 무릎을 꿇고 아이들을 보호하는 사비니 여인의 모델은 다비드의 아이들을 돌보던 아델레이다. 그녀는 그림에 모델로 참여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도록 그림에서의 헤어스타일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림에서 전사들, 특히 로물루스와 타티우스는 누드로 나와 그는 영웅적 누드로 고대의 신·영웅·보편적 남성을 나타내려고 했다. 이전의 다비드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는 여인을 중앙에 구성하면서 남자들을 누드로 에로틱하게 묘사했다. ![]() 다비드는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를 강당을 빌려 전시한 후 입장료를 받았다. 파리에서는 돈을 받고 작품을 관람하게 한 적이 없었고 아카데미가 그런 행위를 금해온 터라서 이는 새로운 사건이 되었다. 따라서 입장료를 받는 전시에 대해 비난이 거세었다. 입장료 1프랑 80센팀은 적은 돈이 아니었으므로 전시회는 결국 상류층 인사와 외국 방문객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당시 숙련공 일당이 1프랑 미만이었으므로 입장료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이 작품은 1799년 12월 21일부터 5년 동안 전시되었고 약 5만 명이 입장료를 내고 관람했다. 다비드는 입장료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값에 이르게 되면 작품을 정부에 기증 하겠다고 제의했지만 막상 입장료가 원하는 액수에 이르렀을 때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전시회가 계속되던 1801년 10월 그는 파리로부터 남동쪽으로 48km 떨어진 퐁텐블로 근처에 별장을 구입했다. 이 전시회는 개인전의 효시가 되었다. ![]() 이태리 피렌체 베끼오 궁전 안에있는 조각상. |

1970.01.01 09:33
사비니의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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