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 지선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공부는 엄마와 함께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분주했다. 흡사 내가 초등 학교에 입학한듯한 마음가짐으로 들뜬 나날이었다.
어느 날 지선은 가훈을 알아 오라는 숙제를 받아 왔다. 아이를 잘 키우고 싶은 열망이야 어느 부모에게나 있는 소망이겠지만 나는 구체적인 준비가 없었던 것 같다. 공작물도 아닌 가훈을 급조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골똘히 생각했다. 평소에 나의 좋은 점이 있다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아이가 따를 것이니 나에게 부족한 점을 찾아 그것을 드러내어 말하고 가르치자 했다. 이 정서는 용기였다.
학교 문제와 결혼, 직업을 선택하는 문제 등, 삶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점에 나는 늘 결정을 두려워했다. 나는 그런 내가 싫었다. 아이에게 목표를 정하고 그에 맞춰 도전적이고 용기 있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기르고 싶었다. 우리 집 가훈은 이렇게 만들어 졌다.
그러나 비록 만들어 지기까지의 과정이 소홀 했다 하나 지닌 뜻도 그런 것은 아니어서 나는 이 가훈을 강조해서 말했다. “용기 있는 사람이 되자.”
친구들과 다툴 때에는 잘못했다고 먼저 사과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말했다. 다른 친구들이 싫어하는 청소나 발표를 열심히 하는 일이 용기 있는 일이라 부추겼다. 용기라는 말은 아이에게 달콤한 당의정이 되어 어느 일에나 포장 재로 사용되었다.
네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옳다고 말하는 것이 용기야.
네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용기야.
지선이 5학년이 되던 해,
둘째 규리가 입학을 했고 당시 아이들의 학교는 교실이 부족해 1,2학년은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 2부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일찍 출근하는 엄마 땜에 규리가 오후반일 때는 언니의 손을 자주 빌렸다. 학교 앞 문구점에서 구입해야 하는 준비물은 물론, 동생을 혼자 두고 가기가 안쓰러운 언니마음에 오전 등교 때는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일이 일어난 그날도 지선은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 지선은 수업이 끝나고 청소까지 마치고 데려다 주느라 규리의 수업시간에 바빴다. 교실에 들어서는 아이를 보고 규리의 담임선생님은 지선을 향해 아이 데리고 놀다가 늦게 온다며 큰 소리로 나무랐다.
지선은 늦은 줄도 모르고 왔는데 수업은 시작되었고 선생님은 진노하시니 동생이 꾸중들을 게 마음이 무거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변명을 했다.
그러나 규리의 담임선생님은 전후 사정 상세한 이야기 들어 줄 시간도 없었고 그럴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아이가 청소하느라 늦었다고 나름대로 사실을 이야기하자 선생님은 말대꾸한다고 아이의 뺨을 몇 차례 때린 것이었다.
아이는 울면서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우리 엄마가 용기 있게 살라고 했어요!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을 땐 옳다고 말하는 거랬어요~~!"
나는 사무실에서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와서 아이를 데리고 가라는 선생님의 다급한 목소리에 놀라 한달음에 뛰어갔다. 규리의 담임선생님은 교사 생활 30년에 저런 애 처음 봤다며 흥분을 했다. 아이는 엄마를 보자 세차게 운다. 엄마가 왔으니 자기의 입지가 굳어졌다는 맘으로 긴장이 풀어진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선생님께 수업이 방해 받은 점을 사과했다.
수업시간에 늦은 것은 잘못한 일이라고 생각했기에 어미가 아이를 잘못 가르쳤다고 머리를 숙였다.
우는 아이를 데리고 서둘러 학교를 나왔다.
내가 그 자리에서 한 행동은 어른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상식에 충실한 인사였다.
아이에게 말로는 도전과 용기를 가르쳤지만 나는 그것을 뛰어 넘을 수가 없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화를 내며 너무나도 기존에 길들여 진 자신을 나무랐다. 내가 감당하기에 수위가 높다는 생각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아이의 눈을 마주하지 못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이 도에 지나쳤다고 생각했지만 그저 안으로 쓸어 담기에 급급했다.
아이의 입장과 상황을 들어보고 선생님께 아이의 말을 대변하고 나의 소신을 조금이라도 전달했더라면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럽지 않았을 것을..
규리의 담임선생님은 아이의 말을 듣기라도 했어야 했다. 다만 늦게 온 부분에 대해서만 몇 마디 지적을 하고 앞으로 정시 등교를 환기시켜 주었다면 더욱 교훈적이었을 것이다.
요즈음엔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체벌을 동영상으로 찍어 인터넷에 올려 단죄하는 세상이 되었다. 사랑의 매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의 논란이 뜨겁다.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례는 도처에 있다. 체벌보다는 따뜻한 격려로 인정해주는 칭찬이 그립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했던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하던가.
그 후로도 나는 아이에게 또 말한다.
너와 다른 의견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너의 잘못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네가 옳다고 생각될 때는 옳다고 말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