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년 12월 31일. ~ ♣ 한해를 마무리하는 날, 우리가족은 여동생 네 집에 모이기로 했다 엄마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만두를 빚어 먹게 해 주셨다. 엄마가 만두를 빚을 때 남편이 장모님, 장모님 하니까 당시 일곱 살이던 둘째가 아빠를 따 라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재롱을 떠니 손주들 중에 제일 막내이기도 한 규리 를 예뻐 하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던 엄마는 “얘, 내가 규리 시집갈 때까지 살까? 아니 70까지는 살까?”하시더니 이튿날 새벽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고 회복되는 듯 하더니 그 해 가을, 62세를 일기로 우리 곁을 떠나셨다. ‘뇌 지주막하’ 출혈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집도할 의사선생님께 설명 을 들을 때 나는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시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가을이 시작될 무렵 말기 폐암이 발견되어 두 달 정도의 여명이 남아 있다는 말을 여동생에게 전해 들을 때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목이 막혀왔다. 엄마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재입원을 하게 된 것은 검사를 위해서라고 말하며 엄마 앞에서는 웃으며 시간을 보내다 병실을 나와서 울고 다니던 시기였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젊은 시절 모습은 에너지가 충만하고 열정적이셨다. 자식들에게 큰소리로 야단치고 내가 말대꾸하면 매를 들어 가르치던 분이셨지만 지금 생각나는 엄마는 병으로 왜소해지고 기운 없던 후반의 모습 으로만 기억된다. 엄마는 본인이 쉽게 일어서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던 것 같다. 학창 시절 내가 교회에 나간다 하면 극구 말리던 엄마가 손주들이 읽어 주는 성경에 귀를 기울이고 더 듣고자 하셨다. 카톨릭에 세례를 받은 나는 엄마에게 세례를 권했고 엄마는 신앙에 귀의 하기를 원하셨다. 엄마가 입원해있던 경희 의료원에는 병원에 신부님께서 상주하고 계셨기에 나는 신부님께 세례를 부탁하였다. 신부님이 오시기전 나는 엄마에게 다시 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첫 고백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딸로 이 세상에 난 것을 감사 드려요, 엄마, 제가 잘못했던 일 용서하세요,. 엄마 사랑해요!” 이렇게 말하기 위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엄마....` 아니, 그런데...그 때 신부님이 오신 것이었다. 나는 엄마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의 사랑한다는 그 고백의 시간을 놓치고 며칠 있다 영영 가신 엄마를 향해 울 수도 없었다. 엄마는 스스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던 죽음을 나는 인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엄마가 가시던 날은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중간 마감날이기도 해서 분주 했는데 뭔가 잡아 당기기라도 하듯 마음이 조급했다. 업무를 대강 마치고 서둘러 엄마에게 달려 갔다. 매일 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지 못했던 것은 일상에 매달려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도 있었지만 아직 시간이 더 남아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며칠 사이에 엄마는 더 말랐지만 눈빛만은 더없이 맑았다. 나를 보시더니 오늘은 당신이 갈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산소 호흡기를 달고 숨가쁘게 말씀하시면서 네가 어려울 텐데 병원 비를 보탰다고 걱정을 하셨다. 오늘 이 세상을 떠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그 상황에서 딸의 가계를 걱정하시던 엄마는 도대체 어떤 분인가. 사실 엄마는 두려웠을 것이다. 겉으로는 강한 것 같지만 속은 여린 분인 것을 딸인 내가 모르지 않았다. 죽음이라는 길목에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는 참으로 의연했던 것 같다. 신부님께서 주신 세례명을 적어 달라고 하시더니 환자 복 상의에 있는 주머니에 넣고 가끔씩 꺼내어 읽곤 하셨다. 신부님께서는 ‘젬마’ 라는 세례명을 준비해 오셨고 보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름처럼 엄마가 우리의 보석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엄마는 생의 마지막 말로 자식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과 함께 하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가다 보면 공평치 않은 조건이 얼마나 많은지 불평이 나오다가도 모두에게 어머니를 보낸 신의 뜻이 마음을 채워 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사랑 안에서 모든 어머니의 자식들은 공평해지는 것이다. 나는 딸의 문자에 대한 답장을 날렸다. 엄마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엄마에게 잘해라. 엄마는 할머니에게 잘못한 것 때문에 스스로 가슴에 가시 하나 품고 산단다. 너는 이렇게 아프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