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대의 봄
내가 서울에서 부중을 (당시 서울 분교라고 칭했다) 다니게 된 때는 입학식이 끝나고 일 개월쯤 후이다. 그 때 나는 마산에서 부중을 지원하여 입학이 되었는데 부산이나 서울에나 갈 형편이 되지 않아서 마산동중에 편입허가를 신청하였었다. 의례 히 허가될 줄을 기대하였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거부되었다. 당시 서울에 들어가려면 한강 도강증명서가 필요했고 이를 얻으려면 까다로운 절차와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었다. 나의 부모님은 수소문 끝에 친척의 도움을 청하여 나를 불법으로 도강하게 하셨다. 그래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계셨던 할머니 곁으로 가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조처해 주셨다.
그때 우리는 남녀가 한 반에서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남녀 100명이었다가 110명 정도로 늘어 낫다고 생각한다. 나의 출석번호가 50이니까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매주 남녀 각 1명씩 조를 짜서 아침에 청소도하고 칠판도 깨끗이 하는 당번이 되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우리 조가 맡는 날이 되면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청소를 끝내 버리기 때문에 나와 같은 조인 C양은 마무리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지난번 S여자동문과 옛날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때 나와 한 조를 이루던 동문의 이름을 거명하여 그의 기억력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남학생들은 또한 밤에 야간순찰의 책임이 부여되었다. 교정을 둘러보며 학교가 절도의 피해로부터 막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는 숙직실에 모여 불침번을 계획하고 숙제도하고 잠도 잤다. 사실 중학교 1년 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일은 즐거운 과제였다. 나는 선배들이 무엇을 하는가 관심이 컸다. 중학교 6학년은 대학준비로 제외되었으니 가장 선배는 5학년이었다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의 구분이 당시 없었다). 기억에 남는 일화의 하나는 5학년의 K선배에 관한 일이다. 그는 밤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숙직실을 매일 저녁 찾아온다. 한참 농담을 주고받다가 공부를 시작한다. 동급생의 말을 들으면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데 노트를 하지 않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남의 노트를 읽기 위해서 숙직실을 찾는다는 것이다. 풍문에 의하면 그 선배는 그후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대학교 교편을 잡고 활동한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부디 친 문제는 영어공부였다. 일 개월의 공부가 늦으니 나는 영어의 알파베트를 모르고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는 처음에는 담임선생님인 황희숙 선생님이 담당하셨고 후에는 사대를 갓 졸업한 안용희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업어 주고 싶다는 표현을 써서 학생들을 웃기기도하고 칭찬도 해 주셨다. 나는 한번도 그런 칭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피난시절에 “서울내기 다마내기” 란 소리를 듣다가 표준말을 쓰는 친구들을 만나니 즐거웠고 5년이나 부중 옆의 부속국민학교에 (당시 분교라 칭했고 본교는 을지로에 있었다) 다니면서 정들었던 교정으로 돌아왔으니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부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많은 친구들이 같은 반에 있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필요성도 없었다. 더구나 청량대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 드나들던 곳이니 마치 고향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때는 5월초라 청량대는 개나리가 만발했다. 대구에서 마산에서 황량한 피난민 생활을 하였던 내게는 “꽃동네”를 실감하게 하여 주었다. 대 운동장은 마침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모든 실외 활동은 청량대에서 거행하였다. 아침조회도 그 곳에서 했다. 자연히 청량대가 우리들에게는 학교생활의 근간이 되었다.
6.25와 9.28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나는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집에 있는 여러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배가 몹시도 고픈 시절이라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함수탄소가 탄소, 수소, 산소로 구성되어 있고 햇빛을 받아 식물은 대기와 물을 가지고 함수탄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른바 광합성의 설명이다. 그래서 나는 커서 광합성을 공부해야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생물과목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꿈이 1학년의 생물시간에 깨끗이 지워졌다. 생물 선생님은 강(?) 선생님이란 여자 선생님인데 지루하게 가르칠 뿐 아니라 설명도 내용도 너무 진부해서 그만 흥미를 잃게 되었다. 1년 동안의 배운 것이란 관다발이란 단어뿐이다. 나뿐 아니라 학급 전부가 생물시간을 싫어하였다.
역사는 김성익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그 분은 서울 분교의 교장 역할을 담당하시며 동양사를 가르치셨다. 인격도 고매한 분이었다. 그분의 강의를 나는 좋아하였고 그분이 칠판에 쓴 글은 명필의 글씨 같아서 지우기가 싫을 정도였다. 어느 날 동양사를 공부하다가 중국의 어떤 임금이 용렬한 임금이었다는 기술이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내게 용렬하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셨다. 나는 엉결끝에 용감하고 열렬한 뜻이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였는데 선생님은 그 말이 어리석다는 뜻이라고 지적하시는 바람에 전 학급이 까르르 웃어 버렸다. 그 때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창피스런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에게는 체육선생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훈련이란 과목으로 배속장교였던 주길준 중위께서 대치하셨다. 남학생, 여학생을 훈련시킨 뒤 선생님은 청량대 기슭 경사진 곳에 우리를 안쳐 놓고 여흥시간을 갖게 하셨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던 가요는 L군이 부르던 “국군의 아내”였다. 기회마다 “국군의 아내”를 부르던 덕분에 나는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여학생 중에서는 가곡을 잘 부르는 K양을 늘 지목하셨다. 우리는 명곡을 뽑는(?) 그를 “빽빽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배우던 과목 중에 특수한 것이 있다면 국어와 도덕이었다. 국어시간에 한문도 함께 공부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연로하신 김 선생님 (존함을 잊어버렸다)이 담당하시고 도덕도 같은 선생님이 담당하셨다고 기억한다. 김 선생님은 특별히 붓글씨 쓰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기초를 단단히 가르쳐 주셔서 지금도 조금 연습하면 잘 쓸 것 같다. 나쁜 붓을 쓰면 글씨가 갈라지기 때문에 좋은 붓을 구하려고 애를 많이 먹었다. 붓을 구하려고 방산시장을 누볐지만 찾지 못한 기억이 있다.
수학과 다른 과목에 대하여 별 기억이 없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님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필의 은사님도 나중에 오셨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당시 담임선생님은 몇 개월 계시다가 떠나시고 나의 기억으로는 나중에 주길준 선생님이 당분간 담임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가지고 온 도시락을 가지고 청량대에 올라가 오순도순 얘기하며 점심을 먹었다. 많은 학생들은 점심을 가지고 올 형편이 안되어 풀밭에 그 시간에 누워 쉬기도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나는 개구리 군과 (Y군) 함께 청량대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큰 향나무 밑에 누워서 유독 히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한 적이 있다. 그 때 불쑥 개구리 군이 내게 말한 이야기는 평생 잊혀지지를 않는다. “용우야 너는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열심히 할게”. 개구리 군이 무심코 지껄인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개구리 군의 “큰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개구리 군의 이 말이 생각이 나서 빙그레 웃고 새 힘을 찾는다. 그 후 개구리 군은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한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아침에는 전차를 타고 오지만 공부가 끝난 후에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때로는 제기동으로 가서 (그곳은 동대문으로 가는 길과 왕십리로 가는 길이 갈리는 곳이었다) 그 곳에 위치한 검문소에서 서 있다가 헌병이 차를 세우는 사이에 차 뒤에 올라타고 언제든지 차가 설 때에 내렸다. 상당히 도움이 되어서 우리는 재미를 붙였다. 그 당시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눈 친구 중에는 L군이 있다. 그가 촌에서 왔다고 우리는 촌놈이라고 불렀다. 그의 집안은 학자 집안이라 삼촌이 누구며 형님은 누구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는데 최근 50여년 만에 통화를 해보니 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기억은 선별적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별명을 지어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대개는 모양에 기인한다. 새우, 짱구, 개구리, 아주사(그 때 불렀는지는 의문시 됨), 넙치, 쪽발이, 캩(Cat), 촌놈, 등등. 아마 이들은 독특한 개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범한 친구들은 별명이 없었다. 무엇이든 나타나는 일을 했기에 별명이 붙여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학생들에게는 별명을 별로 부르지 않았고 모두 점잖게 대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이 별명은 오해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오랜만에 청량대의 화창한 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게 되었다. 우리는 참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그 것이 어려움임을 모르며 중학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재미있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천진 난만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청량대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가서 다시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가서 친구들의 별명을 부르며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싶다. 그리고 격려의 말을 주고받고 싶다.
주: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의 존함을 잊었는데 이 글을 먼저 읽고 손난주 동문이 황희숙 선생님이라 알려주어 감사한다. 그 이외에도 몇 군데를 교정하였다.
내가 서울에서 부중을 (당시 서울 분교라고 칭했다) 다니게 된 때는 입학식이 끝나고 일 개월쯤 후이다. 그 때 나는 마산에서 부중을 지원하여 입학이 되었는데 부산이나 서울에나 갈 형편이 되지 않아서 마산동중에 편입허가를 신청하였었다. 의례 히 허가될 줄을 기대하였는데 무슨 연유였는지 거부되었다. 당시 서울에 들어가려면 한강 도강증명서가 필요했고 이를 얻으려면 까다로운 절차와 정당한 이유가 필요했었다. 나의 부모님은 수소문 끝에 친척의 도움을 청하여 나를 불법으로 도강하게 하셨다. 그래서 피난을 가지 않고 서울에 남아 계셨던 할머니 곁으로 가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조처해 주셨다.
그때 우리는 남녀가 한 반에서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남녀 100명이었다가 110명 정도로 늘어 낫다고 생각한다. 나의 출석번호가 50이니까 그렇게 추정하는 것이다. 매주 남녀 각 1명씩 조를 짜서 아침에 청소도하고 칠판도 깨끗이 하는 당번이 되었다. 나의 기억으로는 우리 조가 맡는 날이 되면 내가 너무 일찍 와서 청소를 끝내 버리기 때문에 나와 같은 조인 C양은 마무리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담이지만 지난번 S여자동문과 옛날 얘기를 하는 중에 그 때 나와 한 조를 이루던 동문의 이름을 거명하여 그의 기억력에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남학생들은 또한 밤에 야간순찰의 책임이 부여되었다. 교정을 둘러보며 학교가 절도의 피해로부터 막기 위한 조치였다. 우리는 숙직실에 모여 불침번을 계획하고 숙제도하고 잠도 잤다. 사실 중학교 1년 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일은 즐거운 과제였다. 나는 선배들이 무엇을 하는가 관심이 컸다. 중학교 6학년은 대학준비로 제외되었으니 가장 선배는 5학년이었다 (우리는 중학교, 고등학교의 구분이 당시 없었다). 기억에 남는 일화의 하나는 5학년의 K선배에 관한 일이다. 그는 밤이 되면 어슬렁어슬렁 숙직실을 매일 저녁 찾아온다. 한참 농담을 주고받다가 공부를 시작한다. 동급생의 말을 들으면 그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는데 노트를 하지 않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남의 노트를 읽기 위해서 숙직실을 찾는다는 것이다. 풍문에 의하면 그 선배는 그후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에 와서 대학교 교편을 잡고 활동한다고 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부디 친 문제는 영어공부였다. 일 개월의 공부가 늦으니 나는 영어의 알파베트를 모르고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어는 처음에는 담임선생님인 황희숙 선생님이 담당하셨고 후에는 사대를 갓 졸업한 안용희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공부 잘하는 학생은 업어 주고 싶다는 표현을 써서 학생들을 웃기기도하고 칭찬도 해 주셨다. 나는 한번도 그런 칭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학교생활은 즐겁기만 했다. 피난시절에 “서울내기 다마내기” 란 소리를 듣다가 표준말을 쓰는 친구들을 만나니 즐거웠고 5년이나 부중 옆의 부속국민학교에 (당시 분교라 칭했고 본교는 을지로에 있었다) 다니면서 정들었던 교정으로 돌아왔으니 꿈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뿐이랴 부국에서 함께 공부하던 많은 친구들이 같은 반에 있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필요성도 없었다. 더구나 청량대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에 드나들던 곳이니 마치 고향집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때는 5월초라 청량대는 개나리가 만발했다. 대구에서 마산에서 황량한 피난민 생활을 하였던 내게는 “꽃동네”를 실감하게 하여 주었다. 대 운동장은 마침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모든 실외 활동은 청량대에서 거행하였다. 아침조회도 그 곳에서 했다. 자연히 청량대가 우리들에게는 학교생활의 근간이 되었다.
6.25와 9.28 서울 수복이 될 때까지 나는 별로 할 일도 없어서 집에 있는 여러 책을 읽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배가 몹시도 고픈 시절이라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함수탄소가 탄소, 수소, 산소로 구성되어 있고 햇빛을 받아 식물은 대기와 물을 가지고 함수탄소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이른바 광합성의 설명이다. 그래서 나는 커서 광합성을 공부해야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래서 생물과목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그 꿈이 1학년의 생물시간에 깨끗이 지워졌다. 생물 선생님은 강(?) 선생님이란 여자 선생님인데 지루하게 가르칠 뿐 아니라 설명도 내용도 너무 진부해서 그만 흥미를 잃게 되었다. 1년 동안의 배운 것이란 관다발이란 단어뿐이다. 나뿐 아니라 학급 전부가 생물시간을 싫어하였다.
역사는 김성익 선생님이 담당하셨는데 그 분은 서울 분교의 교장 역할을 담당하시며 동양사를 가르치셨다. 인격도 고매한 분이었다. 그분의 강의를 나는 좋아하였고 그분이 칠판에 쓴 글은 명필의 글씨 같아서 지우기가 싫을 정도였다. 어느 날 동양사를 공부하다가 중국의 어떤 임금이 용렬한 임금이었다는 기술이 있었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내게 용렬하다는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셨다. 나는 엉결끝에 용감하고 열렬한 뜻이라고 큰소리로 대답하였는데 선생님은 그 말이 어리석다는 뜻이라고 지적하시는 바람에 전 학급이 까르르 웃어 버렸다. 그 때 쥐구멍이라도 찾고싶은 창피스런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에게는 체육선생님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훈련이란 과목으로 배속장교였던 주길준 중위께서 대치하셨다. 남학생, 여학생을 훈련시킨 뒤 선생님은 청량대 기슭 경사진 곳에 우리를 안쳐 놓고 여흥시간을 갖게 하셨다. 선생님이 제일 좋아하던 가요는 L군이 부르던 “국군의 아내”였다. 기회마다 “국군의 아내”를 부르던 덕분에 나는 지금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여학생 중에서는 가곡을 잘 부르는 K양을 늘 지목하셨다. 우리는 명곡을 뽑는(?) 그를 “빽빽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배우던 과목 중에 특수한 것이 있다면 국어와 도덕이었다. 국어시간에 한문도 함께 공부하였다고 생각하는데 조금 연로하신 김 선생님 (존함을 잊어버렸다)이 담당하시고 도덕도 같은 선생님이 담당하셨다고 기억한다. 김 선생님은 특별히 붓글씨 쓰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기초를 단단히 가르쳐 주셔서 지금도 조금 연습하면 잘 쓸 것 같다. 나쁜 붓을 쓰면 글씨가 갈라지기 때문에 좋은 붓을 구하려고 애를 많이 먹었다. 붓을 구하려고 방산시장을 누볐지만 찾지 못한 기억이 있다.
수학과 다른 과목에 대하여 별 기억이 없는 것은 가르치는 선생님이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필의 은사님도 나중에 오셨다고 기억한다. 그리고 당시 담임선생님은 몇 개월 계시다가 떠나시고 나의 기억으로는 나중에 주길준 선생님이 당분간 담임의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점심시간이 되면 가지고 온 도시락을 가지고 청량대에 올라가 오순도순 얘기하며 점심을 먹었다. 많은 학생들은 점심을 가지고 올 형편이 안되어 풀밭에 그 시간에 누워 쉬기도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나는 개구리 군과 (Y군) 함께 청량대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큰 향나무 밑에 누워서 유독 히도 파란 하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설계한 적이 있다. 그 때 불쑥 개구리 군이 내게 말한 이야기는 평생 잊혀지지를 않는다. “용우야 너는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나도 열심히 할게”. 개구리 군이 무심코 지껄인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개구리 군의 “큰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개구리 군의 이 말이 생각이 나서 빙그레 웃고 새 힘을 찾는다. 그 후 개구리 군은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아 철도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한번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 때 우리는 모두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아침에는 전차를 타고 오지만 공부가 끝난 후에는 걸어서 집으로 갔다. 때로는 제기동으로 가서 (그곳은 동대문으로 가는 길과 왕십리로 가는 길이 갈리는 곳이었다) 그 곳에 위치한 검문소에서 서 있다가 헌병이 차를 세우는 사이에 차 뒤에 올라타고 언제든지 차가 설 때에 내렸다. 상당히 도움이 되어서 우리는 재미를 붙였다. 그 당시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눈 친구 중에는 L군이 있다. 그가 촌에서 왔다고 우리는 촌놈이라고 불렀다. 그의 집안은 학자 집안이라 삼촌이 누구며 형님은 누구인가를 나는 잘 알고 있는데 최근 50여년 만에 통화를 해보니 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기억은 선별적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별명을 지어 부르기를 좋아했는데 대개는 모양에 기인한다. 새우, 짱구, 개구리, 아주사(그 때 불렀는지는 의문시 됨), 넙치, 쪽발이, 캩(Cat), 촌놈, 등등. 아마 이들은 독특한 개성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평범한 친구들은 별명이 없었다. 무엇이든 나타나는 일을 했기에 별명이 붙여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우리는 여학생들에게는 별명을 별로 부르지 않았고 모두 점잖게 대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외는 있어서 늑대라는 별명을 가진 여학생도 있었다. 그러나 이 별명은 오해에서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오랜만에 청량대의 화창한 봄을 생각하며 미소를 짓게 되었다. 우리는 참 어려움을 많이 겪으면서 그 것이 어려움임을 모르며 중학생활을 보냈다. 그래서 재미있던 시절이었고 그래서 천진 난만했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문득 청량대에 가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가서 다시 미래를 설계하고 싶다. 가서 친구들의 별명을 부르며 파란 하늘을 쳐다보고 싶다. 그리고 격려의 말을 주고받고 싶다.
주: 1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의 존함을 잊었는데 이 글을 먼저 읽고 손난주 동문이 황희숙 선생님이라 알려주어 감사한다. 그 이외에도 몇 군데를 교정하였다.